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66화 (166/320)

166.

“……혼자 갈 건데요.”

정이한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눈매에 힘을 빡 주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이대로 하윤이가 방송 희생양이 되게 할 순 없어요.”

“하윤이를 돕는 건 찬성이야. 하지만 꼭 둘이 만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나도 따라갈래.”

정이한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하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건 내 개인적인 감정이고, 사적인 문제였기에 멤버들까지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혼자 갈 생각이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하윤이를 돕고 싶은 거예요. 형들한테까지 폐 끼칠 생각 없어요.”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 잊었어?”

정이한이 낯설 정도로 딱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놀라서 굳어 버렸다. 한숨을 푹 내쉰 정이한은 휴대폰을 쥐고 잠시 꼼지락거린 뒤 표정을 풀면서 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화내는 거 아니야. 걱정돼서 그래. 그리고 우리한테 폐를 끼친다니? 왜 그런 소리를 해.”

정이한은 내 얼굴을 살피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하온이 네가 혼자 가면 그게 더 폐야. 너 혼자 보내면 우리가 얼마나 걱정되겠어. 안 그래?”

……그런가. 형들의 과보호 수준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살짝 정이한에게 말리는 듯해 갸우뚱하는 사이, 언제 형들한테 말했는지 이서호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문을 벌컥 열었다.

“진하온! 너 진짜 화욜에 혼자 나간다고? 미쳤어?”

뒤이어 유찬 형과 강현 형까지 줄줄이 우리 방으로 쳐들어왔다. 어딜 또 혼자 움직일 생각을 하냐는 유찬 형의 타박과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매서운 시선을 보내는 강현 형을 보니 아차 싶었다.

혼자 가려던 내가 잘못했네…….

아무래도 정이한이 단톡방에 올린 모양이었다. 이서호가 내게 우리 단톡방을 들이밀면서 마구 흥분해서 소리쳤다.

“혼자 못 보내! 우리도 무조건 따라갈 거야!”

“하윤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

다섯 명이 다 가면 하윤이 혼자서 얼마나 부담스럽겠냐고. 한 명만 데리고 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유찬 형이 잠시 기다려 보라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 주한아. 난데.”

오……!

역시 우리의 브레인 유찬 형! 나의 솔로몬 유찬 형!

“응응. 알았어. 그럼 화요일에 보자.”

유찬 형은 통화를 종료한 뒤 내게 윙크를 보냈다.

“디어 팀은 주한이가 모은대. 이러면 된 거지? 전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윤이가 부담스럽진 않을 거 아냐.”

“넵. 그럼 다 같이 가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꼭 둘이서만 만날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 그룹과 디어 팀 참가자들이 다 같이 만나는 게 그림이 더 좋을 테니 불만 없었다.

***

드디어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마지막 씬을 촬영한 이후 시원섭섭한 마음을 안고, 감독님과 승리한, 그 사이 정이 든 스태프분들과 인사했다. 내 촬영분만 끝난 거지, 드라마 촬영은 계속될 예정이라 감독님은 크랭크업 쫑파티 때 꼭 부를 테니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어차피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있어 봤자… 라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사회생활인지라 연락해 주시면 무조건 오겠다면서 굽실거렸다. 이게 신인의 참된 자세 아니겠어.

드라마 촬영장에서 숙소로 돌아가 멤버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도 하고, 이서호가 선물 받은 게임을 하는 걸 옆에서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씻으러 갔다.

욕조에 몸을 녹이면서 멍하니 있다가 서브 미션 연계 보상 상자가 생각나서 깠는데…….

당연히 체력 회복약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아이템이 튀어나왔다.

<시스템: ‘중급 스킬권’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엉덩이가 쭉 미끄러졌다. 욕조 속에 머리끝까지 풍덩 잠기면서 괜히 물만 먹었다.

“켁, 콜록. 아오.”

나는 시야를 전부 가린 앞머리를 대충 쓸어올렸다. 스킬 등급을 B까지 올릴 수 있는 거네? 이걸 킵해? 아니면 올려?

스킬 창을 열어 둔 채 어떤 선택이 더 이득일지 고민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차피 스탯 한계치는 정해져 있잖아. 스탯 다 올리고 나면, 남는 포인트 사용처는 스킬 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쓸만한 스킬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 죽어도 고는 E로 올렸을 때 쓰레기인 거 확인했고, 최근에는 체력 관리에 도가 터서 쓸 일도 거의 없었다. 더 올렸을 때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음이 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구원은 멤버들 다쳤을 때 소소하게 쓰고 있지만, 딱 소소한 용도로만 사용 가능할 것 같아서 뒤로 미루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외상이 치료되면 이상하잖아…….

어차피 감기, 두통, 소화불량처럼 불편하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경우가 스킬 허용 범위일 것 같았다. 그 외에 다칠 일이 없어야 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의사 쌤한테 맡겨야겠지. 갑자기 상처가 나아버리는 것도 역시 이상하잖아.

