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저희 데뷔 앨범 타이틀곡이 ‘Dear’잖아요.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아요. 공카에서 괜히 1위 한 게 아니더라고요! 아, 물론 저희 멤버 투표에서도 디어리가 1위였어요!”
유찬 형은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멘트를 이어나갔다. 표정도 훨씬 편안해졌고, 무엇보다 어투가 자연스러웠다.
“그럼, 팬덤명이 정해진 기념으로 우리 디어리들에게 주는 선물! 멤버 별로 찍은 남친 버전 모닝콜! 영상은 나중에 공카랑, 저희 W라이브 채널에도 올려주신다니까 다운도 받으실 수 있어요!”
앗, 내 차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삼각대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찍어드릴게요!”
작은 휴대폰 화면에 내 상체가 한껏 클로즈업되어 담겼다. 후다닥 쪼그려 앉아서 거치대와 휴대폰을 분리하는 사이 내 얼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면을 꽉 채웠다.
서둘러 카메라를 분리한 나는 팔을 쭉 뻗어서 내 뒤로 멤버들이 다 나오도록 각도를 조절하고, 손을 흔들었다.
“미안해요. 부담스러웠죠?”
ㅡ 아니!!
ㅡ 너무 좋았어ㅠㅠㅠㅠㅠㅠㅠㅠ
ㅡ 더 보여죠라!!!
ㅡ 우래기 예뻐죽겠다 움쭈쭈 ‘3’
ㅡ 저는 진하온이 너무 좋아서 실제로 죽은 적도 있습니다 -인생 2회차 박디어리-
ㅡ beautiful♥
인생 2회차에 뜨끔했지만 내가 진짜 인생 2회차인 거 어떻게 알겠어? 우리 디어리들이 괜찮다니까 됐어!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실실 웃으면서 “저는 마지막에 할게요!”하고 말한 뒤 카메라를 후면 카메라 모드로 바꿔놓으며 몸을 돌렸다.
“먼저 유찬 형!”
ㅡ 하온아! 더 가까이 가줘!
ㅡ 유차니 얼빡샷!!
ㅡ 얼빡! 얼빡!
아! 역시 우리 디어리들은 얼빡 좋아하는구나!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나는 유찬 형에게 바짝 다가서며 최대한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얼굴만 동동 떠 있으면 이상할 것 같아서 어깨선까지 나오게 잡았더니 아주 반응이 좋았다. 뿌듯하다.
곧장 연기에 돌입한 유찬 형의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슥 뻗어 온 섬섬옥수가 휴대폰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물론, 화면 속에서는 마치 눈앞에 있는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디어리, 아침이야. 일어나.”
나직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깨우는 게 아니라, 재우려는 것 같았다. 이게 맞나? 하지만 디어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럼 됐지, 응.
“다음은 서호 형!”
이서호에게 쪼르륵 다가가서 이번에도 유찬 형이랑 똑같은 구도를 잡았다.
“나 이렇게 누울 테니까 옆에서 찍어줘!”
“어떻게?”
이서호가 소파 팔걸이를 베고, 모로 누운 채 손을 까딱거렸다. 아, 오케이. 접수. 이서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게끔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 됐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대기하던 이서호는, 이내 정말 자다 깬 것처럼 눈을 비비고 하품했다. 그리고 옆에 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검지로 콕콕 찔렀는데, 그게 꼭 뺨을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
“디어리~ 언제까지 잘 거야? 나 우리 디어리 예쁜 눈이 보고 싶은데…….”
와, 미쳤다. 오글거려! 일부러 이런 컨셉을 잡은 것 같긴 한데,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하마터면 휴대폰을 집어던질 뻔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시선을 회피했더니 형들도 팔을 문지르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역대급 반응이 쏟아지는 채팅창을 흐린 눈으로 보다가 “서호 형, 끝!”하고 벌떡 일어났다.
“강현 형 차례예요.”
그나마 가장 침착하게 서 있는 강현 형에게 순서를 넘겼다. 강현 형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디어리, 일어나. 아침이야.”
