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7화 (117/320)

117.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웅웅대는 주변의 소음이 먼저 들렸고, 그다음에는 차차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수백 개의 추를 온몸에 매단 것처럼 전신이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시야가 돌아오는지, 형광등 빛이 눈꺼풀을 통과해 세상이 붉게 물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교주가 아직도 옆에 있으면 어쩌지?

그러면 진짜 곤란한데. 지금 상황에서 교주랑 마주치면 또다시 상태 이상이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모르는 척 누워있는 게 나으려나…….

그때, 눈앞에 검은 형체가 어른거리더니 몸을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날 감싸 안고 엎드린 누군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온아, 눈 좀 떠봐.”

정이한이다. 왜 이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시름시름 앓고 있어. 설마 정이한도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교주 운운하면서 자는 척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마자 쏟아지는 형광등 빛이 눈부셔서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천장을 보니 병원이었다. 그새 병원으로 옮겨놨나 보다. 나 쓰러진 거 우리 디어리들이 몰라야 할 텐데…….

“……혀, 켁, 콜록, 형.”

뭐야, 목이 왜 이렇게 맛이 갔지? 부르는 소리에 내 가슴팍에 엎드려있던 정이한의 고개가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아이돌이면서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는지 상당히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어라? 잠깐… 한 30분 기절해 있던 거 아닌가? 죽어도 고 스킬 테스트할 때 컨디션에 따라 상태 이상 유지 시간이 길어지긴 했었지만, 끽해야 3시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메이크업 다 받은 상태였잖아. 몇 시간 만에 사람 몰골이 저렇게까지 꼬질꼬질해질 수는 없는데…….

“하, 하온아!”

정이한이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나를 보다가 주륵주륵 눈물을 쏟아냈다.

아, 왜 우는 거야. 마음 아프게…….

내가 쓰러져서 또 속상하게 만들었나 봐. 미안한 마음에 정이한을 달래주려고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자, 고개를 마구 내젓더니 날 침대에 딱 붙여 버렸다.

“누워있어, 물 먹고 싶지? 물 갖다 줄게!”

“네…….”

정이한이 병실 한쪽에 놓여 있는 포트에서 물을 따라 건네줬다. 내가 목 축이는 걸 보면서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얼굴은 여전히 불안한지 걱정으로 가득했다.

일단 안심시켜줘야 할 것 같아, 부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스트레칭 하는 걸 보여줬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가뿐하다고 했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물론 얼굴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형.”

“응.”

“저 몇 시간이나 쓰러져 잔 거예요?”

물으면 안 되는 질문이었는지, 정이한의 고개와 어깨가 동시에 처졌다. 병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한참 만에 “이틀…….”하고 힘없이 말했다.

“네? 이틀? 이틀이라고요?”

“응… 정말, 정말 걱정 많이 했는데…….”

눈 떠줘서 고마워. 정이한이 나를 꼭 안아 오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그로도 부족하다는 듯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는 답답할 정도로 강하게 끌어 안아왔다.

“미안해요…….”

정이한의 등을 토닥이면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빈혈로 끝낼 수 있었는데, 이건 전부 교주 때문이었다. 음방 1위 트로피를 두 개나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우리 멤버들, 디어리들이랑 같이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데뷔 활동을 끝낼 수 있었는데…….

“네가 뭐가 미안해. 쓰러질 정도로 몸 안 좋은 것도 눈치 못 챈 내가 더 미안하지…….”

“무슨 소리예요. 형이 저 얼마나 많이… 켈록, 도와줬는데. 컨디션 관리 못 한 건 제 잘못이에요.”

“아니야, 내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어. 하온이 몸 약한 거 잘 알면서…….”

이러다가는 사과 릴레이가 끝이 없겠다. 나는 정이한의 어깨를 밀어내 내게서 떼어낸 뒤 까맣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저도 그렇게 갑자기 컨디션이 무너질 거라곤 예상 못 했어요. 형 잘못 아니에요. 잘못한 거 없어.”

