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정이한은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혹여라도 잠든 룸메이트가 깰까 봐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이는 행동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다가 진하온이 잠들었는지 확실히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도 자신 때문에 잠 못 이루게 하고 싶진 않았다.
‘예전에도 수면 부족으로 쓰러졌었는데…….’
정이한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듯 조심스럽게 진하온의 침대에 접근했다.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인지 곤히 잠든 얼굴은 다행히 편안해 보였다. 안심이 들자 본능적인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우리 하온이 예쁘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모두 합쳐서 그것에 이름을 붙여 보라고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진하온’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댈 것이다. 아니지. 어쩌면 이미 아름다운 것들이 모여서 눈앞의 사람을 만든 걸지도 모른다.
진하온이 아름다운 건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듯한 외모만이 아니었다. 함께 지내보면 누구라도 그의 내면이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유찬 형과 강현이도 하온이를 좋아하겠지.’
며칠 전 박유찬과 백강현이 은밀히 정이한을 불러냈을 때였다. 두 사람 역시 진하온을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정이한은 충격보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어떻게 하온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정이한의 머릿속에 진하온의 여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양하게 보여주는 미소를 비롯해, 기뻐할 때나, 호기심에 눈을 빛낼 때, 저를 걱정할 때, 사나운 자신을 귀엽다고 할 때.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특히 정이한의 마음이 동할 때는 제 말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진하온을 볼 때였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너를 더 좋아한다고 했을 때, 버벅거리던 진하온은 고개를 돌린 뒤 손으로 부채질했다.
민망한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냐면서 타박했지만, 노을빛으로 뺨을 물들인 채 시선을 피하는 진하온은 와락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럼에도 정이한이 달려들지 않은 건 전날 겪었던 교훈 때문이었다. 이미 한 번 그 난리가 났었는데 또 같은 짓을 반복할 순 없었으니까. 정이한은 솟구치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사실은 안고 싶었는데…….’
품에 꼭 안고 뺨과 볼, 눈가며 이마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이한은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갔다. 괜히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서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안 되지.’
제대로 마음이 통하고, 허락을 받은 뒤에 해야 할 행동이었다. 정이한은 도망치듯 살금살금 방에서 빠져나와 곧장 거실을 가로질렀다.
반대편 방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희미한 무드등이 마중 나왔다. 시간이 늦은 탓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 할 말 있어서 왔는데.”
정이한은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문을 닫았다. 동시에 박유찬이 물었다.
“하온이는 잠들었어? 또 혼자 두고 나온 거 아니지?”
“응. 자는 거 보고 나왔어.”
“……그래. 그럼 됐어.”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정이한은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몰라서 침묵했고, 박유찬은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적막을 깬 건 백강현이었다.
“용건 있어서 온 거잖아. 편하게 말해도 돼.”
“으, 으응. 두 사람한테 좀 미안한 일이 있어서…….”
정이한은 진하온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면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서로 방해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하자고 약속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겼다.
“뭔데?”
정이한은 두 사람에게 상황을 쭉 설명했다.
“……그러다가 들키면 연애 못 한다길래 나도 모르게 유찬 형이랑 강현이는 괜찮다 했다고 했어.”
박유찬이 손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침음성을 냈다.
“우리가 하온이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니지?”
“사실 두 사람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말할 뻔했는데, 간신히 말 돌렸어. 하온이는 눈치 못 챈 것 같았고.”
정이한 일생일대의 연기는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당황해서 등줄기가 척척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자신이 아이돌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렇게 웃을 수 없었을 터였다.
“뭐라고 말했어?”
초조한 기색의 박유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자리에 타인의 입을 통해 제 마음이 전해지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기에 정이한은 얼른 대답했다.
“두 사람이랑 약속했다고 했어.”
정이한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유는 다음에 할 말 때문이었다. 정이한은 두 사람이 자세한 걸 묻기 전에 말을 이어 붙였다.
“내가 하온이랑 잘 되더라도 유찬 형이랑 강현이는 응원해 줄 거라고, 그렇게 약속했다고 말해버려서…….”
“…….”
“…….”
