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86화 (186/320)

186.

“이한 형…….”

“으, 으응?”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내 눈치를 살피던 정이한은 말라가는 화초의 이파리처럼 어깨를 늘어트렸다.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만약 이번 촬영에서 백팀이 이겨 정이한이 나한테 ‘소원’으로 ‘볼 뽀뽀’를 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들어갔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현장 분위기도 이상해질 거고, 만약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가기라도 했다면 팬들은 또 얼마나 수상하게 여겼을까?

하지만 막상 정이한에게 카메라 앞에서 나를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고 말하려니…… 민망해서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

침묵이 흐르는 사이 정이한의 고개가 익은 벼처럼 바닥으로 푹 수그러졌다. 아무래도 내가 화를 낸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좀 조심해달라고 설득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아…….”

민망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정이한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한 형.”

“어, 어어!”

정이한은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정이한을 마주 보며 차근차근 말했다.

“화난 건 아니에요.”

“……진짜야?”

“네. 화가 난 게 아니라, 으으. 그냥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해서 한숨 쉰 거였는데요. 그러니까…….”

“응응.”

정이한은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메라 앞에서는 저를, 저, 저를…….”

아, 이거 진짜 입이 안 떨어져! 부끄러움이 죄다 얼굴로 몰려든 것만 같았다. 나는 후끈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시선을 피했다.

“으응! 하온이를?”

“……조, 하아. 그러니까요. 카메라 앞에서는 저를 조…….”

또 여기서 막혔다. 계속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나중에는 더 민망해질 것 같았다. 나는 입 속에서 몇 번이고 단어를 굴려본 뒤 눈 딱 감고 할 말을 후다닥 뱉어버렸다.

“……좋아한다고 티 내지 말라고요.”

드디어 말했다! 조금 개운해진 마음으로 한숨을 삼켰다가 이어지는 정이한의 태도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정이한은 내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왜?”하고 물었다.

“당연하잖아요. 괜히 이상한 루머에 휩싸이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뺨에 뽀뽀 같은 소원도…….”

열심히 설명하는데 정이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런 정이한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그럼 내가 뺨에 뽀뽀해달라고 한 건 괜찮다는 거지?”

“으으, 아니, 카메라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지금은 카메라 앞 아니잖아. 그럼 괜찮은 거 아니야?”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정이한의 초롱초롱한 눈이 나를 압박하듯 바라봤다. 이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안, 되지 않을까요?”

“응?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않을까요?’는 뭐야?”

“그러게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제 말 이해했어요? 카메라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말 것! 아, 그리고 멤버들 앞에서도요!”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 그룹은 애초에 막내 러버로 유명하잖아. 뺨 뽀뽀 소원 빌었어도 ‘유난히 막내를 사랑하는 디아스 형아들’ 같은 자막 붙고 끝났을걸?”

그게 말이 되냐고 반박하려다가 멈칫거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확실히 우리 그룹은 멤버 간 스킨십이 진한 편이었다. 특히 체력 때문에 내가 하도 멤버들한테 붙어댄 탓에, 다들 내 손을 잡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더 그랬다.

서, 설득력 있는데…….

“그리고 그 소원, 말이 좋아서 소원이지 사실 봉팀한테는 벌칙이 추가되는 개념이었잖아. 하온이한테는 벌칙이지만 나한테는 상이니까… … 그래서 열심히 했는데…….”

정이한은 빈 백신 상자를 들고 뛴 걸 뒤늦게 알았다면서 한숨 쉬었다.

“설렌 만큼 속상했거든…….”

날 보면서 씁쓸하게 웃는 정이한을 애써 못 본 척하며 고개 돌렸다. 그렇게 뺨에 뽀뽀를 받고 싶었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무리지.

“뽀뽀는, 못 해줘요. 그런 건 서로 좋아해야 하는 거잖아요.”

“뺨에 하는 건데?”

“마찬가지예요.”

“외국에서는 인사로도 하는데?”

“여긴 한국이잖아요.”

내가 철벽을 치자 정이한이 한쪽 뺨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부풀어 오른 정이한의 뺨을 검지로 콕 누르자 푸쉬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꺼졌다.

“일부러 바람 소리 냈죠?”

“응. 나 귀여웠어?”

“형은 항상 귀여워요.”

“……아, 하온이가 또 나 꼬셔.”

“제가 언제요!”

