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병원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열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굳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매니저 형과 형들이 성화를 부렸다.
결국 병원에 들러 진단받고, 주사까지 맞은 다음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무인도에서 제대로 못 씻어서 씻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게다가 메인 미션도 확인해야 하고. 마지막 날에 메인 미션 완료하면서 예쁜 척 스킬을 획득한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 뒤로 혼자 있는 시간이 없었던 탓에 제대로 보질 못했다.
겸사겸사 욕조에 물 받아서 몸을 푹 담글 요량으로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나왔다.
“저 욕조 들어갈 건데, 물 받는 동안 먼저 씻을래요?”
이서호는 방으로 쏙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않길래 정이한에게 물었더니 냉큼 먼저 씻겠대서 들여보냈다. 거실에서 유찬 형과 시간을 보내다가 정이한이 나오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따듯한 욕조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서서히 차오르는 물이 살결을 간질였다.
“아으, 좋다…….”
욕조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여기가 천국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궁금했던 메인 미션 결과부터 확인했다.
메인 미션 완료로 500포인트를 얻어서, 현재 보유한 포인트는 958이 됐다. 그리고 얻은 새로운 스킬. 예쁜 척…….
예쁜 척(패시브): 카메라를 마주 보며 독보적인 매력을 뽐낸 당신께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당신은 본능적으로 당신을 찍으려는 카메라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인지한 카메라에 찍히는 경우, 결과물을 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닌 매력 스탯이 100% 전달됩니다.
스킬 이름만 보고 유추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쓸모 있는 게 튀어나왔다. 별다른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패시브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스크린과 사진에 내 매력 스탯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당연히 좋겠지. 우리 팬덤이 커질 수 있다는 소리니까. 교주에게 대응하고, 소파 남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디어스가 더 커져야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매력’ 스탯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파남이었으니까.
나는 가슴께까지 차올라 찰랑거리는 물을 손으로 휘저으면서 각오를 다졌다. 몸조심하자.
그리고 새로운 메인 미션은…….
<메인 미션>
─ 더 많은 대중에게 디아스 인지 시키기 (0/100%)
O 성공 시 3,000 포인트 획득
O 실패 시 랜덤 스탯 1종 초기화
O 남은 기간: 12월 31일까지
12월 31일까지…….
이번에도 목표 수치가 추상적이라 얼마나 해야 미션 성공으로 인정받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남은 기간이 꽤 넉넉한 편이고, 우리 팬덤도 커지고 있으니까 조금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수치 차는 것 좀 보고 판단하지 뭐.
***
우리끼리 만든 곡이 마무리될 때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다. 지난번 대본 리딩 현장에서는 괜찮은 평가를 받아서 조금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또, 또 승리한의 ‘컷’ 선언이었다. 벌써 다섯 번째다. 그저 찌개를 나르면서 ‘형, 배고팠지?’하고 물어보는 게 다인 장면인데 왜 자꾸 중단시키는 거지? 그것도 꼭 내가 냄비를 식탁에 올리기만 하면 저런다.
“승리한이~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감독님도 이유를 통 모르시겠다는 듯 뒷머리만 벅벅 긁으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리한은 의자를 밀고 일어나더니 급기야는 내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그것밖에 안 돼요?’하고 말했다. 도대체 뭐가! 나 잘했잖아!
내 연기 스탯 A-가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중이건만 뭐가 문제냐고? 아, 이건 진짜 모르겠다. 그냥 찌개가 든 냄비를 들고 날라 식탁 위에 올린다. 형 배고프지? 하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듯 웃는다. 그게 전부잖아.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꾹 내리눌렀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NG를 내는지 모를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나는 잠깐 쉬어가자는 감독님의 말에 곧장 휴대폰을 찾았다. 내 이름이 써진 휴대폰을 찾아서 디아스 단톡방을 보려고 했을 때였다.
“뉴삐야~”
나를 뉴삐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우리 뉴삐이, 잘 있었어?”
도라이 선배님이 환한 미소와 함께 당장이라도 포옹해 줄 것처럼 두 팔을 쫙 벌린 채로 내게 다가오셨다. 나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하고 선배님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사이에 인사가 너무 딱딱하다, 나 서운하려고 해?”
“그래도 선배님이신데요…….”
“형이라고 해~”
“하지만…….”
“어허, 선배님의 명령이다!”
도라이 선배님은 팔짱을 낀 채 짐짓 근엄한 어투로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계속 거절하면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웃으면서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형!”
“옳지, 옳지!”
도라이 선배님이 내 턱 밑을 간질이면서 만족스럽게 웃으셨다. 애완동물이 된 기분인데…….
“선배님 촬영 있으세요?”
“응. 형, 은 한 시간쯤 뒤에.”
선배님은 ‘형’을 강조하며 호칭을 은근슬쩍 다시 정정해주셨다. 아차 싶어진 내가 어색하게 웃자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과 함께 빈 자리에 앉으시길래 선배님을 따라 나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뉴삐 촬영 중이라길래 구경하러 왔지요. 지난번에 서호 까메오 촬영할 땐 못 왔잖아. 너도 그때 같이 왔었다면서?”
