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85화 (185/320)

185.

본능적으로 멈춰 선 뒤에야 여기에 호랑이가 있을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사파리 버스의 정면 바퀴 밑에서 꼬리 하나가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감독님, 저거 진짜는 아니죠?”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감독님은 묵묵부답이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서 꼬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호랑이를 이런 데 풀어 놓을 리는 없지만, 혹시 알아? 목줄에 묶인 호랑이일지도 모르잖아.

먹이 같은 걸 찾아서 던져준 뒤에 백신을 가져가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전생에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네…….

일단 진짜 호랑이인지부터 확인해 보려고 그쪽으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또 한 번 “크와아아앙!”하는 거친 포효가 울렸다. 흠칫 놀란 나는 또다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울상을 지었다.

“진짜 아니죠……? 네?”

감독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래. 진짜라면 감독님이 저렇게 태연할 리 없지. 게다가 이런 예능에서 장시간 호랑이를 목줄에 묶어 놓으면 동물 학대 논란이 나지 않겠어? 그러니까 저건 진짜 호랑이일 리가 없다.

다소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꼬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나는 최대한 버스 정면을 향해 크게 돌아 꼬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게 뭐예요.”

허망함에 기운이 쪽 빨린 것 같았다.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날 보는 감독님이 숨죽여 웃고 있었다. 또 당했네.

버스 앞에 있는 건 하물며 호랑이 인형도 아니었다. 실감 나게 재현된 호랑이 꼬리가 기계에 부착되어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헛웃음을 흘리면서 백신 상자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제 이걸 네버랜드 출구로 배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분명 백팀이 따라붙을 텐데…….

얼른 백신 상자를 열어, 거기에 든 플라스틱 주사기를 확인했다. 나는 그걸 쏙 빼서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다시 백신 상자를 품에 안았다.

“찾았다!”

그 순간, 나를 발견한 백건 선배님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정이한이 안 보이는 걸 봐서는 아마 백팀의 희생양은 정이한인 것 같았다.

선배님은 폭이 좁은 길을 가로막은 채 나를 경계했다. 나는 백신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으면서 빠져나갈 틈이 생기길 기다렸다.

“백신 넘겨주고 가지.”

“안 돼요.”

“그럼 힘으로 뺏어도 되나?”

“저도 쉽게 질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백건 선배님을 마주 보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도망치는 척을 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백신 상자를 뺏기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 뒤에 선배님께 백신 상자를 열어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선배님 뒤를 쫓아가야만 했다.

서로 마주 본 채 이어지던 대치 상황은 선배님이 먼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끝났다. 선배님은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백신 상자를 노릴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상체를 숙이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곧장 선배님께 어깨를 붙잡혀 뒤에서 끌어당겨졌다. 선배님은 내 허리를 움켜쥐고 내 품에서 백신 상자를 빼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백신 상자를 사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척하다가 자연스럽게 상자를 빼앗겼다.

“앗! 안 돼요!”

“미안! 가져갈게!”

백건 선배님은 백신 상자를 빼앗자마자 입구를 향해 쌩하니 내달렸다. 생각보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달려야만 했다.

사파리 입구에 도달하자 바깥에서 좀비들이 떼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오니 정이한이 좀비들을 몰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혼자서 봉재범 선배님과 유찬 형을 막는 이서호 좀비도 섞여 있었다.

“이한아! 이거 받아!”

백건 선배님이 백신 상자를 정이한에게 집어 던졌다. 정이한은 날아오는 상자를 날렵하게 낚아챈 뒤 네버랜드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됐다. 정이한이라면 도착할 때까지 백신 상자를 열어보지 않을 것 같거든.

정이한을 쫓던 좀비 중 일부가 목표물을 변경해 나와 백건 선배님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백건 선배님이 나를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갑작스런 선배님의 방해 공작 때문에, 나는 좀비에게 잡히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악! 선배님! 이거 놔요!”

“안돼! 못 가! 못 보내!”

선배님이 내게 무게를 실어 매달리자 속도가 느려져 한 걸음 떼기도 힘들었다. 그 사이 좀비들은 착실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건 이서호 좀비가 봉팀의 두 좀비에게 막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하온아!”

강현 형이다! 나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강현 형! 도와줘요!”

“간다!”

