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우리 미션 영상의 여파가 내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 같다. 원래 우리 무대 순서는 음방 초반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무려 1위 후보에 든 선배님들 무대 바로 앞 순서였다.
1위가 발표되는 순간, 우리는 팡팡 터지는 종이 꽃가루를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박수 쳤다. 그도 그럴 게 무대 가장자리에 수납되었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두 번째 줄 중앙에 배치된 탓이었다. 이번 주 1위를 한 걸그룹 선배님들이 무대 중앙으로 뛰쳐나가자 시야가 확 트였다.
카메라가 꺼진 무대 위에서 팬분들과 소통하며, 자유롭게 앵콜 무대를 누비는 선배님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다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뒷열에 있을 때는 그저 멀게만 보였는데,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언젠가는 우리도 1위 트로피를 손에 든 채 앵콜 무대에서 뛰어놀 수 있겠지. 수없이 반짝거리는 응원봉이 밤하늘의 별처럼 보여, 무대 위에서 보니 마치 거대한 은하수 무리가 한데 어우러져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도 앵콜 무대 할 수 있을까…….”
유찬 형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요. 당연하죠.”
나를 선두로 정이한과 이서호도 맞장구쳤다. 강현 형까지 의지와 각오를 담은 어조로 “꼭.”하고 짧게 대답했다.
“좋아! 우리 목표는 1위!”
눈을 빛낸 유찬 형이 조금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주먹을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지나가던 스태프분이 우리를 보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민망해하면서 유찬 형한테서 떨어지자 형이 내가 부끄럽냐고 달려드는 바람에 때아닌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얘들아! 서두르자!”
매니저 형이 놀고 있는 우리를 단번에 제압했다.
“대기실에서 오늘 첫 라방 예고 영상 촬영하고 바로 숙소로 이동할 거야.”
“네!”
이번 예고 영상 촬영은 컨셉이랄 것도 없었다. 대기실 벽을 배경 삼아 일렬로 서서 다 같이 인사하고, [오늘 밤, 8시, 디아스 첫 라이브! W라이브에서, 만나요.]를 유찬 형부터 나이 순서대로 한 마디씩 멘트하면 끝나는 간단한 촬영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걸 몇 번이나 다시 찍는 건지. 말투가 영 어색하거나 발음이 꼬이고, 씹히는 등 아주 난리였다. 몇 번의 재촬영 끝에 그럴싸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만나요!”
내 멘트를 끝으로 우리는 동시에 양 손바닥을 펼쳐서 마구마구 흔들었다. 매니저 형이 녹음을 종료하면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됐어! 잘했다, 얘들아!”
“으아…….”
“우리 라방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완전 어색할 듯…….”
정이한이 고개 저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 어색하고 딱딱한 방송이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재촬영에 나도 몇 번 힘을 보탰으니까…….
더군다나 전생에서 공식적으로 W라이브를 할 때면 대부분 구석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병풍 역할을 맡았었다. 나 혼자 켜볼 생각은 언감생심, 꿈에도 꿔본 적 없고. 그래서 팬분들과 화면으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낯선 일이었다.
막상 라이브 방송이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조금 심란했다. 유찬 형은 리더답게 나와 조금 결이 다른 걱정을 하고 있는지, 퇴근 준비를 하는 내내 이서호에게 여러 차례 언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시키느라 바빴다.
나는 원활한 방송과 이후 활동을 위해 정말 진지하게 연기 스탯을 올려야 하나, 고민했다. 예능에서 제일 필요한 건 역시 체력이었는데, 이건 포인트를 투자한다고 해서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논외.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체력은 메인 미션 클리어 시 업적 보상 개념으로 올라가는 게 전부였다. 메인 미션은 25%가 찼으니 아직 멀었고,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 체력이 오를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토크 위주의 예능을 고려해서 역시 연기에 투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연기를 잘하게 되면 뮤비 찍을 때도 도움 될 거고, 무대에서 표정 연기도 훨씬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여러모로 아이돌 활동에 도움 되는 스탯인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시험 삼아 죽어도 고 스킬도 좀 올려보고.
