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나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은 세운 채 허리를 똑바로 폈다. 고개를 틀어 정면을 바라보자 엔딩 포즈를 취한 우리와 카메라가 가까워졌다.
무대에서 신나게 뛰어놀 땐 느낄 수 없던 통증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쿡쿡 쑤셔 오는 통증 탓에 얼굴이 일그러질까 봐 여느 때보다도 힘껏 미소 지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카메라가 멀어졌다. 동시에 강현 형이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나는 형한테 기댄 채 오른쪽 다리에 힘을 뺐다. 디어리들이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함성을 보내주고 있었다.
“다시 갈 것 같은데.”
강현 형의 시선이 내 오른쪽 발목에 잠시 머물다가 떨어졌다. 괜찮은지 확인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형도 들었어요?”
“어. 노이즈 있었어.”
그럼 내 인이어 문제가 아니네. 아주 미세했지만 도중에 지직거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강현 형도 똑같이 들었다면 음향 장비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곁눈질로 스태프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걸 지켜보며 오른쪽 다리에 슬쩍 힘을 줘 통증을 가늠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통증이 심해졌다.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아직 괜찮아요.”
“……후.”
강현 형은 조금 후회하는 듯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가는 건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강현 형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정말 아프면 말할게요.”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난 후, 짧은 대기 시간이더라도 디어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무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이서호는 무대에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디어리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 당연히 오늘도 형들이 물 뿌려서 깨웠죠!”
당당한 이서호의 외침에 디어리들이 즐겁게 웃었다. 내가 곁으로 다가가자 가까운 곳에서 “하온아! 사랑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사랑해요!”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날리자 함성과 하트가 고스란히 돌아왔다. 행복하다. 무대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 멤버들이 좋고, 디어리가 좋다. 발목 좀 욱신거린다고 이런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지.
곧이어 두 번째 녹화가 시작됐다. 1절의 내 고음 파트에서 더 크고 확실한 노이즈가 음향에 섞여 들자 도중에 녹화가 끊기고 음향 장비 점검이 시작되었다. 성난 피디님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마이크도 없는데 진짜 목소리 한번 쩌렁쩌렁하다니까.
***
문제 해결에 시간이 걸리는지 대기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어서 무대에서 내려가 쉬고 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뜨거운 조명 밑에 서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왔는데 잠깐 사이에 나는 또 땀에 푹 절어 버렸다. 왼쪽 발에 대부분의 무게를 싣고 있었는데도 오른쪽 발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남은 체력을 확인해 보니 벌써 체력이 50%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앞으로 한 번? 아니면 두 번 정도 가능하려나. 정 안되면 죽어도 고 스킬을 쓰는 수밖에.
“하온아,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 더워?”
정이한의 손이 내 얼굴에 닿지 못한 채 배회했다. 땀을 닦아주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메이크업 상태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조금 덥네요.”
나는 내 얼굴을 향해 손부채질하며 생글거렸다. 그에 해답을 찾았다는 듯 정이한이 곧 두 손으로 열심히 내게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귀엽기는.
“디아스! 준비해주세요!”
스태프의 목소리에 우리는 다급히 제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신기하게도 전주가 흘러나오자 통증이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멜로디에 흠뻑 빠진 채 신나게 무대를 누볐다. 그리고 엔딩 포즈. 숨을 헐떡이며 카메라와 눈을 맞췄다. 좋아, 이번에는 노이즈를 못 들었어.
하지만 감독님은 ‘한 번 더.’를 외쳤다. 강현 형의 앓는 목소리가 유독 내 귀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하온아.”
“강현 형.”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부르고 입을 다물었다. 형은 나를 말리고 싶어 했고, 나는 무대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서로의 고집이 침묵 속에서 부딪치는 게 느껴졌다.
“……하온이, 발 아프지.”
유찬 형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아까도 강현 형이 떠봤을 때 바로 걸렸으니 이번엔 일단 무작정 발뺌부터 했다.
“아니요.”
“아니긴. 강현이 너는 알고 있고.”
“……어.”
악! 배신자! 이렇게 바로 말하다니! 괜히 유찬 형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데 형은 완전히 디어리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얼굴 보여달라는 디어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은데.”
형의 어투는 딱딱했다.
“이번에 사녹 깔끔하게 끝내고 보자.”
유찬 형은 그대로 정이한과 이서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한아, 서호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하자.”
“난 항상 제대로 하는뎅!”
“응. 알았어.”
“농담 아니야. 진짜, 이번에 끝내야 해. 알았지?”
“뭐야? 쫌 심각해 보인다?”
유찬 형이 조용히 응시하자 이서호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매니저 형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서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데, 강현 형이 얼른 매니저 형에게 다가갔다.
