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03화 (103/320)

103.

이서호의 습격 때문에 균형을 잃고 발이 미끄러졌다. 디디고 있던 바닥이 갑자기 푹 꺼져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바람에 물을 잔뜩 집어삼키곤 깜짝 놀라 발버둥 쳤는데, 이상하게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무, 물에 빠진 것 같아……!

본능적인 공포감에 허둥거리는 사이 보글보글하는 기포가 내 입에서 한 움큼 튀어나왔다. 이서호가 아직도 위에서 나를 누르고 있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디딜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맑은 공기가 폐부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허억, 콜록, 콜록콜록.”

“하온아!”

유찬 형이 내 양쪽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날 번쩍 들어 올려준 거였다. 물을 먹은 탓에 계속 기침이 튀어나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온아, 괜찮아?”

인상을 쓴 채 내 안색을 살피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이 단단하게 날 지탱해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두려움이 순식간에 떠밀려 내려갔다.

형의 팔을 꽉 움켜잡고, 침착하게 다리를 뻗자 그제야 두 발이 땅에 닿으며 발바닥 아래로 동글동글한 자갈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아……. 노, 놀랐어요.”

내 다리로 딛고 서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혼자 서 있자니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거세게 뛰어서, 천천히 나를 놓아주려던 유찬 형 팔에 딱 달라 붙어버렸다.

유찬 형은 카메라를 의식해서 나를 완전히 가린 뒤 굳은 얼굴로 이서호를 바라봤다. 한소리 할 것 같아서 얼른 형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잘게 고개 저었다. 유찬 형이 입을 다물자 놀라서 굳어 있던 이서호가 그제야 삐거덕거리면서 움직였다.

“지, 진하온, 괜찮아?”

“응. 괜찮아.”

“미안해……. 장난친 건데…….”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는 이서호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아니야, 내가 수영 못해서 순간 당황해서 그랬어. 놀래켜서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미리 얘기했으면 이런 장난 안 쳤을 테니 내 잘못도 있었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물에서 장난치고 노는 거, 해보고 싶긴 했다. 청춘 드라마 같은데 보면 꼭 나오잖아. 해변을 달려가 서로 바닷물을 끼얹기도 하고, 물에 빠트리기도 하면서 장난치는 장면.

“수영 배워서 복수해줄 테니까 기대해.”

일부러 장난스레 웃으면서 손바닥에 물을 담아 이서호 얼굴에 끼얹었다. 아직 미안함이 남았는지 처음에는 얌전히 받아들이던 이서호가, 이내 개구지게 웃으면서 받아치려던 때였다.

첨벙거리는 힘찬 물소리와 함께 정이한과 강현 형도 우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형들이 자꾸만 내가 괜찮은지 살펴서 민망함에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남은 체력 수치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서호의 습격으로 체력이 뚝뚝 깎여 나간 건지 고작 5밖에 안 남아 있었다. 나 진짜 놀랐나 봐. 분명 여유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된 거지? 빨리 나가야겠는데.

“일단 나가자.”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는지, 강현 형이 나를 부축하려는 듯 한쪽 팔을 꿰찬 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이대로 나가도 되나?

다 같이 즐겁게 노는 모습 촬영 중인 거 아니었어? 괜히 눈치 보여서 기장팀 선배님들 쪽을 살펴보니, 다들 멈춰서서 언제까지 놀 거냐고 묻는 듯 이쪽을 보고 계셨다.

“밖으로 나오세요! 엔딩 멘트 가겠습니다!”

피디님이 확성기를 켠 채 외쳤다. 물살을 가르며 계곡 밖으로 나가자마자 봉재범 선배님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우, 춥다! 우리 수건 좀 주세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수건이 내밀어졌다. 수건을 받아서 푹 젖은 머리부터 털어내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뽀송뽀송한 바디타올이 올라왔다.

“강현 형은요?”

“난 지금 딱 좋아. 시원해.”

“저도 괜찮아요.”

강현 형은 묵묵히 바디타올로 나를 돌돌 감싸고는 꽉 붙잡고 있으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그러더니 손으로 앞머리를 슥 빗어 넘겨 반듯하게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곤, 고개를 기울여 날 보고 웃는다.

이 형이 왜 나한테 끼 부리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왠지 야해 보여서 눈을 깜박거리다가 형과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뭔가 보면 안 되는 걸 봐 버린 느낌이야…….

강현 형은 혼자 만족스러워하면서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나만 괜히 부끄러워져서 바디타올을 꼼꼼히 여민 채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추덕수 선배님을 제외한 출연진들은 모두 바디타올로 몸을 감싸고 엔딩 촬영을 했다. 장시간 이어지는 촬영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오프닝 때 못지않은 텐션으로 토크를 이어나가는 선배님들을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래도 체력이 너무 바닥을 치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체력 마이너스 찍고 상태 이상 터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죽어도 고 스킬을 썼다.

스킬이 발동되자마자 몸에 활기가 돌면서 기운이 나길래 잔뜩 신나서 마지막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첫 예능을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선배님들 덕분이었다.