부채감으로부터 좀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일부러 눈매에 힘을 꽉 준 채 단호한 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곤 내 말이 이어지는 내내 입술 안쪽을 짓씹듯이 우물거리던 정이한을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어 턱을 꾹꾹 눌렀다.

꾹 다물었던 입술을 살짝 벌린 정이한에게 잘했다는 듯 웃어준 뒤,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형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고, 도움받고 있어요.”

“……내가 의지가 돼?”

“물론이죠. 이건 다른 형들한텐 비밀인데, 제일 많이 의지하고 있는걸요. 형이 내 머리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고, 불안할 때마다, 지칠 때마다 손 꼭 잡아주는 것도 좋아요.”

내 말을 들은 정이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옅은 미소를 만족스럽게 보면서 한마디를 더 했다.

“저는 정말 형이 좋아요. 특히 웃을 때.”

“정…말?”

“그럼요. 정말이죠.”

그제야 비로소 정이한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걷혔다. 그리고 지어진 미소는,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걷힌 하늘을 가르며 내리쬐는 한 줄기 햇빛 같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정이한의 미소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드르륵, 병실 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누군가 경계한 것도 잠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하온… 아직도 눈 못 떴……. 어! 야! 진하온!”

……그런데 이서호는 왜 환자복을 입고 있지?

“어, 어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성큼성큼 기세 좋게 다가온 이서호는, 멱살을 잡는 대신 거칠게 나를 끌어당겨 상체를 꽉 안아왔다. 그 바람에 이서호의 단단한 가슴팍에 뺨이 짓눌렸다.

숨 막혀!

“……다행이다. 진짜… 진짜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울먹이는 이서호 탓에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도 못하고 쏙 들어가 버렸다.

“미안…….”

“하온아!”

뒤따라 들어온 유찬 형이 놀란 목소리로 불러오자 이서호가 얼른 날 놓아줬다. 내 양쪽 뺨을 터억 잡아 온 유찬 형이 요리조리 날 살피면서 묻는데…….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고? 불편한 곳은?”

걱정해오는 형의 말이 아까 정이한과 똑같아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러자 유찬 형이 복어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웃어? 형들 잠도 못 자게 걱정시켜 놓고서 웃음이 나와?”

“미, 미안해요. 이한 형이랑 너무 똑같이 물어봐서…….”

눈매를 좁힌 채 새침하게 날 노려보던 유찬 형은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농담이야. 하아… 별일 없어서 진짜 다행이다. 이제 한시름 놨어. 서호야, 하온이 아직 힘들 테니까 좀 떨어지자.”

이서호가 팔등으로 눈을 슥슥 문지르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울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하는데, 그래도 코맹맹이 소리를 감출 순 없었다.

“응. 알았어. 크흥.”

마지막으로 병실로 들어온 강현 형도 염려하는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살피다가, 이내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도 괜찮네.”

지금이 아까부터 정말 궁금했던 걸 물어볼 기회인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다들 환자복을 입고 있어요? 설마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유찬 형이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웃었다.

“아니, 우리 전원 건강검진 받기로 했거든. 나랑 서호 병원 목격담이 뜨는 바람에 디어리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아서, 진정시켜줄 겸.”

오, 누구 생각이지? 민폐 끼칠까 봐 잔뜩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멤버 전원이 활동을 마치고 잠깐 휴식기를 갖기 전, 정밀 건강검진 차원에서 입원 검사받는 거라고 하면 디어리들은 오히려 좋아할 것 같았다.

“와, 누구 생각이에요?”

“재혁이.”

아, 하마터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유찬 형 앞에서 얼굴을 굳힐 뻔했다. 진짜……. 영향력이 지대하네. 그런데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봤던 교주를 떠올리며, 그 의중을 파악하려고 애쓸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뿌연 안개 같은 목소리가 잡힐 듯 말 듯하게 떠올랐다. 이상해,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분명히 기절하기 직전에 들은 거 같은데 왜 기억이 안 나지?

