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두 대의 커피 차가 나란히 있었는데 한 대는 우리 디어리가 보내준 게 분명했고, 나머지 한 대는…….
“하온아!”
“와! 진하온!”
“하온아~”
커피 차 안에서 상체를 쭉 뺀 채 나란히 나를 부르는 멤버들과 날 보고 조용히 미소 짓는 강현 형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멤버들을 보고 반가워하기도 전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아하하! 다들 그게 뭐예요?”
나는 거의 달리듯 빠르게 걸어가면서 물었다. 이서호가 날 마중 나오면서 제 앞치마 양쪽 어깨끈에 엄지를 걸쳐 당겼다 내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떠냐? 잘 어울리지?”
“완전 웃겨!”
“야! 너는 우리가 서프라이즈 응원을 왔는데 형아들 멋있다고 해주면 안 되냐?”
입술을 삐죽 내민 이서호가 연신 투덜거렸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 다들 잘 다녀오라고 대충 손만 흔들었던 거구나. 다들 곡 연습하러 가야 해서 못 온다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멋있어, 멋있어! 와,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지금.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예요?”
“디아스 막내의 기념비적인 첫 드라마 촬영인데, 당연히 우리가 응원하러 와야지!”
유찬 형도 커피 차에서 나와 내 얼굴이 프린트된 앞치마를 자랑했다. 민망하게도 내 얼굴 위, 아래로 ‘예쁜 우리 막내’,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우리 삐약이들~ 나는 안 보이냐?”
도라이 선배님이 큰 목소리로 말하자, 뒤늦게 선배님을 본 멤버들이 다들 깜짝 놀라 하며 반가워했다.
“아무리 막내가 예뻐도 그렇지~ 어떻게~ 형을 보고~ 어? 서운하다, 얘들아…….”
도라이 선배님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군 채 시무룩해진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당황한 유찬 형과 이서호가 그게 아니라 진짜 못 봤다면서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다. 그 탓에 둘은…….
“아~ 막내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고~ 이제 나는 뒷방 마님이고~”
커피를 받아 가던 스태프분들까지 보고 빵 터질 만큼, 제대로 놀림 받고 말았다. 두 사람이 당황하면서 이리저리 변명하자, 도라이 선배님은 크게 웃으면서 윙크를 날리셨다.
“아아 한 잔 시원하게 내려주면 용서해줄지도?”
“제가 타 드릴게요, 형!”
“좋지~ 유찬이 솜씨 한 번 볼까?”
“오늘을 위해 연습했어요.”
유찬 형이 넙죽넙죽 맞받아치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심란했는데, 멤버들을 만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 속 먹구름이 걷혀 있었다. 든든한 아군이 내 등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오우! 하온이 그룹에서 귀염받는구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재빠르게 돌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독님 곁에는 승리한이 함께 있었다.
“아, 감독님. 오셨어요! 저희 형들이에요!”
감독님께 웃으면서 얘기하자, 멤버들이 합창하듯 감독님께 인사했다. 감독님은 기합 잔뜩 들어간 아이돌 식 인사법에 웃음을 터트리시더니, 연신 싱글벙글한 낯으로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커피 한 잔만 줘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좋죠~ 리한이 너는?”
“저는…….”
승리한은 커피 차를 한 번 보고, 나를 힐끔 봤다. 나는 얼른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한 채 승리한에게 말했다.
“선배님은 아이스 카페 모카, 맞으시죠? 생크림 올려서!”
“……맞아요.”
“이한아, 내가 아아 내릴 테니까 카페 모카 만들어 줄래?”
유찬 형이 재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감독님! 저희 간식도 있어요!”
이서호가 케이크와 쿠키류가 있다면서 앙증맞게 개별 포장된 쿠키를 한 주먹 쥐어 들고선 넉살 좋게 다가와 드실래요? 하고 내밀었다. 그러자 감독님이 좋죠, 하고 웃으시며 쿠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으셨다.
“오, 이거 맛있네? 너도 하나 먹어봐.”
승리한은 의외로 단 걸 즐기는 편이니 좋아하지 않으려나. 아니나 다를까, 마다하지 않고 이서호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맞춰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자, 너도 먹어.”
강현 형이 내게 내민 건, 핫초코였다. 이건 또 언제 탔대. 나는 앞치마 차림의 강현 형을 보자마자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앞치마, 다들 안 어울리긴 하지만… 강현 형이 제일 안 어울려!
“기분 좋아 보이네.”
내가 핫초코를 받아들자, 형은 왜 웃는지도 모르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진하온, 너 그거 먹고 디어리들이 보내준 커피 차 음료도 마셔야 한다. 알지?”
“응, 응.”
“사진도 많이 찍어서 정곤 형한테 보내! 인증샷 올릴 곳 많으니까!”
“당연하지. 나도 알아. 아, 그전에 형들 앞치마 입은 채로 단체샷도 찍자. 나 소장할래!”
이서호는 당연히 찍을 생각이었다고 말한 뒤 스태프분들을 상대로 호객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오셔서 음료와 간식 먹으며 쉬시라고 당당하게 외쳐대는데, 미안하지만, 우리 휴식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
대부분 쿠키만 조금 달라고 할 뿐, 케이크는 영 나가질 않았다. 그때 감독님이 뭔가 결심하신 듯 큰 목소리로 30분 휴식을 선언하셨다. 그제야 스태프분들의 얼굴이 환하게 피더니 케이크 주문이 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디어리가 보내준 커피 차에도 컵떡볶이부터 시작해 간식이 많아서, 양쪽 모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 촬영장에 스태프가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승리한 선배님.”
