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이한 형, 일어나요.”
정이한을 살살 흔들면서 깨우자 짧은 잠투정 끝에,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내려보고 있던 나와 시선이 얽히자 아침부터 맑은 미소와 함께 “좋은 아침.”하고 듣기 좋은 음성이 울렸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이것도 며칠 했더니 이젠 익숙해졌다. 이서호처럼 깨우기 어려운 타입도 아니라서 힘든 것도 없었고. 정이한은 기지개를 쭉 켠 뒤 단숨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매일 하온이가 깨워 주니까 좋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하는 말에 “형이 좋으면 저도 좋아요.”하고 대답했더니, 정이한이 불그스름하게 뺨을 붉힌 채 기분 좋게 웃었다.
“씻고 올게.”
“네. 그럼 전 아침 차릴게요.”
“응. 냉장고에 어제 만들어둔 김치찌개 있어. 그거 먹을까?”
“좋죠~”
나란히 방을 나와 정이한은 욕실로, 나는 부엌으로 갔다. 밥솥 취사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냄비째 넣어둔 김치찌개를 꺼내서 쿡탑에 올렸다. 최근 요리에 대한 의욕을 활활 불태우자 정이한이 밥 짓는 것부터 해보라면서 사준 거였다.
“하온하아암, 좋은 아침…….”
유찬 형이 졸린 눈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리면서 나왔다. 잠에서 깨려는 듯 양 뺨을 찰싹찰싹 때리더니, 내 옆에 서서 막 올린 김치찌개 냄비 뚜껑을 열어 코를 킁킁거렸다.
“배고프다……. 아직 덜 끓었네.”
“방금 올렸어요.”
“이한이는 씻는 중?”
“네. 강현 형도 일어났어요?”
“응. 먼저 씻으라고 했어. 오늘 서호 담당은 나라서.”
“아침마다 고생이네요.”
“그러게. 저 녀석 도대체 언제쯤이면 혼자 일어나려나.”
유찬 형은 한숨을 폭 내쉰 뒤 선봉에 서는 보병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감 어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이서호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이서호가 알아서 일어나주면 아침 숙소가 한결 평화로울 테지만, 또 “이서호!”하고 외치는 형들의 목소리가 안 들리면 허전해질 것 같기도 했다.
***
일주일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일요일인 내일을 마지막으로 데뷔 활동 기간이 끝나는 터라 한동안 무대에 설 일이 없었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니 그냥 아쉽기만 했다.
“얘들아, 거기 말고 이쪽.”
새벽에 사녹할 때 배정받았던 대기실로 가려는데 매니저 형이 우리를 다른 쪽으로 인솔했다. 중간에 스케줄 뛰고 왔다고 대기실이 바뀌기도 하나?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향한 곳은…….
“정말 여기가 우리 대기실이에요?”
유찬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동그래진 눈으로 그리 넓진 않지만, 상당히 쾌적해 보이는 대기실을 살펴보기 바빴다. 그러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대기실 문 바깥쪽을 다시금 확인했다.
[디아스]
문 앞에 붙어 있는 이름표는 확실히 우리 거가 맞았다. 혹시라도 몰래카메라라고 깨알 같은 글자로 써 놓은 건 아닐까,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글자 외 여백은 깨끗하기만 했다.
“후후. 그렇다니까.”
매니저 형의 콧대가 천장을 뚫을 듯 치솟아 올랐다. 고개를 한껏 치켜세운 덕에 날카로운 턱선이 유달리 빛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세상에, 전용 대기실을 받다니. 어쩐지 우리들의 꿈에 성큼, 아주 크게 한 발자국 디딘 것 같았다. 게다가 대기실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축하합니다♬
디아스♥]
대기실 벽에 알록달록한 축하 메시지까지 붙어 있었다. 귀여운 동물과 꽃 풍선들 사이사이로 화관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뭘 축하한다는 거지? 단독 대기실 받은 기념……?
그뿐만 아니라 우리 그룹명 아래에는 검은색 색지가 길게 붙어 있었는데, 한쪽 모서리가 살짝 접힌 걸 봐서는 쭉 잡아 뜯도록 의도된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뜯으면 또 새로운 글자가 나올 것처럼 생긴 게.
“우와아! 저건 뭐예요? 왜 붙여 놓은 거예요?”
상기된 얼굴로 내부를 훑어보던 이서호는 이내 벽에 붙은 색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비밀이야. 어어! 아직 뜯으면 안 된다?”
이서호가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의 육식 동물처럼 호기롭게 접근하다가 끼긱, 멈춰 섰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뜯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검은 색지 밑에 쓰인 글자가 뭘까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역시 ‘몰래카메라’일 것 같았다. 몰래카메라 아니고서는 이럴 리 없잖아.
“자자, 얘들아, 서두르자!”
벌써? 아직 본방 라이브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 그러고 보니 스타일리스트 팀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니저 형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품에 무대 의상이 안겨졌고, 간이 탈의실로 밀어 넣어졌다.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고 난 뒤 우리는 완벽한 무대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할 일 없이 소파와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서호는 뜀틀에 올라탈 때 같은 자세로 다리 사이에 원형 의자를 놓고 앉아, 의자 끝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심심하다면서 휴대폰을 찾으러 움직였다.
나는 안락한 게 최고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 이서호가 소파 끝의 빈자리에 풀썩 앉았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갑자기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건, 카메라 군단을 대동하고 들어온 검은 집사복 차림의, 거대한 고양이 탈이었다. 고양이 탈은 귀엽게 변조된 음성으로 밝게 인사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음악 열차의 마스코트, 뮤였다.