교주에게 잡혔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자, 이제 이한이도 가서 좀 씻고 옷 갈아입어. 이 상태로 목격담이라도 떴다간 볼만하겠다.”

유찬 형이 슬슬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정이한을 밀어냈다. 그러자 정이한은 제 옷에 코를 킁킁 박으면서 “아… 혹시 내, 냄새나?”하고 당황해했다.

“하온아……. 미안.”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아, 설마 아까 끌어안았다고 그러는 건가?

“냄새 전혀 안 나요. 솔직히 좀… 꼬질꼬질해 보이긴 하지만.”

“윽, 나도 빨리 다녀올게.”

그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이한이 큰 보폭으로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 아 뭐야, 진짜 귀여워.

***

오랜만에 만난 실장님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반가워한 것도 잠시, 나는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긴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체력 관리하기로 약속했는데, 못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지 꾹꾹 참는다고 다가 아니라는 애정 어린 잔소리에 한참을 시달리고 나서야 풀려났다. 물론, 그 이후에는 매니저 형의 과격한 애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두 분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반쯤 넋이 나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지루하고 지루한 정밀 건강검진 시간이었다. 내가 기절했을 때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했다고 들었는데, 전부 다 원인 불명으로 나왔던 터라 이참에 제대로 한 번 검진을 받아보라는 실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깨어난 후에도 병원에서 꼬박 하루를 다 쓴 뒤에야 잔뜩 지친 상태로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서 형들의 관심과 무제한 쓰다듬을 받은 덕에 체력을 가득 채울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지.

“아으, 피곤하다.”

유찬 형이 어깨를 움켜쥔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스트레칭했다. 이서호는 소파로 뛰어가서 다이빙하듯 엎어졌다.

“하온이 먼저 씻을래?”

내게 가장 먼저 권해온 정이한에게 욕실을 양보하고 얼른 유찬 형에게 갔다. 정이한은 씻는 대신 나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이서호에게 물었는데, 이서호도 마지막을 자처했다.

“유찬 형.”

“응?”

“재혁 후배님 연락처 있죠?”

“어? 있지. 왜?”

재혁의 ‘재’ 자가 나오기 무섭게 이서호가 고개만 우리 쪽으로 돌린 채 귀를 쫑긋거렸다. 하여간 누가 광신도 아니랄까 봐.

“그때 제가 악수하자고 한 거 쳐냈잖아요. 순간 정전기가 올라서 놀라서 그런 건데 오해하실 것 같아서 사과도 하고, 저희 도와준 거 고맙다고 인사도 하려고요.”

“아, 정말? 잘 생각했어. 재혁이가 속상해하더라고.”

유찬 형이 화색을 띠며 곧장 내게 교주의 연락처를 넘겨줬다. 마음 같아선 교주라고 저장해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라스트원-준재혁]이라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저장했다.

혹시 알아? ‘최애의 휴대폰 저장 목록이 궁금해!’라는 타이틀로 예고 없이 방송에서 까발려질지. 도대체 누군데 교주로 저장했냐고 물어보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 같으니까.

“지금 전화할 거야?”

유찬 형이 들뜬 기색을 어김없이 드러내면서 물어왔다. 티는 안 냈지만 나와 교주 사이가 틀어질까 내심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럴 만하지. 유찬 형도 훌륭한 신도였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거짓부렁이지만 형은 오해가 풀렸을 테니 다시 신도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고.

아니… 돌아갔을 확률이 높겠지.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말이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교주와 대화해봐야 했다. 나는 침착하게 남은 체력을 확인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휴대폰을 흔들었다.

“네. 그렇긴 한데, 부끄러우니까 엿듣지 마세요.”

정이한이 씻는 사이에 끝내야겠다.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정이한이 내게 등 떠밀려 씻으러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할 이야기 있잖아. 한번 해보자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