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99화 (199/320)

199.

모든 사고가 형의 미소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뚝 끊겼다.

“너는 그런 존재야.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화르륵 달아오르는 열감에 뺨을 꾹 누르면서 시선을 떨궜다. 이어지는 형의 말을 더 듣고 싶기도 했고, 부끄러워서 도망쳐 버리고 싶기도 했다.

“우리를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저는 형들이 좋아요.”

강현 형은 다 안다는 듯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응.”하고 대답해줬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는데 막상 입을 여니까 말이 술술 나왔다.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 제 마음이 갑자기 정해질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형들의 마음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어요.”

“그래.”

내 생각을 지지해주는 듯한 대답에 힘을 얻어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 그룹만 생각하고 싶어요. 형들이 소중한 만큼 저에게는 디어리도 소중해요. 그래서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답을 냈을 때 형들 모두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어.”

강현 형은 동의를 구하듯 유찬 형과 정이한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난 뒤에야 어깨의 힘이 풀렸다. 나는 줄곧 내가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온아.”

유찬 형이 무릎을 툭툭 두들겼다. 테라피 해달라는 신호였다. 예전이라면 쪼르르 달려갔을 테지만 이번엔 어쩐지 주저하게 됐다. 유찬 형은 변하지 않을 듯한 온화한 눈길로 그저 날 바라봤다.

“……괜찮아요?”

내가 가까이 가도 되는지, 예전처럼 형한테 붙어서 치대도 되는 건지. 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응. 부탁할게.”

유찬 형의 미소는 평소와 같았지만, 입꼬리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짝 마른 듯 건조해 보이는 입술을 계속 혀끝으로 축이는 형의 모습이 초조해 보였다.

내가 멀어질까 봐 그러는 걸까.

나는 주저하면서 유찬 형에게 다가갔다. 형의 어깨를 짚고, 허리를 숙여 목을 끌어안았다. 뻣뻣하게 굳은 형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아, 다행이다…….”

무엇이 다행인지 물어볼 만큼 난 멍청하진 않았다. 유찬 형은 내 허리를 마주 안은 채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아주 작게 ‘고마워, 하온아.’하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어쩐지 가슴이 찡해져서 나도 유찬 형의 등을 토닥여줬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제가 형 싫어할까 봐요?”

“아니. 하온이가 이제 나 경계하고 피할까 봐.”

“그러고 싶긴 한데…….”

“뭐? 진짜?”

놀란 유찬 형이 내 팔을 잡아 밀어냈다. 그리고는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로 날 올려다봤다. 나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피하기에는 형들 없인 못 살아요.”

“……놀랐잖아!”

“아하하.”

유찬 형은 가뜩이나 내 말이라면 끔뻑 죽었었는데 앞으로는 더 할 것 같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을 꼭 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럼 나 앞으로도 하온이 꼬셔도 되는 거야?”

정이한이 산뜻하게 웃으며 말하자,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그건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형들.”

“응?”

“어.”

“왜?”

“일단, 제가 남자거든요?”

형들은 날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며칠 전, 동성애에 관해 검색해 본 적 있었다. 이쪽 세계와 내가 지내던 세계의 사회적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가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커밍아웃한 연예인들이 있긴 했으나 원래 있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소수일 뿐이었다.

“형들은 성별 상관없는 거예요?”

“성별 위에 하온이가 있는 건데?”

정이한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다른 형들도 그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이거, 역시 매력 스탯 영향인가. 형들의 마음을 인정한 것과 별개로 날 보는 형들의 눈빛이 달라진 계기는 매력 스탯 때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제 얼굴 때문에요?”

매력 스탯의 효과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형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하온이 얼굴이 예쁘고, 잘 생기긴 했지.”

유찬 형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매력…….

“하지만 얼굴 때문에 하온이를 좋아했다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이어진 유찬 형의 말에 나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네. 내 매력 스탯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S급이었지. 그럼 진짜, 형들의 감정은 스탯이랑 관계없다는 건가…….

유찬 형은 눈웃음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연예계에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많잖아. 그런데도 하온이가 우리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건, 함께 지낸 시간 덕분이 아닐까.”

“저희는 항상 다섯 명이 뭉쳐 다녔잖아요…….”

“응. 하지만 힘들 때 제일 먼저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은 하온이였잖아. 네 상냥한 마음이 조금씩 스며든 거야. 그러다가 깨달은 거지. 아, 내가 하온이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유찬 형이 보는 ‘나’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저는 위로에 재능이 없어요…….”