구원은 일단 패스. 돌림판은 애초에 데우스가 소매 넣기한 스킬이므로 논외고, 예쁜 척은 승급할 수 없는 스킬이라 남은 건 엿보기 뿐이었다.

엿보기 덕분에 멤버들의 재능을 확인하고, 디아스가 더 탄탄해졌다. 디아스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 엿보기를 올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했으니 행동은 재빨랐다. 나는 곧장 중급 스킬권을 사용해 엿보기 스킬을 B등급으로 올렸다. 그 결과 체력 요구량이 50에서 30으로 줄어들었지만, 그 외 스킬 설명에 변동 사항은 없었다.

설마 체력 줄어든 게 전부는 아니겠지?

도대체 이게 뭐람…….

어쩐지 기운이 쪽 빠져서 마저 씻고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정이한이 내 쪽을 향해 턱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다가 혹시나 해서 정이한에게 엿보기 스킬을 써 봤다.

[정이한]

특화 재능: 랩, 작사

랩: A(?)

작사: A-(?)

버프: 사랑의 아름다움

디버프: 분리불안

헐……?

이게 뭐야? 엿보기 스킬 정보가 완전히 다 바뀌었네? 이렇게 극적으로 바뀌는 거였어? 나는 당혹스러움에 눈만 끔벅거리다가 정이한이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이불 속에 숨어서 제대로 좀 보려고 했는데…….

“하온아, 머리 말리고 자야지.”

정이한이 곧장 나를 끄집어냈다.

아, 맞다. 머리…….

“내가 말려줄까?”

정이한이 드라이기를 꺼내 들면서 물었다. 평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은 생각을 좀 하고 싶어서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네!”

“……어? 진짜?”

자주 거절당했던 정이한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그렇게 의외인가? 괜한 멋쩍음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웅얼거렸다.

“오늘은 좀 귀찮아서…….”

“하온이가 자주 귀찮았으면 좋겠다.”

정이한이 나를 화장대 의자에 앉히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머리 말려주는 게 그렇게 좋은가……. 내 의문을 뒤로 한 채 두피를 간질이는 손길과 드라이기가 뿜어내는 열기가 섞여들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응시하는 척, 다시 시스템 창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재능과 개화 조건이라면서 길게 쓰여 있던 설명이 사라지고, 훨씬 단순하고 가독성 있게 바뀌어 있었다.

일단 정이한의 특화 재능은 랩과 작사.

어쩐지 가사를 잘 쓰더라니. F등급 스킬로는 알 수 없었던 정보가 추가됐다. 물음표로 표시된 건 나와 똑같이 승급까지 필요한 경험치 요구량이 표기되거나 맥스로 성장 가능한 스탯이 아닐까 추정됐다.

하지만 아직 등급이 낮아서 안 보이는 거고.

이건 나중에 스킬 등급이 올라가면 해금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버프와 디버프가 생겼다는 건데, 보기에도 민망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는 버프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뜨거워? 온도 좀 낮출까?”

그러자 정이한이 제 손바닥에 드라이기 열기를 쐬면서 온도를 가늠했다. ……귀신 같은 정이한! 혹시 내 얼굴만 보고 있었던 거야?

“괜찮아요, 그냥 좀 더워서…….”

“적당히 말랐으니 이제 찬 바람으로 해줄게.”

딸깍, 스위치를 전환하는 소리와 함께 두피가 시원해졌다.

다음에는 무조건 거절해야겠다. 습관 들면 곤란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솔솔 들 정도로, 다른 사람이 머리 말려주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샵에서 머리 만져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신기하네…….

결국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해서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다 말라 버렸다. 기초 바르는 것조차 깜박해서 뒤늦게 챱챱 바른 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정이한이 불을 꺼 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시스템 창으로 다시 관심을 돌렸다.

버프 눌러보자!

지금 내 모습을 누가 보면 진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밖에서는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볼록 튀어나와 있는 버프를 손으로 꾹 눌렀다. 하지만 등급이 낮아서 볼 수 없다는 냉랭한 메시지가 돌아왔다.

아, 더러워서 진짜. 엿보기 스킬 더 올린다, 내가!

비록 볼 수 없는 정보들이 있지만, 지금 엿보기를 B등급으로 올린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데우스가 일부러 ‘옛다!’하고 찔러 넣어준 것만 같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이거 잘하면 교주 스킬에 당한 사람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디버프에 뭔가 표시되지 않겠냐, 이거지.

일단은 아직도 교주를 신봉하는 이서호와 유찬 형의 디버프만 비교해봐도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거기에 소파남까지 더해지면 이백퍼지!

지금은 교주가 우리 멤버들에게 스킬을 써도 내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걸 엿보기로 알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파훼법만 알면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해답은 이미 내 스킬창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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