그럼 귀엽게 굴지나 말든가. 괜히 나한테 이상한 이미지를 덮어씌우려는 정이한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순간 갑자기 정이한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밀어붙이는 바람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다리가 침대에 걸리자 뒤로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우앗!”

푹신한 매트리스가 장성한 두 남자의 몸을 받아냈다. 내 위에 올라탄 정이한의 두 눈이 크게 홉 떠져 있었다.

“어, 어? 아,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하, 하온이가, 순간,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안아버렸, 는…데…….”

횡설수설하면서 나를 내려보던 정이한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흔들렸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예뻤다. 그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정이한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정이한의 숨결이 내 뺨의 솜털을 간지럽혔다. 이러다 키스라도 할 것 같……. 그 순간 정신이 돌아온 나는 본능적으로 정이한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헉! 이한 형!”

내게 밀려난 정이한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내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고, 정이한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이한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헉! 미, 미, 미안해, 하온아!”

정이한이 허겁지겁 뛰쳐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거칠게 뛰는 가슴을 꾹 누르면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키스할 뻔했어. 뺨이나 이마에 하는 뽀뽀가 아니라 진짜 이, 입술끼리…….

미쳤어, 진하온. 미쳤어!

그걸 왜 가만히 보고 있었어? 진작 밀어냈어야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끙끙 앓았다. 진짜 큰일이다. 나 줏대 없이 끌려다니는 성격이었나 봐…….

***

뛰쳐나간 정이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정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도 깜깜무소식이었다. 혹시라도 거실에 있나 싶어서 방문 틈으로 밖을 엿봤다. 멤버들 전부 방에 들어가 있는지 거실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숙소를 나간 건…….

멤버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곤란해질 테니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멤버들한테 설명할 수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이 새벽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정이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챙겨 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걱정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거실로 나갔다. 그러자 유찬 형과 강현 형의 방에서 정이한의 벨 소리가 들렸다.

뭐야? 숙소에 있었어?

그럼 다행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나는 런&런 촬영 중에 유난히 수상하게 굴었던 유찬 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정이한한테 자랑하듯 봉팀의 조끼를 내보였었지.

설마 정이한이 형들한테 나 좋아한다고 말한 거야?

불안이 엄습해왔다. 나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 주머니에 넣은 채 형들의 방에 딱 붙어서 귀를 가져다 댔다. 숙덕거리는 말소리가 뭉개져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진하온, 뭐해?”

“흡!”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를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켜낸 뒤 뒤를 돌았다. 이서호가 멀뚱멀뚱 서서 날 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뭔데? 형들 대화 엿들어? 형들 뭐 하는데?”

이서호가 호기심을 드러내면서 눈동자를 빛냈다. 나는 형들의 방문에서 슬쩍 떨어졌다. 머쓱함에 그런 거 아니라고 대꾸하며 다가오는 이서호의 가슴을 꾹꾹 밀어냈다.

“아~ 왜에~ 뭔데~ 나 형들한테 이른다? 유차… 웁! 우읍!”

목소리를 높이려는 이서호의 입을 엉겁결에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서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의심 어린 눈초리로 날 보던 이서호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이서호의 입에서 손을 뗐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 모르는 척해주면 안 돼?”

“나한텐 비밀이야? 나 섭섭해, 진하온.”

이서호는 멤버들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이거 설명하려면 정이한이 나한테 고백한 것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걸…….

“서, 서호 형. 나랑 게임 할까?”

“어? 너 게임 안 한다며?”

“아, 그냥 좀 하고 싶네?”

제발 단순한 이서호가 미끼를 물어주길 바라면서 대놓고 말을 돌렸다. 이서호는 눈매를 좁힌 채 날 노려보다가 돌연 표정을 풀고 방긋 웃었다.

“야, 내가 게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닌데. 속아 넘어가 준다. 이번만 봐주는 줄 알아. 알았어?”

“응응. 알았어. 뭐 할까?”

“유찬 형한테 걸리면 혼나니까 내 방으로 가자.”

“좋아!”

이서호의 마음이 바뀌면 곤란하니까 서둘러 이서호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이서호와 함께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내내 형들이 방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쓰여서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 또 졌어! 진하온, 처음 하는 거 맞아? 왜 이렇게 잘해?”

“……형이 못하는 거야.”

“와, 진짜. 한 판 더 해!”

“…….”

게임을 발로 해도 이서호는 이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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