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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198화 (198/320)

198.

괜히 따라왔어. 셋이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따라온 내 잘못이었다. 유찬 형 성격에, 내 부탁이라면 곤란하더라도 거절하지 않았을 거란 걸 알면서도.

내가 형들에게 뭐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같은 멤버라고 사실 모든 걸 공유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당장 나만 해도 정이한한테 고백받은 걸 형들한테 숨기려고 했었잖아. 나는 섭섭함을 느끼면 안 된다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면서 나를 달랬다.

“하온아, 그게 아니라…….”

유찬 형이 당혹스러워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고, 정이한은 안절부절못한 채 날 올려다봤다. 강현 형도 눈에 띄게 눈썹 끝을 올린 채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내가 분위기 싸하게 만들었나 보다. 내 말에 감정이 좀 실려 있었나.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면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니에요. 사실 형들 할 말 있는 거 눈치챘는데, 모르는…….”

“알고 있었어?”

정이한이 깜짝 놀란 듯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역시 그랬군. 나는 서운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온이 둔한 줄 알았는데.”

정이한은 어쩐지 조금 안도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이렇게 꽁꽁 숨기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라면 언젠가 해줄 테니까.

“저 눈치 빠른 편이거든요.”

나는 코끝을 찡그리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어쨌든 형들, 이야기 나눠요. 이따 봐요.”

“어? 어디가?”

옥상 문으로 향하는 내 앞을 정이한이 막아섰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뭐지. 어쩐지 대화가 어긋난 듯한 느낌인데. 내가 정이한을 따라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난데없이 유찬 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강현아. 우리 망한 듯.”

“……그러게.”

뭐가? 유찬 형은 당혹스러워서 멀거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하온이가 오해하는 것 같아.”

형은 나를 캠핑 의자로 데려가 앉히면서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리끼리 할 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온이한테 할 말이 있거든.”

“……아.”

형들이 나한테? 그럼 이서호에게 게임기를 쥐여 준 것도 다 계획된 일이었나? 이서호가 들어서는 안 되고, 형들이 내게 할 말이라는 건…….

정이한이랑 관련된 거 아니야? 나는 본능적으로 정이한을 찾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이한은 뭔가 억울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범인이냐?’하고 묻는 것 같긴 했나 보네.

“일단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

유찬 형은 조금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정이한이랑 관련된 게 아니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실수한 게 있었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내 실수를 지적하는 자리는 또 아닌 것 같고. 진짜 실수를 했었으면 유찬 형은 개인적으로 날 불러내서 말하지, 이렇게 멤버들이 다 모여있는 곳에서 말하려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뭐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나는 형들이 말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정이한이 반쯤 탄 장작을 뒤적거리자 사그라들던 불꽃이 다시 힘을 얻었다.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불똥을 눈으로 쫓았다. 작은 불똥이 금세 사라지자, 진지하게 날 보고 있는 강현 형에게로 초점이 맞춰졌다. 모닥불이 일렁일 때마다 형의 얼굴에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 때문인지 형은 마치 무언가를 각오한 것처럼 결연해 보였다.

“하온아.”

“……네.”

“내가 너 좋아해.”

응? 강현 형의 직설적인 애정 표현은 처음인 것 같은데. 조금 놀라긴 했지만, 형이 민망해할까 봐 얼른 방긋 웃었다.

“저도 형 좋아해요.”

“그런 의미 말고.”

그럼, 무슨…….

나는 본능적으로 정이한이 답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이한은 내 시선을 피해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바로 마주쳤을 텐데 날 보지 않는다는 건…….

농담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내 해석이 맞았다면 강현 형의 감정은 정이한과 똑같다는 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잔뜩 긴장한 유찬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목울대를 크게 한 번 꿀렁한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좋아해, 하온아.”

“어…….”

뭐야, 장난하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네 명 중 세 명이 날 좋아한다고? 우리는 혼성 그룹도 아닌데?

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유는 하나였다. 매력 스탯 때문이다. 그러면 형들은 나한테 휘말려 든 거 아니야? 하지만 단순히 스탯 문제로 치부하고 가볍게 넘길 순 없었다.

스탯이 원인이라는 건 나만 아는 데다 형들은 가볍게 말한 것과 달리 무척 진지해 보였다.