춤 스탯은 다음 앨범 전까지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일단은 연기에 투자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올려야지.
***
숙소에 도착하니 W라이브 방송 세팅이 한창이었다. 거실 테이블이 치워지고, 커다란 스크린과 삼각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 카메라도 한 대 있는 거 봐서는 자컨 용으로 비하인드도 찍을 예정인 것 같았다.
“요즘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는 신상 의류 브랜드야. 협찬 의상이 많이 와서 오늘 이거 입고 방송하자.”
코디 누나가 딱 봐도 폼이 커 보이는 봄 니트와 청바지를 건네줬다. 다들 색만 조금씩 다를 뿐 다 똑같은 옷이었다.
“저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올게요.”
누나한테 옷을 받아들자마자 거실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빠르게 내 정보창을 불러내 살폈다. 전체적으로 정보를 훑어보니 당연하게도 춤 스탯이 신경 쓰였다.
춤: A (1,812/2,500)
조금만 투자하면 올릴 수 있는데…….
가만히 남은 경험치를 노려보다가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뒤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춤은 느리긴 해도 경험치가 꾸준히 오르고 있으니까. 반면 연기는 올라갈 일이 별로 없어서 아직도 C+에 머물고 있었다.
연기: C+ (30/400)
연기 스탯을 어디까지 올려야 하나. 노래 스탯 올렸을 때랑 비교해 보면 B+ 는 조금 잘하는 수준이고, A-는 신인 배우 정도 되겠지?
포인트 투자를 안 하면 모를까, 어차피 투자하는 거라면 A- 까지는 올리고 싶었다. 그래야 포인트가 아깝지 않을 것 같아.
좋아! 간다!
나는 곧장 2,970포인트를 써서 연기 스탯을 A-까지 올려버렸다. 그래도 1,650포인트가 남았다. 이제 다음은 죽어도 고(F) 스킬 올리기.
<시스템: 죽어도 고 스킬 등급이 E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시스템: 죽어도 고 스킬 등급 상승으로 ‘유지 시간’이 소폭 증가하였습니다!>
쓰레기네.
내 상태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지는 스킬인 것도 어이없는데, 그마저도 ‘소폭 증가’했단다. 500포인트만 허공에 날렸네…….
아니야, 오히려 좋아.
이걸로 죽어도 고 스킬엔 굳이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명명백백히 입증되었으니…….
<시스템: 춤 등급이 A+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춤이나 올려야지. 헤헤.
[E급 진하온(19) - 아이돌]
체력: 120
매력: S (16/10,000)
노래: S- (94/7,000)
춤: A+ (0/5,000)
연기: A- (0/2,000)
작사: F+
작곡: F
남은 포인트: 462
소지품: 현재 소지한 아이템이 없습니다.
와아. 진하온 꽤 하네? 벌써 이만큼이나 올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흐뭇하게 내 스탯을 들여다보다가 밖에서 “하온아, 아직 멀었니?”하고 묻는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나가요!”
그나저나, 나가기 직전 거울로 확인한 옷핏이 영 별로였다. 무슨 애기가 형아 옷 빌려 입은 것 같은데……. 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 비춰봤지만 커도 너무 컸다. 사이즈 잘못 준 건가? 나가서 물어봐야겠다.
거실로 나가니 다들 옷을 갈아입고 나와 대기 중이었다. 내가 제일 늦었네. 그런데 이 형들 뭐냐……. 같은 옷 다른 느낌.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건가?
목 라운드가 워낙 통이 넓게 디자인된 터라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매도 손을 거의 덮을 정도로 내려왔다.
그 반면, 강현 형은 핏이 아주 조금 여유로울 정도로 딱 맞아서 멋있었고, 이서호도 오버핏으로 입혀 놓으니 오히려 몸이 단단해 보이는 게 의외였다. 유찬 형과 정이한도 좀 큰 감은 있었지만, 나처럼 남의 옷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누나, 저 옷이 좀 큰 것 같아요.”
