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O.D.I 평가 무대 방청을 위해 우리는 아침 일찍 샵에 들러서 단장을 한 채 밴에 태워졌다. 그 바람에 대기실에 도착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이밀어서 인터뷰를 끝낸 뒤부터 시간이 붕 뜨고 말았다.
일부러 일찍 온 건 무대에 서기 전에 참가자들을 한 번 더 만나고,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작진이 방청 사실은 무대가 끝난 뒤에 밝혀달라고 해서 어디에도 못 가고 대기실에만 콕 박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닌데 다들 긴장해서는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서 자꾸만 이리저리 펄떡펄떡 뛰어대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면서 심호흡했다.
데뷔 쇼케이스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평소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기다림 끝에 우리는 배정된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선배에게 인사하는 건 후배로서 당연한 도리였으므로 곧장 심사위원석을 향했다.
이서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눈짓했다. 작전대로 잘해야 한다는 신호에 조금 긴장한 이서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파남이 나를 발견하곤 지그시 쳐다봐오는 듯했지만, 다른 심사위원분들도 함께 있어서인지 평범하게 우리 인사를 받아줬을 뿐이었다.
여기서 소파남이 내 이름을 불러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대놓고 소파남을 힐끔거리면서 눈치를 살피는 척하다가 어쩔 수 없이 다음 작전으로 미루고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하온아.”
몸을 돌리자마자 들려오는 소파남의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곤 아주 까암짝 놀란 사람처럼 몸을 떨면서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나를 강현 형이 재빠르게 잡아주고는 괜찮은지 물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네, 네?”
잔뜩 겁먹은 듯 보이도록 움츠린 채로 강현 형의 팔을 꽉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나를 이호경 심사위원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상하게 쳐다봤다. 좋아, 좋아. 잘 되고 있어.
“왜 그렇게 놀라? 별 건 아니고, 하윤이 잘했는지 궁금해서 불렀지.”
하윤이한테 관심 꺼라. 이 변태 자식아!
방송에서는 엄격한 심사위원으로 그려지지만, 사석에서는 되게 잘해주신다면서 좋은 분이라던 하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른 채 제대로 눈도 마주치기 힘들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면서 대답했다.
“……아, 네. 잘했어요. 연습한 대로만 하면… 좋은 무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가 봐.”
“……네.”
소파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이서호가 속삭이는 것처럼 바람을 많이 섞은 목소리로 날 채근했다.
“야, 너 왜 그래? 요즘 좀 이상하다?”
심사위원석까지 적당히 들렸겠다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역시 이 역할 이서호에게 시키길 잘한 것 같아.
“……내가 뭘. 평소랑 똑같은데.”
뿌듯한 마음을 숨긴 채 나는 내 역할에 충실했다.
“아닌데? 너 지금 되게 긴장한 것 같아. 얼마 전에도 우리 몰래 속닥속닥 통화했잖아. 진하온 너… 수상해. 자꾸 비밀 만들지 마라? 엉?”
“……그런 거 없어.”
라고 대꾸하면서 힐끔 뒤를 돌았다. 소파남은 여유롭게 앉아서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옆얼굴에 언뜻 비쳐 보이는 입꼬리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저건 무슨 의미이려나.
짜증이었으면 좋겠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서호는 물병을 까서 목을 축였다. 답지 않게 조금 긴장했다면서 자기 잘했냐고 묻는 이서호에게 엄지를 척 들어줬다.
“그런데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이번에는 진짜로 목소리를 확 낮춘 채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이호경 심사위원님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셨어.”
“그럼 된 건가…….”
이서호는 잘 모르겠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응. 된 거야.”
이호경 심사위원은 가십과 소문을 좋아하다 못 해 모으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편견 없이 모든 소문을 받아들인다는 이상한 인터뷰도 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이호경 심사위원 곁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성향이었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하면서 말을 흘려주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주변인들까지 합세해 아주 착착 살을 붙여서 퍼트려줄 터였다.
원래 ‘너만 알고 있어야 해.’의 ‘너’는 점점 늘어나는 법이니까. 이쪽 여론이 커져서 ‘익명’에게 힘을 실어 주거나 ‘이호경 발’ 소문이 시작되는 게 베스트였다.
하지만 지금, 이호경 심사위원은 그저 야트막한 호기심을 내비칠 뿐이었다. 뭔가가 있다고 확신하고 움직이게 하려면 또렷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를 주시하면서 혼자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호경 심사위원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돌린 것만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내게 시선이 닿아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관심 끌어오는 덴 성공한 것 같네.
이호경 심사위원은 날 지그시 응시하더니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두 심사위원에게 뭔가를 묻는 듯 짧게 대화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심사위원석에서 내려와 문 쪽을 향하는 이호경 심사위원을 지켜보다가 따라갈 심산으로 벌떡 일어났다.
“하온아 어디 가려고?”
“혼자 움직이셔서요. 다녀올게요.”
“……같이 가자.”
정이한이 불안해하면서 소파남을 힐끔거렸다.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올게요.”