정이한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진짜 약속은 진하온이 그들 중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서로 이해하고 응원해주기로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말을 빼고 하다 보니 마치 두 사람이 ‘제 사랑’을 응원하는 것처럼 돼버렸다.
“……미안해.”
하온이가 오해했을 때 반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말을 있는 그대로 뱉어 버린 이유는, 자신이 진하온의 ‘연애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어쩌면 조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있을지도 몰랐다. 진하온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초조함을 불러왔으니까.
“난 괜찮아. 형이 실수로 내 마음을 전했다면 화났을 테지만.”
백강현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반면 박유찬은 표정을 굳힌 채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길다면 긴 침묵 끝에 무언의 각오라도 한 듯 박유찬이 결연한 얼굴로 폭탄 발언을 했다.
“나 고백할 거야.”
그 말에 정이한은 바짝 긴장해 몸을 굳혔다.
“나는 이대로 제삼자가 돼서 하온이를 지켜보고 싶진 않아. 이번 뮤비 촬영 마지막 날 밤에 고백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말에 정이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박유찬은 백강현을 향해 고개 돌리면서 “너는?”하고 물었다.
“나는 나중에.”
“선물 준비했다면서?”
“나까지 고백하면 하온이가 부담스러울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되냐…….”
박유찬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은 세 사람 모두에게 어려운 선택의 연속이었다. 만약 서로의 감정을 몰랐다면, 만약 서로와 친분이 없었다면, 만약 같은 그룹이 아니었다면.
한 끗만 어긋났어도 자신만 생각해도 될 문제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 명에게 고백받았을 때 진하온이 곤란해진다는 걸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박유찬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채 마음을 접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고백해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는 걸 정이한이 보여줬기에, 차이더라도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진하온을 생각하면 선뜻 말하기 어려웠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정이한 때문에 충동적으로 고백하겠다고 떠들었으나, 말 그대로 충동일 뿐이었다.
제 사랑을 이루고 싶은 마음, 진하온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 앞서가는 그룹 멤버에 대한 질투, 그룹의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혼란했다.
“아오, 복잡하다…….”
박유찬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신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모를 때 고백한 정이한이 승자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진하온이 오해할 만한 발언을 한 정이한에게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았었다.
넌 이미 고백했잖아. 방해하지 않기로 했잖아. 일부러 오해하게끔 한 거 아니야?
입 밖으로 내면 사이가 틀어질 말이 머릿속에 뱅글뱅글 맴돌아서, 그걸 내리누르느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치솟아 오르는 흉포한 감정을 내리누르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고백할래’라니.
‘이러다 언젠가 실수할 것 같아…….’
언젠가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말로 정이한을 쏘아붙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질 것이다. 차라리 세 사람이 동시에 고백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박유찬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제 머릿속의 생각이 휘발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강현아, 우리 다 같이 고백하자.”
“형, 내가 방금…….”
“알아. 잠깐 내 말 좀 들어줘.”
박유찬은 제 계획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백강현은 “그건 좀.”하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할 거잖아.”
“…….”
백강현은 침묵을 지켰으나 박유찬은 그걸 긍정이라고 해석한 뒤 말을 이었다.
“시간 텀을 둔다고 하더라도 멤버 중 세 명이 하온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언제가 되었든 하온이가 느낄 부담도 마찬가지고.”
박유찬은 묵묵히 말을 들어주는 백강현을 응시했다.
“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는 건, 우리가 마음을 접을 때뿐이야. 너 접을 거야? 나는 안 될 것 같아. 고백하고 차이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어. 그래야 깨끗하게 접을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함께 가야 할 멤버들이었다. 박유찬은 추잡스러운 질투심으로 서로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걸 해 본 다음에 미련 없이 마음을 접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편이 모두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언제 할 건데?”
백강현이 묻자 박유찬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시간 끌어봤자 하온이 오해만 깊어질 테니 뮤비 촬영 끝나는 마지막 날 밤. 그때 고백하자. 그리고 우리 셋 모두 정정당당하게 하온이한테 대시하고 차이면 깔끔하게 접는 거야.”
여전히 고민하는 백강현에게 박유찬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온이 둔감해서 우리가 고백 안 하면 평생 모를걸.”
앓는 소리와 함께 백강현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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