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2화 (212/320)

212.

나는 이번에도 아픈 걸 잊고 뛰어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충격이 가해진 발목은 도중에 항복을 선언해 버렸다. 높이 뛰어올랐다가 착지한 순간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한 번 인식된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멜로디에 집중하며 음악에 나를 맡기려 노력했다. 아프지 않아. 내 발은 괜찮아. 끊임없는 함성으로 우리에게 응원을 보내는 디어리를 보면서 그렇게 내 자신을 세뇌했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웃으며 동작을 크게 움직였다. 움츠리지 마. 평소처럼 힘 있게. 높이 뛸 수 있어. 나는 다리를 접어 올려 점프한 뒤 깔끔하게 착지했다.

욱신. 욱신. 욱신.

통증이 점차 그 크기를 키웠다. 그러나 나는 계속 웃었다. 유찬 형과 어깨를 스치며 자리를 바꾸고, 격렬한 댄스 브레이크 타임도 넘겼다. 무대에 서 있는 동안엔 디어리에게만 집중했다. 소중하고 귀한 우리의 팬, 디어리들이 날 보고 있다는 걸 계속 내게 직시시켰다.

유독 길게 느껴졌던 무대였다. 엔딩 포즈를 취한 우리를 카메라가 꼼꼼하게 담았다가 멀어졌다.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남은 체력을 확인했다.

체력의 숫자가 막 0으로 바뀌었다.

어……?

분명 무대 시작하기 전에 48% 정도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빠, 빨리 스킬! 하지만 그 순간 시스템이 발랄하게 최후통첩을 했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아, 안 된다고! 아직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이란 말이야! 나는 제발 참을만한 게 나오길 바라고 또 바랐다. 오늘따라 상태 이상 돌림판 소리가 왜 이렇게 경쾌하게 들리는지. 꼭 약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시스템: 상태 이상 ‘빈혈’에 걸렸습니다.>

바닥이 솟구쳐 올라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뭔가가 손가락에 걸린 것 같았는데 제대로 움켜잡지 못했다. 휘청거리던 나는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기울어졌다.

무대에 얼굴을 박을 것만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팔이 붙잡혔다. 동시에 몸이 붕 떠올랐다. 시야가 흔들리며 돌고 있어서 초점이 함께 흔들렸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뒤에야 날 안아 든 사람이 강현 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꺄아아악!”

“하온아!”

놀란 디어리의 비명과 웅성거림이 들렸다. 멤버들이 내게 뛰어오고 스태프들이 무대로 뛰쳐 올라왔다. 그 틈에는 매니저 형도 끼어 있었다. 미치겠네. 괜찮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면목이 없잖아.

차라리 무대에 내려간 뒤에 터지지. 그러면 조용히 수습이라도 할 수라도 있을 텐데. 나는 디어리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져버렸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매니저 형은 강현 형에게 날 밴으로 옮기라 외치며 차 키를 집어 던졌다.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키를 유찬 형이 받아들자 강현 형은 나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면 끝나는 상태 이상은 문제도 아니었다. 발목이 문제였다.

정말, 너무 아프다.

어지럽고, 구역질 나고, 발도 아파.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강현 형의 옷깃을 꽉 쥐었다. 내 손바닥 안에서 형의 무대 의상이 구겨졌다.

이서호와 정이한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통증이 한 번에 몰려든 것처럼, 격렬하게 박동하는 발목에 내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내일 무대 못 서면 어떡하지…….

***

강현 형은 내가 항상 앉던 맨 뒤가 아닌, 운전석 바로 뒤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 시트를 뒤로 확 젖혀 내가 누울 수 있게 해줬다. 나는 어지럼증을 참을 수 없어서 팔등을 눈가에 올린 뒤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 형이 주차장에 나타났다. 형은 멤버들이 모두 밴에 올라타 있는 걸 확인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녹화는 너희 마지막에 찍은 거로 끝났어. 바로 병원으로 갈 거야.”

이걸 확인하고 온 거구나. 그나마 다행이네. 그럼 내일은? 지금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렇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입을 열었다.

“매니저 형……. 저, 내일 무대에 설 수 있어요?”

“진하온.”

유찬 형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내게 으름장을 놨다. 나는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고집부리고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형들이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도 절대 형들을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내 입장이라면 또 달라진다. 나는 절대 무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번 활동기가 끝나면 또 몇 개월 동안 무대에 오를 수 없잖아. 이번에만 잠깐 혹사한다면 앞으로 한동안 휴식하며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병원 가서 결과 듣고 결정하자.”

