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90화 (190/320)

190.

뮤비 촬영 장소인 펜션에 도착한 우리는 밴에서 내리기 직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오전 5시에 출발하는 일정이었기에 대충 양치질과 세수만 한 상태로 밴에서 숙면한 뒤 일어난 탓에 멤버 전원이 꼬질꼬질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서 지금 우리 모습을 디어리가 본다면 탈덕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멤버들과 똑같이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사수했다.

다섯 명의 훌륭한 범죄자 집단 코스프레를 한 뒤에야 우리는 한 명씩 밴에서 내렸다. 내리는 순간 ‘예쁜 척’ 스킬이 누군가가 날 찍고 있다는 걸 알렸다.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스태프 사이에 숨은 카메라 감독님이 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왜 이런 꾀죄죄한 모습까지 찍는 거야…….

“얘들아, 이동하자.”

매니저 형이 앞장서자 나는 얼른 그 뒤에 바짝 붙어서 형의 등만 보며 따라갔다. 형은 다시 한번 이번 뮤비 촬영 컨셉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를 펜션 입구로 데려갔다.

건물을 끼고 크게 한 바퀴 돌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경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펜션 앞마당에 있는 테니스 코트 옆을 따라 멋지게 조경된 돌길이 있었다. 그 길 끝에는 바다와 이어진 듯한 수영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우와……!”

우리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바다 내음이 실려 있었다.

“촬영 준비부터 하고 구경하자.”

매니저 형은 멈춰선 우리를 끌어모아 촬영 캠프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자 감독님이 휴대폰과 셀카봉을 들고 오셨다.

“미리 전했듯이 자연스럽게 노는 디아스 모습을 뮤비에 담을 거야. 리얼리티도 좀 찍어봤으니 카메라 무시하고 지낼 수 있겠지?”

우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감독님이 휴대폰과 셀카봉을 건네면서 말을 마무리하셨다.

“이거 들고 다니면서 많이 찍어야 한다?”

“네!”

우리의 이번 컴백 곡은 여름 시즌송이었다. 데뷔 앨범의 계보를 잇는 청량 컨셉으로, 걱정은 접어두고 지금을 즐기자는 내용의 경쾌하고 신나는 곡이었다.

그래서 이번 뮤비 촬영 컨셉도 ‘자유’였다. 스토리 없이 멤버들끼리 펜션 부지에서 노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고, 그걸 편집해서 뮤비로 만든다고 했다.

우리는 소품으로 지급된 캐리어를 하나씩 들고 펜션 입구에 깔린 자갈길 위에 섰다. 이서호가 곧장 셀카봉에 휴대폰을 연결해 우리 모습을 촬영했다.

“디어리 여러분! 저희 뮤비 촬영하러 왔어요! 일하러 온 거긴 한데 꼭 놀러 온 기분이라 너무 설레요!”

이서호가 아이돌의 가면을 쓰고 얌전을 떨면서 방긋거렸다. 이서호는 멤버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면서 휴대폰에 우리 모습을 담았다. 우리는 캐리어를 드륵드륵 끌면서 휴대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컷! 디아스!”

갑자기 감독님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우리는 빠릿빠릿하게 감독님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컨셉이랑 안 맞는다! 지금 너희는 아이돌이 아니라 친구들끼리 펜션에 놀러 온 거야. 그 컨셉에서 벗어나면 안 돼!”

“넵!”

“다시 들어가는 장면부터!”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출발선에 섰다. 자유롭게 하라면서요……. 갑자기 촬영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자 다들 어색해졌는지 삐거덕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여행 온 느낌인걸…….

이러다가 또 감독님이 컷하면 다들 긴장해서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역시 이럴 땐 연기 경험 있는 내가 나서야지!

나는 캐리어를 움켜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대로 펜션 현관까지 뛰어간 뒤 빙글 돌며, 여행의 흥분을 드러내기 위해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형들! 빨리 와요!”

“앗! 진하온! 너 먼저 들어가지 마! 같이 보고 싶단 말이야!”

이서호가 허둥지둥 나를 따라 뛰다가 자갈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우악!”

이서호는 한쪽 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뛰어난 균형 감각을 선보였다. 이서호가 가까스로 넘어지는 걸 피해 균형을 다잡는 걸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갈밭에서 넘어졌으면 대형 사고다.

“와, 자빠지는 줄…….”

“이서호! 괜찮아?”

근처에 있던 유찬 형이 놀라서 이서호에게 다가갔다. 이서호가 무사한 걸 확인한 유찬 형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좁아 들었다.

“악! 아파, 형!”

“조심 좀 해라, 응?”

꿀밤을 맞은 이서호가 한 손으로 제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억울해했다.

“진하온도 뛰었잖아!”

“하온이는 안 넘어졌잖아.”

“와, 나도 안 넘어졌어!”

“넘어질 뻔했지.”

“넘어진 건 아니잖아!”

바락바락 대들던 이서호는 유찬 형의 매서운 눈빛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두 사람을 지나치던 강현 형이 이서호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조심해.”

“으응…….”

그래도 이서호 덕에 다들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행동거지가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들어가면 되겠는데?