“하온이는 항상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하잖아.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아. 별걸 다 책임지려고 한다던 그 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거든.”

……내가 저런 말을 했던가? 기억에 없는 말이라 머릿속을 뒤지고 있는데 유찬 형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 못 하는구나?”

“죄송해요…….”

“미안할 건 아니지. 누구나 자신이 뱉은 말을 전부 기억하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나는 하온이 덕분에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의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거야.”

유찬 형은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시엔 몰랐는데, 내 마음을 자각하고 생각해 보니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더라. 내 안에서 하온이가 특별해졌던 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 마음의 종류가 달라진 거였어.”

유찬 형은 내가 쓰러져 입원했던 그 병실에서 마음을 자각했다고 했다. 지금 와서 되짚어보니 그때 유찬 형이 좀 이상하게 굴긴 했었다. 며칠 지나니까 평소대로 돌아와서 잊고 있었는데…….

“나는 하온이가 작업실에서 날 데리고 나와줬을 때부터였어.”

정이한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윽. 형은 무인도에서 제가 벗은 거 보고 알았다면서요.”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뱉고 나서 좀 너무했나, 하고 후회하는 사이 정이한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아! 왜 그것만 기억해! 그, 그건 자각한 거고, 나는, 처음부터였다고 했잖아…….”

“당연히 그것도 기억하죠.”

투정 부리는 게 귀여워서 웃으며 대꾸해주자 정이한은 금방 풀어져서 날 보고 생글거렸다. 그럼 강현 형은? 강현 형과 있던 특별한 일이라고는, 이번에 같은 침대에서 잔 것뿐인데…….

“아, 내 차례인가.”

강현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네가 진하온이라서. 그래서 난 널 좋아해.”

“뭔가 추상적이네요…….”

“그래?”

강현 형은 잠시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왼쪽 가슴에 손에 올린 형이 강직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유일하게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사람, 그게 너야. 너뿐이야, 하온아.”

“……!”

저 형 진짜, 와, 진짜. 정이한도 만만치 않았는데 강현 형은 한술 더 뜨네. 다들 어디서 이상한 거라도 배우고 왔나? 멋대로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혀, 형. 작사해볼래요?”

나 당황하면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이는구나…….

“갑자기?”

나는 민망함에 엄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별로였나.”

어쩐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리는 강현 형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형이 오해했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순간 좀 설, 아니,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한 거예요…….”

“설렜어?”

강현 형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귀신 같은 형.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고 꼬집어 내다니.

“네……. 그래요. 설렜어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허망하게 말하자 강현 형이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 형이 좋으면 됐지.

“아! 강현이 말발 이기려면 머리 좀 써야겠네.”

유찬 형이 가볍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를 민망함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는 신호인 줄 알았건만, 유찬 형도 만만치 않았다.

“하온아, 데이트하자.”

“……네?”

“다음에 나랑 단둘이 데이트.”

“어? 그럼 나도!”

“나랑도 할 거지?”

나는 대답도 안 했는데 유찬 형이랑 데이트하는 게 확정된 분위기였다. 심지어 형들은 순서를 정하자면서 본인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형들이 수영장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설마, 그럼 그때도?

그러고 보니 강현 형이 나한테 수영을 가르쳐줄 때 정이한은 끼어들지 않았고, 유찬 형은 이서호를 데리고 가버렸다. 완전히 내가 강현 형이랑 둘만 있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준거잖아?

“형들, 수영장에서 가위바위보 한 거 강현 형이 이긴 거예요?”

“응? 어. 어떻게 알았…….”

내 유도에 걸린 유찬 형이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난 이미 알아버렸는걸! 강현 형은 목을 가다듬으면서 민망해했고, 반면 정이한은 져서 아쉬웠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형들은 계속 날 좋아했던 거잖아. 그때랑 달라진 건 이제 나도 형들의 마음을 안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우리 이제 정리하고 내려가자~”

유찬 형이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를 접다가 문득, 옥상에 길게 늘어진 형들의 그림자가 한데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왠지 나 혼자만 형들과 다른 길 위에 동떨어져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섭섭함은 아니었다. 그저 이 길의 끝에 누군가가 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아직은 짐작이 되지 않는 미래를 그려보다가, 그만뒀다.

언젠가 알게 될 미래일 테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9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