“응? 어디 봐봐.”
코디 누나가 나를 살피더니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어울리는데? 이거 프리 사이즈인데 원래 오버핏으로 나왔어. 오히려 강현이랑 서호한테 좀 작은 거지.”
“저 소매도…….”
두 팔을 들어 헐렁헐렁한 소매를 흔들어서 보여줬더니 코디 누나가 크으으윽!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헛기침 몇 번 하고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나를 달랬다.
“아냐 아냐! 절대 큰 거 아니야! 팬들이 엄청 좋아할걸?”
“그래요?”
“그럼, 그럼!”
코디 누나가 가슴을 팡팡 때리면서 장담한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팬분들이 좋아하시는 거라면 대환영이지!
“알았어요. 누나 믿을게요!”
그 사이 정이한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이쪽을 서성이면서 나를 관찰했다. 이상한가? 나 안 어울려? 멤버의 시선으로 감상을 말해주길 기다리는데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하온아, 카메라 앞에서 상체 숙이지 마.”
“왜요?”
“그, 안에 보이니까…….”
뭐가 보인, 아. 통 넓은 라운드넥이라 숙이면 훤히 들여다보이겠구나. 강현 형처럼 멋진 복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열심히 숨겨야겠다.
“아……! 네, 그럴게요.”
우리 팬분들 눈 버리게 할 순 없지.
“하온이, 메이크업하자!”
“네!”
늦게 나온 탓에 메이크업도 내가 마지막 차례였다. 메이크업을 다 받고 일어섰을 즈음 W라이브 촬영 세팅도 끝났다.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 우리가 전달해야 할 정보들을 곱씹으면서, 소파 모서리에 섰다.
“카메라 테스트 먼저 할게.”
“네!”
매니저 형이 W라이브를 위해 세팅된 휴대폰 공기계 뒤로 이동하는 사이 내 왼쪽에는 정이한이, 오른쪽엔 유찬 형이 자리를 잡았다. 물끄러미 액정을 보던 매니저 형이 한숨 쉬었다. 왜 그러지?
“아니! 얘들아, 왜 다들 구석에 몰려 있어. 소파 중앙으로 와야지.”
어, 그러네. 상황을 보니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것 같았다. 구석에 자리를 잡은 내 양옆으로 유찬 형과 정이한이 붙고, 그런 우리를 따라 강현 형과 이서호도 소파 한쪽으로 쏠리다시피 앉아 있었다. 심지어 이서호는 소파 팔걸이에 기우뚱하게 기댄 채였다.
전생의 습관이 이 타이밍에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다들 나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느라 구석으로 쏠려 구도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혼자 웃어젖혔더니, 멀뚱멀뚱 날 보던 형들도 다 같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뭐야, 푸흐, 너 왜 웃어!”
“으하하핳! 우리 왜, 웃는 거야? 흐히히!”
“이유 모르면, 웃지 마!”
“웃긴, 데, 어떡해, 아하학!”
다들 웃느라 말이 뚝뚝 끊겼다. 매니저 형이 흐뭇한 미소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진정될 때쯤 자리를 다시 지정해줬다.
“아무래도 하온이가 중앙으로 와야겠다. 앞에 와서 앉을래?”
“네!”
“유찬이도 앞으로 오고, 강현이가 뒤에 서는 게 그림이 더 예쁠 것 같다.”
매니저 형의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찬 형, 나, 이서호 순서대로 앞에 앉고, 정이한과 강현 형이 뒤에 섰다. 카메라에 잡히는 구도를 확인한 매니저 형이 엄지를 치켜세운 것을 마지막으로 무사히 W라이브 방송 준비가 끝났다.
“처음 인사할 때만 이렇게 하고, 나중에는 편하게 자리 옮기거나 기대도 돼. W라이브의 장점은 자연스러움이니까.”
……어떡하지? 매니저 형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너무 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