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쓸데없이 똑똑한 교주 새끼 같으니라고. 교주는 야트막하게 웃음을 터트린 뒤 여상한 어투로 지껄였다.
“걱정하지 마. 애초에 솔직하게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우리 입장이 입장인 만큼, 신중할 필요는 있잖아?”
교주는 유들거리는 태도로 “나는 오히려 마음에 들어.”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쪽한테 잘 보일 생각은 없어.”
내 패가 들여다보인 듯한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 나갔다. 교주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정보야. 이왕이면 사실이면 좋겠고.”
그러더니 불쌍해 보이는 척, 어깨를 늘어트리고는 삐죽거렸다.
“아~ 아쉬운 소리는 나도 하기 싫은데, 너 말곤 없잖아. 회귀자.”
나는 잠시 뜸을 들인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뭘 해주겠다는 건데?”
“내 능력.”
만약 교주가 소파남을 떨구어 준다면 확실히 편해지긴 하겠지. 하지만 반대로 더 불리한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쉽사리 교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쪽의 뭘 믿고.”
“푸흐흐, 조심스럽긴. 좋아. 아쉬운 건 내 쪽이니 내가 먼저 널 돕겠다는 걸 증명할게. 뭘 어떻게 해줄까?”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교주의 스킬에 조종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하는 게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정보가 되는 셈이니.
“김호채, 그 사람이 내게 관심 끊도록 해줘.”
“관심받아서 곤란한 거면…….”
교주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스태프 몇 명이 종종거리며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교주는 스태프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운을 뗐다.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내 스킬은 그 사람의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말로 유인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소리는 씨알도 안 먹히지. 꽤 까다로운 스킬이라고?”
뭐야? 원하는 거 해주지도 못하면서 뭘 도와주겠다고 한 건데? 나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움 하나도 안 되네. 됐어.”
교주를 비켜 지나치려고 했는데, 교주가 내 앞을 막아섰다.
“급하기도 하지. 누가 손도 못 쓴대?”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조금 흥미가 생겨 고개를 까딱거렸다. 말해 보라는 내 거만한 태도에 교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 계획 있지 않아?”
내가 침묵하자 교주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왜 저렇게 헤프게 웃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그 계획,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요는 판단력을 잃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네 뜻대로 조종하기 편해지겠지.”
교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조용히 교주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으로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교주의 스킬은 신뢰도가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이전에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의 능력이 좀 더 전능한 세뇌 계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것도 나를 속이는 걸까. 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듯 교주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야. 교주라는 사람 자체가 탐탁지 않아서 그런지, 내 얼굴에서 불신이 읽힌 모양이었다.
“아~ 내 정보 진짜 많이 풀었다. 이 정도면 좀 믿어 줄 법 하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서, 나한테는 그쪽이 원하는 정보가 없어.”
교주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알고 싶어 하는 게 내 스탯이나, 별 도움 안 되는 스킬일 것 같지는 않았다.
“가치는 내가 판단해. 그보다 김호채와는 신뢰도가 거의 없어서 작업을 해야겠는데. 급한 건 아니지?”
밑져야 본전이므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내게 전화해서 장소를 바꿀 수 있도록 해 봐. 그러면 나에 대한 진짜 정보를 줄게.”
“다음 주 화요일? 이틀밖에 없잖아?”
“못하면 말고.”
딱히 도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교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웃던 모습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교주의 입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승부욕 생기게 하네? 원하는 장소는?”
흐음. 아까도 이러더니. 무시당하는 걸 못 참는 타입인가? 교주의 스킬 뿐 아니라 성격도 조금은 파악한 것 같았다.
“사람이 많고 건전한 곳이면 어디든.”
정말 도와주려고 판을 짜주면 좋은 거고, 날 속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만나기로 한 장소도 외진 곳은 아니었기에 손해 볼 게 없었다.
제일 최악인 건, 막바지에 교주가 ‘사실은 디아스의 진하온이 판 함정이었습니다!’라고 터트리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진짜 쓰러질 거고, 진단서도 떼어 둘 거니까. 그뿐 아니라 내게는 소파남이 직접 남긴 음성 녹음 파일이 있었다.