나는 마음 약해질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호경 심사위원이 나간 문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서 소파남 쪽을 바라봤는데, 라일라 심사위원과 뭔가 의논하느라 바빠 보였다. 타이밍 좋고.
이제 남은 건, 이호경 심사위원과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연출해내는 건데. 호기심이 많은 분이니 먼저 물어봐 주시지 않을까. 사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곤란하긴 했다. 내가 먼저 미주알고주알 떠들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사라지신 건지 보이질 않았다. 혼자서 움직인다면 화장실에 갔거나, 혹은 자판기, 그게 아니라면 1층 카페에 가신 게 아닐까 싶은데.
심사위원은 개인 대기실이 있으려나? 그러면 찾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방송 시작 전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어야…….
“진하온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필 이 인간을 여기서 마주치네.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함께 교주가 내게 인사를 해왔다. 교주와 함께 있는 라스트원 멤버들도 나를 선배 대접하면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얘들아, 너희 먼저 가 있을래? 잠깐 선배님이랑 얘기할 게 있어서.”
라스트원 멤버들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빨리 오라는 말과 함께 총총 사라졌다. 이것도 스킬 중 하나인가. 라스트원 멤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저는 할 말 없는데요.”
“요즘 좀 힘든 일이 있다면서요?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지? 뭔가를 아는 것 같은데? 유찬 형이나 이서호가 상담이라도 했나? 하지만 이 건은 외부에 절대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힘든 일…이라면, 요즘 안무 연습이 힘들긴 해요. 저희 한창 컴백 준비 중이라서요.”
교주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니 일단 말을 돌렸다. 그러자 교주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그건 그렇죠, 하고 자신도 힘들어 죽겠다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거 말고, 있지 않아요?”
“글쎄요. 지금 떠오르는 건 없는데.”
교주가 내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것조차 꺼려져서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김호채.”
교주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는 기분 나쁜 눈웃음과 함께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선배님이 왜요?”
확실히 알고 있네. 뭘 어떤 경로로,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뻔뻔하게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다. 이 건으로 나와 밀당할 생각이 없는지 교주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디아스가 하늘 같은 대선배 김호채에게 대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해. 우리 곡 고른 참가자가 우연히 들었나 봐. 강현이가 소리치면서 화내는걸.”
……이건 좋은 쪽이 아닌데. 이걸 믿어야 하나? 찝찝함에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교주는 생글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강현이가 이유 없이 큰 소리 낼 사람이 아닌 건 내가 잘 알지. 손은 써 뒀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신뢰도가 높더라고. 교주는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쳐. 왜 우리 멤버를 도와준 건데?”
“말했잖아. 너희가 커야 나한테도 도움이 된다고. 그런데 장애물이 좀 생긴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정도는 내가 치워줄 수 있는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법을 모르나, 싶어서.”
“그쪽이나 좀 치워주던가.”
“아하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 응? 우리는 운명공동체잖아.”
교주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헛소리를 진지하게 했다. 교주의 헛소리에 대응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목격자…….
교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으니 그 목격자가 어떻게 나올지 주시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일단 목격자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놓고, 그러니까 ‘백강현이 김호채에게 대들더라.’라는 루머가 도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해보면…….
두 종류의 소문이 동시에 돈다면야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막내 괴롭히는 선배에게 대든 그룹 형은 비난은 조금 받을지언정, 결국 당위성을 인정받을 테니까.
문제는 그 뒤였다. 내가 괴롭힘당했다는 걸 부정했을 때 ‘그럼 백강현은 왜 그런 건데?’라는 이슈가 재점화될지도 모른다.
이거 어쩐다. 믿을 수도, 그렇다고 거짓말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무언가 하나를 내어주는 대신 교주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나는 내 앞에서 미소 띤 얼굴로 날 보는 교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디아스가 크는 게 그쪽한테 도움이 된다고 했지?”
교주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보여서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 이유가 뭔지 말해줄 순 있고?”
이유를 알아야 우위를 내 쪽으로 돌릴 수 있을 듯해 물었지만, 사실 솔직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소파남은 내 쪽으로 좀 더 바짝 붙어 거리를 좁혔다. 주변에 목소리가 들릴 걸 의식한 행동인 것 같았다.
“내 회귀 목표를 채우기 위해서지. 혼자선 절대 안 된다는 거……. 그게 두 번의 실패가 나한테 준 교훈이거든, 하온아.”
교주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었나. 그래서 꽤 절박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목표’라는 걸 채우려면 도움이 필요하고, 같은 ‘회귀자’인 내게 도움을 받고 싶다는 건가?
“목표가 뭔데?”
“그건 나중에. 우리에게 신뢰라는 것이 생기면 말해줄게.”
……평생 가도 안 생길 것 같은데? 그렇게 대꾸하려던 찰나였다.
“아직은 이른 것 같아서. 너,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그치? 네 능력이 ‘세뇌’가 아니라는 거…… 방금 너랑 대화하면서 알아채 버렸거든. 정신 지배 능력자라면 겨우 이 정도 일로 쩔쩔맬 리 없을 테니까.”
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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