훈훈한 덕담까지 주고받은 뒤 촬영이 완전히 끝났다. 그러자 매니저 형과 코디 누나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젖은 수건을 걷어내고, 새로 가져온 두툼한 수건이 먼저 어깨에 둘렸다. 동시에 매니저 형은 손에 쥐고 있기 좋은 온도로 따끈하게 열이 오른 핫팩을 멤버들에게 나누어주느라 분주했다.

몸을 따듯하게 데우고 있을 때 봉재범 선배님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면서 오셨다.

“막내, 아까 물 많이 먹었어?”

“……아, 아뇨! 괜찮아요.”

그걸 또 보셨구나!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 뺨을 붉힌 채 헤헤,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최대한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봉재범 선배님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셨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을 찰싹찰싹 때려서 따가울 지경이었다. 거친 손놀림에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리고 있자, 봉재범 선배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온이 요 녀석 진짜 귀엽네. 다음에 런&런에 출연할래?”

“엇, 진짜요?”

런&런이면 무지막지하게 달려야 하는 예능이긴 했지만, 우리 같은 신인이 예능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 건 흔치 않았다.

불러 주신다면 당연히 해야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배님을 바라보자 봉재범 선배님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진짜고 말고. 내가 서 피디한테 디아스 캐스팅하자고 말해 볼게. 생각 있어?”

“그……!”

내가 대답해도 되나? 허겁지겁 유찬 형이나 매니저 형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그러잖아도 죄다 내 근처에 모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매니저 형이 재빠르게 나서서 명함을 건넸다.

두 어른이 사회 생활하는 사이 해가 지면서 급속도로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재채기가 터지자, 봉재범 선배님이 먼저 우리를 배려해 주셨다.

“애들 감기 걸리기 전에 따듯한 곳으로 데리고 가세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아닙니다, 선생님. 저희 애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뭘요. 다들 풋풋해서 좋던데요. 다음에 꼭 다시 뵀으면 좋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매니저 형은 팔을 딱 붙인 채 꾸벅, 허리를 숙여 정석에 가까운 90도 인사를 했다. 봉재범 선배님도 마주 인사한 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시며 멀어졌다.

“에취!”

나까지 재채기 대열에 합류하자 매니저 형이 분주해졌다.

“얘들아, 빨리 움직이자.”

“하온아, 이것도 너 걸쳐.”

정이한이 내 어깨에 제 수건을 걸쳐주려고 했다. 살짝 스친 정이한의 손이 너무 차가워 소스라치며 밀어내자 서운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형도 춥잖아요. 움직이면 괜찮아요.”

나는 체온을 올리기 위해 제 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빨리 가자고 정이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이한이 맑게 웃으면서 나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어! 같이 가!”

여전히 기운 넘치는 이서호가 힘차게 뛰어왔다. 유찬 형은 느긋하게 구는 강현 형을 잡아끌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 같이 오늘 촬영 진짜! 재미있었다고 왁자지껄하게 감상을 떠들면서 펜션으로 돌아갔다.

***

제작진분들이 직접 준비했다면서 전 출연진에게 저녁 회식을 제안해 왔다. 저녁 회식까지 예정된 스케줄이었는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배님들과 함께 저녁까지 먹은 뒤 헤어졌다.

그 덕에 8시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숙소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언제 스킬을 종료할지에 대한 문제뿐이었다.

지난번 강제 종료 패널티의 어마무시했던 여파를 떠올리면 당장 끄는 게 좋긴 하겠는데, 그러면 바로 상태 이상이 터질 게 분명했다. 다른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쳐도 호흡곤란이 문제였다. 그건 도저히 숨길 수가 없으니까. 확률은 1/6이지만, 그 1에 안 걸린다는 보장도 없고.

“어우, 길 엄청 막히네. 얘들아, 두 시간 좀 넘게 걸릴 것 같으니까 푹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네~”

어떡하지? 잠시 이것저것 따져보던 나는 그냥 여기서 스킬 해제를 하는 쪽으로 마음먹었다. 버티자니 언제 죽어도 고 스킬이 강제 종료가 될지 모른다는 게 영 불안했다.

더군다나 내일은 음방 사녹에, W라이브 첫 방송까지 있었다. 지난번 상태 이상 패널티는 무려 이틀이나 유지됐었다. 괜히 그때랑 비슷한 패널티 걸려서 며칠을 끙끙 앓느니, 호흡곤란 걸리면 어떻게 둘러댈지 변명거리 생각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한 형.”

“응?”

“저 너무 피곤해서 잘 건데,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응, 알았어. 나한테 기댈래?”

“그건 괜찮은데, 혹시 담요 있어요?”

정이한이 뒷좌석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담요 하나를 꺼내서 건네줬다. 나는 창가 쪽으로 몸을 아예 돌려 앉다시피 한 채 담요를 푹 뒤집어썼다.

그리고 멤버들이 잠들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떴더니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엔진음만 고요히 맴돌고 있었다. 다들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담요를 끌어 내려 동태를 살폈다.

앞 좌석은 전멸이고, 정이한도 등받이에 뒤통수를 파묻고 입술을 헤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지금이다.

죽어도 고 스킬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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