도라이 선배님은 그때 본인이 와서 힘을 실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하셨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촬영이 잡히는 바람에 못 오셨다고.
“에이, 아니에요. 서호 형 잘하고 갔어요.”
“아빠가 있냐 없냐의 차이는 커.”
선배님은 주변을 싹 훑더니 손날을 세워 뺨에 대고는 내 귀에 속삭였다.
“승리한이 뭐라 하지 않았어?”
“아, 조금요. 그런데 나중에 사과하셨어요.”
“오? 그래? 서호가 꽤 잘했나 보네.”
도라이 선배님은 삐약이가 많이 컸다면서 기특해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선배님의 눈동자가 무척 따스해, 그 눈빛만으로도 이서호를 꽤 예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사람 연기에 목숨 거는 타입이라 기준이 좀 엄격해. 대신 제 기준을 통과하면 사람이 달라지더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상냥해지거든. 그전에는 쌀쌀맞을 거야.”
“아하.”
팁 아닌 팁을 전수해 준 선배님이 승리한은 좀 더 대충 살 필요가 있다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뭐, 내가 피곤한가. 본인이 피곤하지.”하고 말하면서 화제를 돌리셨다.
하지만 나는 승리한이 오늘 촬영 내내 나한테 빡빡하게 구는 게, 꼭 저 ‘기준’이란 걸 통과하지 못해서인 것 같아서 못내 찜찜했다. 오디션 볼 때만 해도 괜찮게 봐준 것 같았는데 왜 이럴까…….
배역 특성상 승리한과 함께 촬영해야 하는 씬이 많은데 벌써 이러면 내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곤란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지금까지의 현장 분위기와 촬영 장면을 곱씹으면서 머리를 굴렸는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뉴삐 고민 있어? 왜 한숨 쉬어?”
심란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발뺌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도라이 선배님은 승리한에게 인정받으셨잖아. 그럼 뭔가 답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저 선배님, 사실은…….”
“선배 아니고 형.”
“아, 네네! 형, 사실은 조금 전 촬영 할 때요.”
도라이 선배님께 상황을 설명하자, 선배님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하시는 듯 눈동자를 굴리셨다.
“흠.”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듯한 얼굴에, 뭔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도 잘 모르겠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고갤 숙이자, 도라이 선배님은 가벼운 웃음을 장착하고 내 허벅지를 토닥이면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는 알아. 그 사람이 이유 없이 NG 낼 때는 자기가 분석한 캐릭터 해석이랑 연기자의 연기가 맞지 않을 때거든. 승리한은 본인뿐 아니라 상대 연기자의 캐릭터 해석까지 죽어라고 파니까.”
“아…….”
“그래서 이 문제만큼은, 내가 답을 찾아줄 수가 없네. 나는 네 배역까진 연구하지 않았거든.”
선배님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이 간단한 대사 어디에 캐릭터를 녹여 낼 수 있다는 거야? 정말 평범한 장면이잖아.
오히려 혼란함만 가중되어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잘 생각해봐. 음…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네 배역을 맡기로 했던 연기자가 있었어. 작은 소속사의 신인 배우였는데, 그 친구도 꽤 잘한다고 들었거든.”
도라이 선배님은 승리한과 나란히 섰을 때 비주얼이 좀 밀리긴 했었지만, 연기는 잘했었다며 첨언했다. 처음 듣는 소리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내 배역을 맡기로 정해진 사람이 있었어……?
“오디션 볼 때 네 배역 연구를 승리한이 납득했기에 교체된 거야. 다른 배우도 아니고, 승리한이잖아. 영향력이 커.”
도라이 선배님은 웃음기를 쫙 빼고는 진지하게 말씀해 주셨다.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한 소절을 하더라도 춤과 노래에는 매사 진심으로 임하듯이, 연기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사실은 연기 스탯만 믿고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동기도 서브 연계 미션 깨려고 한 거잖아.
누군가에게는 겨우 얻어낸 기회이자 꿈이었을 자리를 내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책임감이 솟았다. 그래, 그 사람까지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연기를 해야 해.
새로이 각오를 다졌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대충한 건 아니었기에, 여전히 승리한이 왜 자꾸 촬영을 중단하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내가 맡은 배역을 차근차근 떠올려봤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소년. 하나뿐인 가족인 형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신보다 타인을 더 중요시하는 배려심과 소소한 일에도 만족할 줄 아는 순한 성품의 소유자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어…….
뭘 잘 못 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스태프분의 인사에 상념이 깨졌다.
“하온 씨, 잘 먹을게요!”
“……네?”
“오, 뉴삐야. 커피 차 왔나 보다.”
“……커피 차요?”
선배님이 스태프분이 들고 있는 컵을 가리켰다. 뭐지? 컵 홀더에 내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
도라이 선배님이 익숙하게 나를 이끌었다.
“너희 팬들이 보내줬을 거야.”
……디어리가?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나가보니 세트장 공터에 들어선 커피 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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