“……유찬 형이 한 거랑 똑같은데요?”
아, 물론. 아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달랐지만……. 멘트가 문제였다. 단어 순서만 다르지, 유찬 형이랑 똑같잖아! 성의 없어 보인다고!
“그, 런가. 그럼 나 생각 좀 해볼게. 이한 형 먼저 해줄래?”
“네!”
강현 형은 팔짱을 낀 채 미간에 주름이 파일 정도로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유찬 형이 아이디어를 빌려주려는 듯 옆에 다가가서 무어라 속닥거리자, 강현 형의 미간이 더욱더 깊어졌다. 모닝콜 한 번 찍는데 저렇게 수심이 깊어질 일인가?
“이한 형.”
“어, 나는. 잠깐만.”
소파 등받이를 짚은 채 서 있던 정이한이 움직이자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모습을 담았다. 정이한은 곧 소파에 자릴 잡고 앉더니 다리를 벌린 채 내게 손짓했다.
“하온아, 이쪽으로.”
“여기요?”
“좀 더 가까이.”
“이만큼?”
“조금만 더.”
더 가면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수준인데? 원하는 앵글이 아직 가늠 안 돼서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슬쩍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해서 소파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바짝 붙었다. 덕분에 정이한과 내 허벅지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거 다른 사람들이 보면 되게 이상해 보이겠는데……. 하지만 남친 버전 모닝콜이니까 찍는 사람이랑 거리감이 가까운 건 어쩔 수 없겠……지?
“응, 됐다. 위에서 나 내려보는 것처럼 찍어줄래?”
“이렇게요?”
“응응. 조금만 더 올려서.”
휴대폰을 내 턱과 가까워질 정도로 바짝 붙이고 나서야 정이한이 끄덕였다. 과연, 국어 정 선생.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나. 면전에서 대놓고 웃지 않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화면 가득 정이한을 담았다.
“좋은 아침. 밤새 보고 싶었는데, 잘 잤어?”
상냥한 눈빛과 다정한 어조는 평소 정이한이 내게 하던 아침 인사와 무척 닮아 있었다. 특히 ‘좋은 아침.’은 오늘 아침에도 들었던 참이라, 나는 그 대목에서 바로 정이한의 속셈을 눈치채 버렸다. 연기가 안 되니까 나한테 말 걸듯이 하려고 이런 자세 요구했구나.
마침 휴대폰도 내 얼굴과 가까우니 올려다보더라도 시선 처리가 이상하지 않고 말이지. 똑똑하게 머리 잘 쓴 것 같아서 기특했다. 디어리 선물인데 국어책이면 곤란하지. 그럼, 그럼.
디어리들이 녹아내린다면서 좋아하는 걸 뿌듯하게 보다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내 신호에 정이한이 해사하게 웃는 장면까지 아주 예쁘게 담겼다.
ㅡ ㅁㅊ!! 정이한 ㅅ니고할거야!! 혼인신고!!!
ㅡ 악!!!!!!!!!!!!!!!!!!!!!!!!!!!!
ㅡ 우래기..누가 인상 사납다했냐... 일케 갓기인디... 나랑 싸우자ㅠㅠㅠㅠㅠㅠ
ㅡ 밤새 보고 싶었대 ㅁ친 오늘부터 같이 야간 보초 서실 분 (1/100000)
정이한의 미소에 디어리들은 격렬한 반응으로 화답해줬다. 그렇지! 우리 정이한이 인상은 사나워도 사실은 순해 빠진 애라고.
“좋아요! 잘 됐어요!”
이제 내가 찍어줄 사람은 마지막 한 명 남았다.
“강현 형, 준비됐어요?”
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길게 심호흡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요구 사항 없이 그냥 바른 자세로 가만히 서 있길래, 팔을 올려서 정면 샷을 찍으려고 했더니 제지당했다.
“그냥 밑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로 찍어줘.”
“이 정도요?”
내 가슴께까지 카메라를 내린 뒤 아래서 위로 앵글을 잡았다. 스크린을 보던 강현 형이 내 팔목을 잡아채곤 직접 위치를 조정했다.