이걸 공개하면 빠져나갈 구멍은 충분했다. 남자가 남자한테 희롱당했다는 증거는 내게 마이너스가 된다는 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래도 수작질 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낫다. 게다가 이번 대화로 교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혔다. 만약 정말 나를 도와준다면, 우리의 성공이 곧 본인의 이득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봐도 되겠지.
“오케이. 기다리고 있어. 외로우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교주는 내게 제 휴대폰을 흔들어 보인 뒤 멀어졌다. 누가 전화할까 봐? 나는 교주의 등을 향해 콧방귀를 뀐 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호경 심사위원님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이미 시간이 꽤 흘러서 추적하는 데 의미가 있나 싶긴 한데…….
그런데 때마침 커피를 들고 있는 이호경 심사위원이 복도를 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캐리어에 커피 두 잔이 담겨 있는 걸 보니, 카페에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교주한테 발목 잡힌 덕에 마주칠 수 있었던 기묘한 상황이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호경 프로듀서님, 안녕하세요.”
혹시라도 날 그냥 지나칠까 봐 내가 먼저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드렸다. 이호경 심사위원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는데 내가 벽 쪽에 붙어 있는 동안 나를 그냥 지나쳐 갔다.
……실패인가 봐.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으셨나 보네. 조금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데, 이호경 심사위원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나를 똑바로 보고 물으셨다.
“저기, 디아스죠?”
“네? 아, 네! 디아스의 진하온입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대꾸하자 나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이상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네? 저 뭐 잘못 했…나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아까 겁먹은 것처럼 보여서…….”
이호경 심사위원님은 나를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면서 “지금은 아닌 것 같네.”하고 말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저 사람에게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헉. 아, 아니에요. 저, 그런 적 없어요.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무슨 일 있었습니다!’하고 주장하는 꼴이니 미끼를 물어주지 않으려나.
잔뜩 겁먹은 것처럼 몸을 움츠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자,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좋아, 물었다!
“진정해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네? 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럼 누구 때문이지. 혹시 라일라?”
“아니에요. 저 라일라 선배님 정말 동경하는걸요!”
소거법으로 딱 한 명 남았다. 질문한 순서를 보니 어느 정도 눈치채신 모양이네. 티 나게 굴기 잘한 것 같다!
이호경 심사위원님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김호채 씨?”하고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가 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뇨? 아니에요. 저, 정말 무서워한 적 없어요…….”
말끝을 늘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앞에 가지런히 모아 맞잡은 두 손을 눈에 띄게 떨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보고 있겠지?
이럴 땐 참, 내 외모 덕을 크게 보는 것 같긴 해. 겉으로 보면 심약해 보이니 무서워하면 그 점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걸 알게 될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뭐 그건 그거고. 지금은 도움 되니까.
“음.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할까요?”
그 순간 나는 열심히 눈물을 쥐어 짜내기 위해 노력했다. 눈이 시큰해지며 저절로 눈물이 고일 때까지 뜨고 있다가, 크게 눈을 깜박거린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멤버들은 모르고?”
이건 거의 확신한 말투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제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모든 걸 그에 짜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호경 심사위원의 머릿속에 훌륭한 시나리오가 무럭무럭 자랐다는 것에 내 매력 스탯을 걸 수 있었다. 나는 애써 웃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요, 뭐. 이런 데서 할 말은 아니겠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러면서 내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명함을 받아든 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호경 심사위원은 나를 동정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 뒤 혀를 차고는 먼저 가 버렸다.
이거 잘하면 우리가 올리지 않아도 알아서 찌라시가 퍼질지도 모르겠다. 조금 지켜봐야겠네.
초대석으로 돌아가면서 살펴보니 교주가 소파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파남이 교주를 따라 일어나 둘이 함께 사라졌다. 뭔가 하고 있긴 하네…….
그게 방해일지, 도움일지는 모르겠지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