“하온아, 너만 메이크업 수정한다는데.”
“아…….”
내 걸음걸이에 신경 쓰며 무대 아래로 내려가기 무섭게 누나들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넘기고 땀을 식혀줬다.
“하온아.”
팔짱을 낀 매니저 형이 진중한 어조로 날 불렀다.
“네, 형.”
“너 몸 안 좋지.”
“…….”
아, 다 걸리네. 진짜 뭘 숨길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티를 많이 냈나? 그래도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는 것 같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하나. 하지만 그것도 이대로 무대에 다시 오르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거잖아.
“저 더 할 수 있어요.”
매니저 형은 한숨을 쉬면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디가 아픈데. 정확하게 말해 봐.”
나는 슬쩍 오른쪽 발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순 매니저 형의 안광이 번뜩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리? 발목이 아픈 거였어?”
형은 다짜고짜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무릎 꿇고 앉아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어디 봐.”
“테, 테이핑은 했어요.”
“씁.”
숨 삼키는 소리가 무척 위협적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바짓단을 접어 올렸다. 양말을 돌돌 말아 내리니 붕대로 꽉 조여 있는 발목이 드러났다. 매니저 형은 뭔가를 확인하듯 내 붕대를 잡아 당겨보고 술술 풀어내 버렸다.
“테이핑은 잘했네.”
나는 자꾸만 불안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여기서 너무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나 빼고 녹화하면 어떡해? 그건 싫은데.
“얌전히 있어. 이거 확인한 뒤에 어떡할지 정할 거니까.”
“그렇게 안 아파요. 이대로 무대에 설……!”
매니저 형이 내 발목을 지그시 눌렀다. 순간 찌릿찌릿하게 찾아온 고통에 말을 멈춘 채 입술을 꽉 여물었다.
“안 아프다며?”
“괘, 괜차나아악! 아프잖아요!”
“이제야 좀 솔직하게 말하네.”
나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막 눌러도 돼? 어? 섭섭한 마음에 매니저 형을 노려봤더니 형은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내 손을 치워냈다. 그리고는 풀어낸 붕대를 다시금 꽉 조여 테이핑해줬다.
“다행히 심각한 건 아니네.”
“……그럼 저 무대에 올라도 돼요?”
“어쩔 수 없지. 지금 너 없는 안무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방할 수도 없으니.”
윽. 그, 그렇지. 멤버 중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무 전체를 바꿔야 하는 거였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래만 내려봤다. 매니저 형이 머리 위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온아. 너는 프로야. 연생이 아니잖아. 그룹을 위해서라도 네 몸 상태를 제대로 알려줘야 해. 참는다고 다가 아니야.”
“……네. 죄송해요.”
“만약, 네가 네 몸 상태를 미리 알려줬다면 병원에 조용히 들렸을 수도 있어.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상황을 설명하고 순서를 뒤로 미룰 수도 있고. 지금처럼 마냥 무대에서 네 다리를 혹사하게 세워 두진 않았을 거라고.”
……그런 대응법도 있었구나. 나는 내가 부상을 입으면 무조건 날 빼고 멤버들끼리만 무대에 올라갈 줄 알았다.
“무대에 설지 말지는 그때그때 멤버들 상태 보고 정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무조건 숨기다가 무대에서 쓰러지면, 디아스 결방될 수도 있어. 그걸 원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다음부턴 무조건 말해. 그래야 도울 수 있어.”
“……꼭 그럴게요.”
매니저 형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누나들에게 신호를 줬다.
“어쩐지 하온이 오늘 유독 땀을 많이 흘리더라니, 발이 아파서 그랬구나.”
누나들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데굴 굴려서 매니저 형을 봤다. 나 식은땀 흘린 것 때문에 눈치챈 거였어? 이건 뭐 어떻게 속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네.
메이크업 수정이 끝나자 매니저 형이 내 팔을 잡아 부축해줬다. 그리고 무대 바로 밑까지 나를 데려다준 뒤, 계단 앞에서 조심스럽게 팔을 풀어냈다. 이제 이 계단만 오르면 무대였다.
가파른 세 개의 계단을 오르자 유찬 형이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들고선 장난스레 말했다.
“봐요! 저 힘 세다니까요?”
유찬 형은 디어리에게 자랑하듯 나를 들어 무대 중앙까지 데리고 갔다.
“유찬아! 강현이! 강현이 안아 봐!”
유찬 형은 우뚝 멈춰서서는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이 자리는 초기 대형 때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고서 형은 삐거덕거리며 강현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 말했다.
“……아, 이건 무리.”
“사람한테 ‘이거’라고 해도 돼?”
“강현이는 무리.”
디어리들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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