그때, 도라이 선배님이 승리한을 불렀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자는 선배님의 말에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이제 휴식 시간 5분 남았네.”
정이한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얼른 회사 복귀해서 곡 마무리해야 하잖아. 오늘은 이렇게 얼굴 본 거로 만족하고, 다음에는 촬영하는 거 구경하러 오자.”
아쉬워하던 유찬 형이 한숨을 폭 내쉬더니 다음엔 정말, 꼭 종일 머물 거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남을 거야!”
이서호가 광대를 한껏 끌어 올려 웃으며 우월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도와야지!”
“아~ 나는 작곡 잘 모르잖아. 진하온 저 약골, 혼자 뒀다가 팔랑팔랑 쓰러지면 어떡해? 한 명쯤은 감시해야지.”
“……나를 뭐로 보고.”
“종이 인형?”
“아, 이서호!”
“뭐어, 이서호오? 형 어디 갔냐!”
나는 혀를 빼꼼 내밀었다가 잽싸게 수납했다. 그러자 약이 오른 이서호가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콕콕 찔러왔다.
“오랜만에 형한테 혼나고 싶어서 그르지? 어엉?”
“야, 으하하! 아, 간지럽……! 형, 형! 아, 형!”
손가락을 말아 간지럼 태워오는 탓에 몸을 비틀면서 뒷걸음질 치는데도, 이서호는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곧 강현 형에게 어깨를 붙잡히면서 이서호의 진격이 멈췄다.
“뜨거운 거 들고 있잖아.”
아, 맞네. 그래도 반쯤 마신 덕분에 컵 속에서 출렁대기만 했을 뿐 넘치진 않았다. 강현 형이 타준 건 다 마시고, 우리 디어리가 보내준 커피 차에서 새로 받은 핫초코였다. 잠깐 사이 음료가 조금 식은 탓에 넘친들 데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엇! 그거 뜨거운 거야?”
“응.”
누가 봐도 ‘핫’용 컵 아닌가?
“아니, 날이 이렇게 더운데 뜨거운 걸 먹어?”
“뭔 소리야. 핫초코는 사계절용이야.”
나도 모르게 정색하고 대꾸했다. 핫초코에 대한 나의 인생관은 양보 못 한다. 이서호는 내 말엔 관심도 없는지, 그저 뜨거운 걸 마시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면서 미안해했다.
“서호 넌 주변을 더 살필 필요가 있어.”
강현 형이 타박하듯 말하자 이서호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나도 아는데 잘 안되네. 엄마한테도 맨날 산만하다고 혼나.”
그렇게 말하면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유일하게 끈질기게 몰두하는 건, 춤이랑 노래밖에 없다며 배시시 웃었다.
“형, 요즘 연기 수업도 열심히 받잖아.”
“아? 맞다! 그러네. 생각해보니까 나 연기할 때도 집중 잘하는 것 같아. 이번 뮤비 찍을 때 기대해!”
이서호가 갈고닦은 연기력을 십분 발휘하겠다면서 눈동자를 빛냈다. 하여간 귀여운 녀석. 기특해서 마주 웃어주려던 그때, 갑자기 이서호가 동공을 흔들면서 먼 곳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내 뒤를 향하고 있어서 무의식중에 뒤를 돌았다.
그러자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승리한이 보였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생긴 듯 굳은 얼굴을 보자 갑자기 긴장감이 돌았다. 갑자기 왜 저러지?
“진하온 씨.”
“넵!”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아.”
지금? 형들 곧 가는데 배웅도 못 하고?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형들을 살피자, 유찬 형이 얼른 가보라면서 손짓했다. 정이한은 이따 숙소에서 보자고 인사했고, 강현 형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는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을게. 갔다 와.”
이서호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줘서 솔직히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승리한을 따라 걸었다.
승리한은 세트장 뒤쪽으로 나를 이끌었는데, 가는 길에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는 도라이 선배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배님은 입 모양으로 ‘화이팅!’하고 나를 응원해주셨다.
그러고 보니 아까 두 분이 같이 자리를 비우셨었는데, 뭔가 내 이야기를 하신 걸까? 승리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오지 않아서 심장만 거세게 쿵쾅거렸다.
세트장 뒤쪽에는 굵은 전선만 있을 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외부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선 뒤 나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모르겠어요?”
“……네?”
뭘? 아… 아무래도 도라이 선배님께서 내가 헤매고 있다고 언질 준 모양이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대답을 들은 승리한은 한참 동안 가만히 날 응시했는데, 형형한 눈빛이 마치 내 머릿속을 읽으려 드는 것 같아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제가.”
마침내 운을 떼는 승리한의 입술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무 기대했나 봐요. NG 낸 이유는 냄비 손잡이 때문이었습니다.”
승리한의 말을 듣는 순간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대놓고 내게 실망했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뭐야, 냄비 손잡이가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건 일이잖아. 내가 하겠다고 한 일이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가르침을 청해야 할 때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잘 모르겠어요.”
승리한은 냄비 손잡이 방향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나는 두 손으로 냄비를 잡아 날랐고, 그대로 식탁 위에…….
“아……!”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정현은 냄비를 내려놓은 다음, 돌릴 겁니다. 손잡이가 자신을 향하도록.”
“그러네요. 그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날 내려보던 승리한은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쪽이 절 싫어하게 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사소한 실수에서 시청자는 위화감을 느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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