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간단한 오프닝 토크를 진행한 뒤 우리는 곧장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곳곳에 거치된 카메라가 바쁘게 돌아가며 그런 우리의 모습을 담아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밴에 타던 습관대로 뒷좌석 왼쪽 창가에 앉자, 정이한이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바로 앞에는 유찬 형, 맞은 편에는 이서호, 그리고 뒷좌석 왼쪽 창가에는 강현 형이 앉았다.
우리가 안전벨트를 매자, 버스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밝은 햇빛이 선팅된 차창 틈새로 은은하게 들어왔다. 여행 가기에 딱 좋은 날씨라서 그런지,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흥분한 이서호가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외쳤다.
“가즈아! 해! 외! 여! 행!”
사실을 말해줘야 하나. 미리 실망하는 것과 나중에 실망하는 것 중 어떤 게 그나마 덜 실망스러울까 고민하던 때였다. 강현 형이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해외 아닐 것 같던데?”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놀라서 눈이 땡그래진 이서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강현 형은 고갯짓으로 날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온이가 그러더라고.”
“뭣? 진하온, 너 뭐 들은 거 있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그런 간절한 눈빛이 따끔따끔 쏘아졌다.
“그, 여권 때문에.”
“여권?”
“응? 여권이 왜?”
유찬 형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돌아봤다. 눈치 좋은 정이한은 곧장 “아.”하고 뭔가를 이해한 듯한, 탄식에 가까운 탄성을 냈다.
“서호 형, 여권 만들었어?”
“여권? 그거야 당연히 가져왔지.”
공항에서 찾기 쉽도록 잘 보관했다고 자랑스럽게 으스댄 이서호가 앞으로 맨 슬링 백에서 여권을 꺼내 들었다.
“난 없거든. 근데 만들라고 안 하더라고.”
내 말에 동조하듯 정이한이 슬그머니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없어.”
“나도.”
여권 없는 멤버가 늘어날 때마다 이서호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상황 파악하려는 듯 빠르게 눈을 깜박이던 유찬 형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보조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
물끄러미 보조 가방을 들여다보는 듯한 유찬 형의 뒤통수가 무척 쓸쓸해 보였다. 붕 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았다.
“그래도… 우리끼리 여행 가는 거 처음이잖아요. 해외 아니어도 저는 좀 기대되는데.”
다들 해외 못 가서 서운한 건 알겠는데, 우리 지금 리얼리티 촬영 중이라고. 일부러 가볍게 말하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던 이서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아! 우리끼리 가는 첫 여행!”
물론 우리끼리라고 하기에는 카메라가 많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니까. 말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나도 내 입으로 첫 여행이라고 뱉기 전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좋았던 기억 따위 하나도 없었던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이렇게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부담과 긴장이 아닌, 즐거움과 흥분으로 시작하는 첫 여행.
***
해외는 아니어도 공항으로 가는 시늉은 할 거라 생각했는데,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공항은커녕 공장 지대로 보이는 동네가 나왔다. 어쩐지 대형 트럭과 트레일러가 많더라니.
우리는 공항이 아닌 인천항여객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매니저 형이 뱃멀미하는 사람은 약 받아 가라고 확인 사살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섬으로 가는구나 싶었다.
미니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다 비린내가 훅 끼쳤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터미널 규모가 조그매서 신기했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있어서 카메라를 대동하고 등장한 우리에게 시선이 확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어르신이라 다행히 큰 소란은 없었다. 몇몇 사생이 따라붙은 것 같았지만 촬영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곧장 배에 올랐다. 엄청 큰 배가 정박해 있어서 그래도 큰 배를 타는구나 했는데,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작은 배가 우리의 이동 수단이었다. 그렇게 소적도라는 이름도 낯선 섬으로 우리는 실려 갔다.
작은 배는 섬 주민들이 뭍으로 이동할 때 쓰는 교통수단인지 큰 짐을 이고 계신 어르신들이 많았다. 우리의 분위기 메이커 이서호가 제일 먼저 나서서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어드리자, 다들 자연스럽게 어르신들의 짐을 선실로 옮겨드렸다.
이서호의 친화력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는데,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가 되어 있었다. 얼떨결에 같이 귀여움받게 된 나와 멤버들은 어색한 듯, 포근한 시간을 보내다가 소적도에 도착했다. 이제 어디로 가나 했는데…….
우리는 훨씬 더 작은 통통배로 옮겨탔다. 여기서 또 들어간다고? 파란색 통통배의 옆면에 하얀색 페인트로 휘갈겨 쓴 듯한 ‘낚시’, ‘대여’라는 글자가 바닷바람에 희끗희끗 칠이 벗겨져 있었다. 배 앞머리에 작은 평상과 그늘막이 처져 있길래 거기 얌전히 앉아 있자 곧 카메라 감독님 몇 분이 올라탄 뒤 출발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자! 디아스 여러분!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와 계시던 피디님이 양팔을 쫙 벌린 채 발랄하게 말씀하셨다. 이리보고, 저리 보고, 물구나무서서 봐도 무인도 같은걸……. 기분 탓인가.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는, 반쯤 부서진 방파제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됐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부서진 방파제 왼쪽에는 폭이 넓은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이 작게 펼쳐져 있었는데, 모래사장 너머는 나무로 빽빽했다. 그리고 섬 중앙의 삐죽 솟은 바위산이 우리를 약 올리듯 내려보고 있었다.