그럼 나 어떻게 해야 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지 않았나. 갑자기 몇 시간 전까지 누렸던 일상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앞으로 우리 그룹은 어떻게 되는 거지? 디어리들이 알게 되면 배신감에 뒤집어지는 건 물론이고, 우리 그룹은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거다. 정이한 한 명이 날 좋아하는 것도 문제인데 유찬 형이랑 강현 형까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미안. 곤란하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강현 형의 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다. 내게 형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이게 전부 매력 스탯 때문인 것 같고, 그래서 우리 그룹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 겁도 났다. 겨우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가 다 망쳐버린 것 같아 속상했다. S급 스탯권 받았다고 냅다 매력에 투자한 과거의 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곤란, 보다는 조금 당황스러워요…….”

강현 형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약한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시큰거렸다. 도대체 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어…….”

나는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지금은 아무하고도 사귈 수 없다. 사귈 마음이 없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정이한이랑 대화를 나눌 땐 어떻게 했더라? 그때는 뭔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것 같은데……. 아니, 아니다. 나 그때도 당황해서 어버버거렸던 거 같아.

“대답은 천천히 듣고 싶은데, 안 될까?”

“네?”

놀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강현 형이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유찬 형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유찬 형이 강현 형을 한 번 힐끔거린 뒤 다시 날 봤다.

“음. 사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아, 네, 네에.”

유찬 형은 평소와 똑같은, 하지만 어딘지 긴장되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입술을 열었다.

“우리 세 명이 하온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내 가장 큰 걱정은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면 어떡하나, 였어.”

그러니까! 나는 격하게 공감되는 심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유찬 형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답을 냈지. 우리 셋이 같은 위치에 서자. 그리고 하온이에게 대시한 뒤 차이는 사람은 깔끔하게 마음을 접자. 누군가가 이어진다면 그 사랑을 서로 응원해 주자, 하고.”

“……아.”

전에 정이한한테 들었던 말이랑 비슷한데? 그럼 그때 이미 정이한도 형들 마음을 알고 있었고, 나한테 말실수해서 수습했던 건가. 정이한이 거짓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깜빡 속아 넘어갔다.

“우리가 널 좋아한다는 마음은 확실히 전해졌어?”

“……이제는 모를 수 없죠.”

유찬 형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전하고 싶었어. 가슴 속에 묻어 두기에는 감정이 너무 커졌거든. 그래서 이한이가 제일 먼저 네게 고백하고, 당당하게 널 꼬실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어.”

그걸 말했어?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한 거야! 나는 황당한 마음에 정이한을 힐끔거렸다. 정이한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내 눈을 피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지금 하온이가 연애할 생각 없다는 것도 알아. 우리도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왜 고백한 거지? 근본적인 부분에 의아함을 느꼈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대로면 머지않아 우리들 관계가 벌어질 것 같았어. 네게 부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백해야 할 만큼.”

“아…….”

유찬 형은 돌연 어조를 바꾸어 명랑하게 말했다. 거기엔 장난기도 조금 섞여 있었다.

“우리 중에 사랑을 포기할 남자는 없더라고~”

“……아하, 하.”

유찬 형은 어색하게 웃는 날 보면서 잠시 뜸 들인 뒤 깜짝 놀랄 소리를 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한테도 꼬실 기회를 줘.”

“네에?”

이거야말로 오늘 들은 이야기 중 제일 황당한 이야기였다. 어쩐지 정신이 아득해져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제각각 존재감을 발하며 빛나고 있었다. 그냥 전부 다 꿈이라고 하면 안 되나.

“하온이는 평소처럼 우릴 대해주면 돼. 네 마음을 잡는 건 우리가 할 일이니까.”

“다 아는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

지금까지 나는 형들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이번 뮤비 촬영할 때만 해도 그래. 내가 알고 있었다면 유찬 형한테 편하게 안기지도, 강현 형이랑 같이 잠에 들지도 않았을 거다.

갑자기 형들한테 내가 한 짓이 떠올라 머리가 띵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하온아.”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강현 형을 마주 봤다. 형의 미소는 해사했다.

“나는 널 좋아하게 되면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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