***

2층짜리 펜션에는 즐길 거리가 가득했다. 지하에는 노래방 기기와 당구대가 있었고, 1층에는 커다란 거실과 부엌,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가 있는 넓은 방이 있었다. 2층에는 두 개의 룸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싱글베드 룸, 다른 하나는 트윈베드 룸이었다.

옥상에는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밤이 되면 별이 잘 보일 만큼 시원하게 트인 하늘이 보였다. 우리는 무인도 리얼리티 편이 생각난다면서 한참 떠들다가 밤에 다시 옥상에 오기로 한 뒤 1층으로 내려왔다.

“방은 어떻게 할까?”

유찬 형이 우리를 보면서 물었다. 나는 당연히 우리 숙소 룸메이트끼리 쓸 줄 알았는데? 아, 킹사이즈 침대 있는 방이 하나 있었지. 저기 정이한이랑 같이 누우면 되게, 좀 그럴 것 같긴 해…….

“게임으로 정하자!”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1등한 사람부터 원하는 방에 들어가기 어때? 만약 그 방 인원수 다 차면 다른 방으로 가야 하는 거지!”

오늘 이서호가 하드캐리하네. 비록 리얼리티 촬영은 아니지만 방송 비하인드로 충분히 풀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우리 디어리는 이런 사소한 룸메이트 같은 것도 궁금해하니까.

“그거 괜찮네. 생각한 게임 있어?”

유찬 형이 찬성표를 던졌다. 여기서 이제 닌텐드 같은 게임이 나오면 망하는 거다. 나는 판을 벌인 이서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신중한 얼굴로 주변을 슥 돌아봤다. 그러더니 거실에 있는 유리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미소를 지었다.

“병뚜껑 멀리 날리기!”

“괜찮네. 빨리 끝날 것 같으니까 방 정하고 점심 먹자.”

“헉! ……유, 유찬 형?”

가뜩이나 큰 이서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큰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심각한 얼굴이었다. 흠칫 놀란 유찬 형이 잔뜩 경계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울상이 된 이서호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말했다.

“밥 먹고 하는 거 아니었어?”

“……너는, 뭘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밥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어딨다고 그래!”

“하여간 이서호.”

유찬 형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 젓더니 이내 피식거리면서 웃어버렸다.

“혀엉, 배고프단 말이야…….”

이서호의 칭얼거림에 유찬 형이 두 손을 들었다.

“그래, 먹자. 먹고 방 정하자.”

“앗싸아!”

폴짝폴짝 뛰어간 이서호는 곧장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안을 살펴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품에 한 아름 꺼내 들었다. 이서호가 꺼낸 건 전부 고기뿐이었다.

“점심부터 바비큐 하게?”

“점심도 고기, 저녁도 고기, 아침도 고기!”

“그만한 양은 안 될 텐데.”

냉장고를 살피던 강현 형이 부엌에서 이서호를 끌어냈다. 조리대에 올려둔 고기들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우우……. 강현 형, 너무해…….”

“서호, 햄 좋아하지.”

“당연!”

“부대찌개 해줄게.”

“라면 사리도 넣어서?”

“…….”

잠깐 멈칫한 강현 형이 찬장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사리로 넣을 라면이 있었는지 “어.”하고 대답했다. 밥 먹고 싶으면 얌전히 있으라는 말에 이서호는 곧장 소파에 정자세로 착석한 뒤 허리를 곧추세웠다.

평화롭네. 정말 이게 뮤비 촬영 맞나? 리얼리티 찍는 기분인데…….

***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곧장 방 정하기 게임에 돌입했다. 똑같은 생수병 뚜껑에 각자의 이니셜을 적어 놓고,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첫 번째 도전자는 나였다. 병뚜껑을 튕겨 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건 일등 아니면 꼴등이라고. 테이블 끝에 걸쳐진 내 병뚜껑은 생존만 하면 일등이었지만…….

“으하학! 진하온 아웃!”

그럼 그렇지. 저게 살아남을 리 없지. 이서호가 내 병뚜껑을 튕겨낸 뒤 한껏 웃어젖혔다. 다른 형들도 분명 아웃될 줄 알았는데 어이없게도 단 한 판 만에 순위가 결정되어 버렸다.

1등 강현 형, 2등 유찬 형, 3등 이서호, 4등은 정이한이었다. 1층에도 룸이 있어서 우리는 정원에서 기다리다가 한 명씩 원하는 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 순서는 마지막이라 아예 편하게 기다릴 생각으로 흔들 그네에 앉았다. 바람과 풀 내음을 느끼고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정이한이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나무와 꽃 사진을 찍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하온아~”

유찬 형이 나를 불러서 고개를 돌렸더니 휴대폰 카메라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내게 향해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컨셉 포토를 찍는다고 생각하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배경이 좋아서 잘 나올 것 같단 말이지.

그런데 필사적으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도 좀처럼 셔터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사진을 찍어야 할 유찬 형은 멍하니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찍는, 아. 잠깐. 설마 동영상인가?

“아, 형! 동영상 찍는 거였어요?”

괜히 포즈 취했잖아!

“어? 아, 어. 동영상…….”

왠지 어색하게 굴던 유찬 형은 이서호가 “유찬 형 차례야!”하고 소리치자 뛰어가 버렸다. 정원에는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중에 영상 어떻게 찍혔는지 봐야겠어. 이상하면 꼭 지워달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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