강현 형이 흉흉한 기세로 달려오자 백건 선배님이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좀비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질질 끌려가면서 강현 형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뤠에에웨에웨웱!”

흉측한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렸다. 백건 선배님이 먼저 좀비에게 잡혔다. 이어서 내게도 상처투성이의 손이 뻗어졌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나는 잽싸게 바지 주머니에서 백신 주사기를 꺼내 강현 형에게 던졌다.

“형! 그게 진짜 백신이에요! 들고 뛰어요!”

“뭐?”

이번엔 전세 역전이었다. 내가 백건 선배님의 허리에 매달렸고, 선배님은 붙잡고 늘어지는 좀비들을 뿌리치면서 강현 형에게 가려고 했다.

“뛰어요! 얼른!”

“하지만…….”

“빨리요!”

- 백건 아웃. 백건 아웃.

- 진하온 아웃. 진하온 아웃.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아웃되었다. 차라리 잘 됐어. 덕분에 죽어도 고 스킬은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백신을 빼돌렸을 줄이야…….”

좀비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가면서 백건 선배님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선배님과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강현 형을 응원했다.

“당했네, 당했어.”

“헤헤. 죄송해요.”

“이긴 것처럼 굴지 마라? 아직 이한이가 남아있다?”

음. 그렇긴 하지만…….

“강현 형이 이길걸요. 형이 저희 그룹 피지컬 담당이거든요.”

나는 뿌듯하게 웃으면서 봉팀이 이겼다는 안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내 예상대로 봉팀의 승리를 축하하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무렴, 그럴 수밖에. 그 스탯으로 정이한한테 따라 잡힐 리는 없으니.

***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이긴 건 봉팀이었다. 패배한 백팀은 물 폭탄 벌칙을 받았다. 백팀이 이겼을 때 들어주기로 한 소원권은 없던 일이 되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정이한이 침울해했다.

내가 부르면 평소처럼 날 보고 웃기는 했지만, 표정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고 싶었길래 저러지?

아무래도 나한테 뭔가 부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저렇게까지 침울해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정이한은 날 좋아하니까, 나와 관련된 소원을 말하고 싶었을 거다.

이대로 모르는 척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달래줘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예전이었다면 분명히 꼬치꼬치 캐물어보고 도와줬을 테지만 이제는 이런 것 하나도 고민이 된단 말이지.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런데도 정이한이 영 신경 쓰여 옆자리에 있는 정이한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민망한 건 내가 정이한을 볼 때마다 눈이 계속해서 마주쳤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이한 형.”

“으응.”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죠?”

묻고 말았다.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잖아. 게다가 날 보는 눈이 꼭 ‘내 마음 좀 알아줘.’하고 매달리는 것 같아서 더더욱 무시할 수가 없었다.

“……들어줄 거야?”

“뭔지 들어보고요.”

정이한은 벤 내부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서 머리를 기울이자 돌아온 건 황당한 말이었다.

“숙소 가서 말할게.”

“형.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중 첫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둘째는…….”

“미, 미안.”

정이한은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지 조금 전보다 더욱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나는 괜찮은데 멤버들이 들으면 하온이가 곤란할까 봐…….”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일단 내게 곤란할 만한 일이라고 하니,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이한의 얼굴은 한결 편안하게 풀어졌다. 문득, 이 여우 같은 정이한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이러는 건지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정이한은 곧장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문이 닫히는 걸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뭐길래 그래요?”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정이한이 뜸을 들이는 탓에 나도 조금 긴장되었다.

“일단 들어보고요…….”

“어어. 근데 무조건 들어달라는 건 아니고, 나중에 하온이가 그럴 마음이 들면 그때…….”

정이한은 무척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군 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 뺨에 뽀뽀 한 번만 해줄 수 있어?”

“네?”

“뺘, 뺨에 뽀뽀…….”

내가 못 들어서 되물은 게 아니잖아. 나는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정이한에게 물어봤다.

“자, 잠깐만. 형, 혹시. 오늘 런&런 이겼을 때 소원, 이거 빌려고 했어요?”

“어? 으, 으응. 근데 져서…….”

정이한은 ‘역시 졌는데 이런 얘기 하는 건 좀 염치없긴 하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의기소침해했다.

아니, 지금 염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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