“여기.”
이번엔 이마로군. 하지만 이마에 딱 붙이는 편이, 확실히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듯한 구도라서 괜찮은 것 같았다.
“하, 흠흠. 다시 할게.”
강현 형은 자체 NG를 내고 민망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ㅡ 하? 하온이?
ㅡ 앜ㅋㅋㅋㅋ 강현잌ㅋㅋㅋ 정직한 남잨ㅋㅋㅋㅋ
ㅡ 아 글치! 비밀이지! 강현아! 울 혀니가 하오니 좋아하는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ㅋㅋ!
ㅡ 음지 발언 주의하세요 애들 보잖아요 ㅡㅡ
ㅡ 할많하않....ㅇㅍㅅ ㅁㅊ듯;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미처 궁금한 단어들의 뜻을 추측해보기도 전에 채팅은 빠르게 올라가 버렸다. 그 뒤에 비슷한 내용의 언급이 다시 안 올라와서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ㅇㅍㅅ’, 이것도 무슨 신조어인가? ‘ㅇㄱㄹㅇ’ 이런 거? 나중에 검색해 봐야겠네.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우리 디어리는 미인이구나?”
……이, 이건 또, 미묘하네. 형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오글거리는 멘트를 치니까 이상한 듯, 괜찮은 듯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강현 형이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이, 이거! 끼 부리는 미소!
잘생긴 얼굴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올바른 예를 보여주는 듯한 미소에 디어리와 함께 내 심장까지 펄떡거렸다. 위험한 남자야…….
“푸흐, 푸흐하하하! 아니, 그걸, 진, 푸흐흐, 진짜 했네?”
유찬 형이 배를 움켜잡고 박장대소했다. 강현 형의 시선이 천천히 유찬 형에게 향했다. 아까 속삭이던 게 설마……. 저 멘트 알려준 거였어?
“형.”
“헙.”
“…….”
조용히 유찬 형을 보는 강현 형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새까만 눈동자가 유독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다. 유찬 형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면서 외쳤다.
“마지막은 하온이! 하온이는 내가 찍어줄게! 이리 와!”
후우, 하고 분노를 다스리는 듯한 한숨과 함께 강현 형이 멋들어지게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헉! 못 담았어!
저런 걸 영상으로 남겨 놔야 하는데! 나는 화보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을 우리 디어리가 못 봤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강현 형에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아, 강현 형!”
“어.”
“방금 그거 다시 해줘요. 다시, 다시.”
“……어떤 거?”
“앞머리 넘기는 거요. 예전부터 형 그럴 때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디어리한테도 보여주게요!”
못 찍었으면 찍으면 되지! 그게 뭐냐며 궁금해하는 디어리들의 반응으로 채팅창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곧 강현 형은 조금 부끄러운 듯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는데, 으으응. 이거 아니야. 자연스럽지 않아…….
“아, 형. 이거 아닌데…….”
“다시 해?”
“평소 형 잘생김의 반의반도 못 보여주네요. 아쉽다…….”
비하인드 카메라에는 담겼으려나? 나는 무척 아쉬웠는데 강현 형은 묘하게 기분 좋아 보였다.
“줘봐. 내가 찍어줄게.”
이런 일에는 좀처럼 나서지 않는 강현 형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유찬 형이 해준다고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멀찍이 떨어진 유찬 형이 형 말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디어리들이 영상 속 상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벽을 배경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소파에서 찍을 수가 없었기에 얼른 자리를 이동했다.
강현 형에게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나를 보는 것처럼 높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스크린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거리를 좀 벌린 뒤 스탯으로 빚어낸 연기력을 발휘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하품을 하고, 막 누군가를 발견한 것처럼 휴대폰을 봤다. 먼저 일어난 뒤 아직 잠들어 있는 연인을 깨우러 들어가,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는 컨셉이었다. 컨셉에 한껏 충실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악! 하온아!”
“하온아!”
갑자기 멤버들이 여기저기서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방해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