형들도 무인도라고 직감한 듯 선뜻 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울상이 된 이서호가 피디님께 원망 섞인 질문을 했다.
“우리 소원 들어주는 거 맞아요? 이거 몰카 아니에요?”
“그럼요! 일단 내려서 말씀하시죠!”
“내리라고요?”
“내려야죠?”
유찬 형은 애먼 캐리어 손잡이만 문지르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쩌다가 리얼리티 컨셉이 무인도 체험이 된 거지? 우리가 적은 내용 어디에 무인도 가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는데?
여기서 배 째라 선언하기에는 우리의 연차는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싱싱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방송 나가면 우리 무인도 보냈다고 디어리들이 혼내줄 거야…….
배에서 내려 부서진 방파제를 따라 걸어가니 그리 넓지 않은 시멘트 길이 나왔다. 나름 길처럼 만들어 놓긴 했지만, 그것도 방파제 근처뿐이었다. 그나마 숲 안쪽으로 사람이 오가면서 닦인 게 분명한 오솔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완전히 무인도는 아닌가 봐.
“자, 여러분이 도착한 이 섬의 이름은 ‘휴어도’입니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이다. 애초에 개인 소유일 것으로 보이는 이런 작은 섬은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을 테니, 몰랐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물고기를 잡다가 잠시 쉬어가는 섬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현재는 무인도입니다. 섬 소유주분께 촬영 및 채집 허가는 받았으니 자유롭게 지내시면 됩니다!”
……무인도? 채집 허가? 우리가 뭘 채집하는데? 채집할 생각 없는데요. 지금 내가 아이돌 리얼리티 촬영을 하는 건지, 정글의 법규에 출연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오지 정글이 아니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여러분이 적어 낸 쪽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스태프 한 분이 하드보드지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우리가 적어 낸 쪽지가 원본 그대로 붙어 있었다.
[유찬 - 멤버들과 별구경!
이한 - 숲으로 힐링 여행 가고 싶어요. ^^
강현 - 해외여행. 이렇게 쓰면 어떻게 되나요?
서호 - 어트랙션 체험!!!! 놀이공원도 좋고요!!! ><
하온 - 공포체험]
“고, 고, 공포체허어엄?”
이서호가 입을 쩍 벌린 채 소리를 꽥 질렀다.
“서호 형, 귀신 무서워해?”
묻는 말에 이서호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술을 꾹 다물고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아, 아, 아니?”
무서워하네, 뭐. 여기서 무슨 공포체험을 시킬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이서호 반응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무인도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른 걸 다 떠나서 체력이 걱정된다. 잠자리가 불편하면 체력 회복 잘 안 되는데…….
“유찬 씨의 소원, 별 구경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공간! 뻥 뚫린 하늘!”
너무 뻥 뚫린 거 아니야?
“이한 씨의 소원! 숲으로의 힐링 여행! 그야말로 대자연!”
그 힐링이 이 힐링이 아니었을 텐데? 애초에 무인도와 힐링이 어울리긴 하냔 말이지.
“서호 씨의 어트랙션 체험! 이 섬에는 다양한 어트랙션 체험 또한 가능합니다! 서호 씨의 소원을 위해 특별히 이 섬을 골랐으니 기대해 주세요!”
“그, 어, 네에…….”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정말 놀랍게도 기대가 하나도 안 된다.
“그리고 강현 씨. 해외여행을 적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으셨죠? 이렇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강현 형에게 향했다. 우리의 영웅이 역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해외여행 같은 터무니 없이 스케일 큰 소원 안 적었으면 무인도에 올 일 없었을 거란 소리 아니야?
잠깐. 맞아. 이서호가 해외여행 적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피디님이 음흉하게 웃었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럼, 이서호가 물었을 때부터 계획된 건 아니겠지?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미션 통과하자마자 모든 소원 다 들어주겠다는 결정도 되게 빨리 나왔던 것 같다. 분명히 내가 예산 문제를 걱정했었던 것 같은데……. 아, 이게 이렇게 돌아오네.
“마지막으로 하온 씨. 공포체험. 공포 매니아 하온 씨도 만족할 만한 날 것 그대로의 심령 스팟이 이 섬에 숨겨져 있습니다!”
“히익!”
이서호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이서호뿐만이 아니었다. 강현 형도 이서호처럼 내게서 반 발자국 멀어졌고, 유찬 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건 나와 정이한 뿐이었다.
뭐야? 유찬 형은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강현 형… 설마 귀신이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