매니저 형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더 우기지 못하고 꼬리를 내려야 했다.

“……네.”

대화가 끊기자 다리가 다시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아프지 마. 아프지 말라고. 빨리 나아. 제발.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하온아.”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팔을 치우고 눈을 떴다. 우울한 얼굴의 유찬 형이 날 지그시 보고 있었다.

“어제 나 때문에 다친 거 맞지.”

“……제 실수였어요.”

“내 실수잖아.”

유찬 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마치 폐에 남은 공기를 다 쥐어 짜내려는 듯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찬 형. 제가 다친 건 제 판단이었고, 제 실수였어요. 형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내가 멍청하게 서 있지만 않았어도 네가 다칠 일은 없었어.”

죄책감이 가득 묻은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완고했다. 애초에 비 때문에 무대가 미끄러운 걸 알면서도 강행한 사람이 있는데, 왜 유찬 형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내 발목 부상의 원인은 따지자면 우리가 당일에 안무를 바꾸게 만든 방송국이었다.

“굳이 잘못한 사람을 꼽자면……. 방송국 피디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맞지. 무대 미끄러운 거 뻔히 알면서 강행한 방송국이 제일 나빠!”

이서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유찬 형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서호가 농담하듯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애초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비가 잘못한 거 아냐? 왜 하필 어제 비가 내려서는!”

“내 말이.”

내가 이서호의 말을 받으며 웃자, 이서호는 날 보고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진하온, 너도 잘한 거 없어. 너 진짜 상습범인 거 알지? 벌써 몇 번째냐?”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진짜. 체력 관리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달아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오늘은 진짜 예상 못 했는걸. 무대에 올라가 있으면 체력 같은 건 하나도 생각이 안 나기도 하거니와…….

오늘은 평소보다 더더욱 디어리만 보고 집중하느라 체력 떨어지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체력이 떨어지면 원래는 몸에 기운이 쭉 빨리는 느낌이 들었을 텐데…….

어쩌면 내 예상보다 무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몸 상태를 미리 알았더라도 무대에서 내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겠지만.

조용히 있던 유찬 형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잘못한 거 맞아. 다른 이유를 대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아.”

어떤 말을 해도 형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온아. 아프면 말하기로 했잖아. 그걸 왜 숨겨? 큰일이면 어떡하려고. 아팠을 때 바로 말했어야지.”

“……죄송해요. 다음에는 숨기지 않을게요.”

“매번 말만 그렇게 하잖아. 한 번이라도, 미리 말해준 적 있어? 항상 너 쓰러지고 나서야 우리는 네 몸이 안 좋다는 걸 알아. 그게 얼마나, 얼마나…….”

유찬 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제는 형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겠네.

하지만 상태 이상이 터지는 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 걸. 그게 아니었다면 무대에서 내려와 솔직하게 말하고, 병원에 가면 되는 거였는데.

“강현이 너도 그래. 하온이 아픈 거 알았으면 우리한테 언질을 줬어야지.”

유찬 형은 강현 형을 원망하듯 흘겨봤다. 괜히 나 때문에 말려든 강현 형한테 미안했다.

“말했으면 하온이 무대 못 서게 했겠지.”

“당연하지!”

“그래서야.”

강현 형은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유찬 형만 직시했다.

“뭐? 무슨 소리야, 그게?”

“형도 무대가 소중하잖아. 발목이 부러져도 무대에 오르고 싶은 게 우리잖아.”

“그러니까 더 막았어야지. 한 치 앞만 봐? 1년, 2년.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활동해야 하는데 지금 무리한 것 때문에 미래를 망칠 수도 있어!”

유찬 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도 알아. 심하지 않았으니 테이핑해준 거고.”

“그걸 왜 너 혼자 판단해. 네가 의사야? 아니잖아!”

“그럼. 하온이 당장 무대에서 빼고 4인 안무로 바꾸면 실수 없이 할 자신은 있고?”

“너……!”

“그만!”

참다못한 내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지만 상태 이상이 아직 건재함을 자랑하는 바람에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나는 운전석을 손으로 짚은 뒤 흐릿해진 초점이 맞길 기다렸다.

싸우던 형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두어 번 심호흡한 뒤 허리를 다시 세우고 형들을 바라봤다.

날 보는 형들의 얼굴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형들 싸우는 거 처음 봤는데 그게 나 때문이라니. 내가 발목 부상을 숨긴 탓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대는 소중해. 하지만 나한텐 무대만큼 멤버들도 소중했다. 이런 식으로 형들이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표정을 굳힌 채 유찬 형과 강현 형을 봤다.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수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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