“디아스! 안녀엉!”
“우와! 뮤잖아! 여긴 왜 왔어? 무슨 일이야?”
이서호가 꼬리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처럼 뮤에게 달려가 근처를 빙글빙글 돌면서 반가워했다. 카메라 한 대가 그런 이서호를 집중적으로 찍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카메라는 소파에 주르륵 늘어져 있던 우리를 잡아 와, 뒤늦게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뮤 안녕!”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인사하자 뮤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부들부들한 털옷에 집사복까지 껴입은 거대한 덩치 뒤로 흔들리는 꼬리 끝이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구, 궁금해……. 안에서 수동으로 돌리는 건가?
“호옥시! 이야기 들었냐앙?”
“무슨 이야기?”
뮤가 두툼하고 하얀 솜 발로 입을 가리면서 “냐하항!”하고 웃었다. 자꾸 저 속에 들어 있을 얼굴도 모르는 건장한 남자가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넣어둬, 넣어둬.
“얼른 뜯어보라옹!”
뮤가 검은색 색지를 가리켰다. 근처에 있던 강현 형이 “이거?”하고 물으니 열성적인 끄덕임이 돌아왔다. 강현 형은 재고 따지는 거 없는 사람이라서 곧바로 주욱, 검은색 색지를 뜯어 버렸다.
[★축★ ‘Dear’ 1위 후보!]
벽에 붙은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는 꽤 긴 로딩 시간이 필요했다. 곰곰이 곱씹던 멤버들도 뒤늦게 하나, 둘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
“우리?”
“정말……?”
“……허.”
“우, 우와아아아악!”
“축하한다옹! 이제 뮤가 왜 왔는지 알겠냐옹?”
“어! 완전!”
이서호가 함박웃음 지으면서 뮤를 끌어안고 폴짝거렸다. 나는 아직 우리가 1위 후보에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멍했다.
“그럼 이거 우리 거야?”
유찬 형이 벽에 붙은 화관들을 가리키자 뮤가 “그렇다냥!”하고 경쾌하게 대꾸했다. 첫 1위 후보의 영광을 이런 식으로 축하해주기도 하는구나. 방송국의 배려에 놀라면서 유찬 형이 나눠 주는 화관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런 우리 모습을 카메라가 꼼꼼히 담고 있었다.
“이야, 팬사인회 하면 하온이 화관 많이 들어오겠다. 찰떡인데?”
“하온이는 뭘 써도 예뻐.”
나를 민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 같은 두 형을 피해 도망치듯 뮤 옆으로 가서 붙었다. 형들이 웃으면서 나를 쫓아왔다. 우리가 뮤를 기준으로 한쪽에 주르륵 서자 카메라도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이동했다.
유찬 형의 수신호에 맞춰 여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들 들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 질문은 음악 열차답게 조금 뻔했는데 1위 후보가 될 걸 예상했는지, 지금 느낌이 어떤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한 뒤 1위 공약을 선언할 시간이 되었다. 다들 딱히 생각해둔 게 없는지 끔뻑거리며 서로의 눈만 마주 보았다.
“여장하고 거리에서 디어 버스킹 어때?”
……유찬 형? 왜 또 흑역사의 소굴로 자진해서 들어가려는 거야?
“그거 좋다! 우리 영상 중에 여장한 게 제일 인기 많았어!”
“그렇지?”
했던 거 또 하면 신선함이 사라지는데……. 무엇보다 우리 디어리들이 좋아하는 걸 해줘야 하는데, 디어리가 여장하는 걸 좋아할까? 디어리가 좋아할 만한 거, 디어리…….
“오늘 받은 화관 쓰고 앵콜 무대 하는 건 이상한가?”
정이한이 꽃잎을 검지로 건드리면서 말하자, 다들 머리에 느낌표가 떠오른 것 같은 표정으로 일제히 정이한을 바라봤다. 나도 대찬성이었다.
디어리가 좋아할 것 같아!
1위 공약 선언을 끝으로 촬영을 마무리하고 귀엽게 손 흔드는 뮤를 배웅한 뒤,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우리는 카메라 앞이라고 참아 왔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
“얘들아, 혹시 1위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1위 발표 무대에 오르기 위해 대기하던 중, 유찬 형이 우리를 다독거리듯 말했다.
“당연하죠.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인데요.”
솔직히 아주 조오금은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숨긴 채 시치미 뗐다. 하지만 기대할 법도 하잖아.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 중에 1군은 없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와 함께 1위 후보에 든 가수도 우리처럼 1위 후보 자체가 처음인 사람이었다.
솔직히 빈집털이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기대를 접는 게 힘들었다. 유찬 형도 그래서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미리 쿠션 깔아두는 느낌이었고.
“알쥐알쥐! 우리 떨어져도 괜찮아! 사실……. 1위하고 싶긴 하지만.”
이서호가 귀여운 욕심을 드러내면서 혀를 빼꼼 내밀었다. 솔직한 자식.
“……후우, 조금 긴장된다.”
정이한이 가슴을 손으로 짚으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는 하온 테라피 좀 해야겠다.”
유찬 형이 백허그 해오듯이 내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어깨에 얹어진 유찬 형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들면서 놀다가 무대에 올라가라는 신호를 받았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홀을 가득 메울 듯이 소리치는 디어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게 우리를 받쳐주는 디어리의 응원에 힘입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디어리가 자랑스러워할 가수가 되고 싶어.
내게 실망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