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벌칙 장소로 이동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역시 입수인가 봐. 괜히 유찬 형 신경 쓰이게 하기 싫으니까 표정 관리 잘하자. 그나마 다행인 건 신나게 뛴 직후라서 지금 무척 덥다는 거였다.
벌칙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승리 팀의 상품 수여식이 시작됐다. 상품은 한우 세트였는데, 잔뜩 흥분한 이서호가 숙소 가서 구워 먹자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촬영이 마무리되고 잠시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강현 형이 셔츠 넥라인을 잡고 펄럭거리면서 우리한테 왔다.
정이한과 이서호가 그 뒤를 따라왔는데, 나는 흔들리는 셔츠 밑단 틈으로 슬쩍슬쩍 드러나는 강현 형의 복근에 시선을 빼앗겼다.
몸 진짜 좋다. 나도 모르게 고개 숙여 편편한 내 아랫배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부러움을 멀리 보내버렸다. 운동할 체력까지는 없어. 게다가 난 원래 근육 잘 안 붙는걸. 내가 잘하는 거나 열심히 해야지…….
“형, 하온아, 미안.”
“뭐가 미안해?”
“……이겨서.”
유찬 형이 웃으면서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강현 형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유찬 형의 모습은, 정말 리더다웠다.
“벌칙 뭐인 거 같아?”
정이한은 우리가 받게 될 벌칙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계곡 입수 같아요.”
“와! 좋겠다! 시원하겠네!”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이서호와 달리, 정이한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무척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곡 차가운데……. 감기 걸리면 어떡해?”
“괜찮을 거예요.”
아직 남은 체력이 여유로웠기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도 좀 걱정되긴 하는데.”
“어. 신경 쓰이네.”
유찬 형이랑 정이한이야 항상 그렇다 쳐도, 이런 일에는 덤덤한 강현 형까지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진짠데, 상태 이상만 안 터지면 괜찮은데…….
“어? 그러네. 진하온 감기 걸리면 큰일인데.”
심지어 엄청 시원하겠다, 하며 헤실헤실 웃던 이서호까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화들짝 놀라서 나를 봤다.
“정곤 형.”
메이크업 수정을 마친 유찬 형이 매니저 형을 불렀다.
“응?”
“저희 벌칙 입수예요? 들은 거 있어요?”
“아니, 못 들었어. 유찬이랑 하온이가 벌칙 받는 거지?”
“네.”
“입수 같아?”
유찬 형이 눈짓으로 날 가리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온이 예상으로는 그렇다는데, 제 생각에도 입수 같아요.”
“혹시 모르니까 수건이랑 겉옷 준비해 둘게. 애들 갈아입을 옷 더 있죠?”
“네, 그럼요. 어차피 촬영 끝나가는 중이라 여유로워요. 애들 첫 예능 출연이라고 협찬 엄청 받아 왔거든요.”
코디 누나가 대답하자 정곤 형이 우릴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준비 완료.”
오, 든든해. 이걸로 다들 안심하겠지?
“벌칙……. 흑기사 안 되나.”
……안심은 무슨, 중얼거리는 정이한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중증인 모양이었다. 진하온 염려증이 아주 뿌리 깊구나, 정이한아.
“되겠어?”
강현 형이 고개 저으면서 정이한을 흘겼다.
“차라리 다 같이 들어가고 은근슬쩍 건져내.”
“아, 그럴까?”
“어. 도와줄게.”
“……형들, 저 계곡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그렇게 골골거리지 않아요.”
“골골거려.”
단호한 얼굴로 동시에 대답해오는 네 사람의 박력에 밀려 버렸다. 이랬는데 벌칙 입수 아니면 나 어떻게 되는 거지?
***
쓸데없는 걱정했구나, 싶을 만큼 내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넓게 깔린 자갈밭과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디아스 팀 벌칙은 시원한 발바닥 지압과 폭포 안마입니다!”
피디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기장 팀 선배님들이 호들갑 떨기 시작했다.
“이야, 내용만 들으면 벌칙이 아니라 상인데?”
“어이고! 부럽다, 부러워!”
“기장 팀 자체 벌칙 받으셔도 됩니다.”
피디님의 말 한마디에 너스레를 떨던 선배님들은 정색하면서 우회했다.
“아이고, 물이 너무 차가운데?”
“해 지면 쌀쌀해질 텐데 빨리해야겠다, 얘들아. 감기 걸리겠어!”
“어으, 한여름에도 들어가기 싫은 수온이다.”
“덕수 형은 여름에도 온수 샤워하니까 그렇죠!”
“아, 너희도 늙어봐. 뜨끈하게 데우지 않으면 씻은 것 같지가 않다니까?”
지금, 내 귀엔 그런 기장 팀 선배님들의 티키타카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오직 넓은 계곡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
열심히 표정 관리한다고 하는데, 긴장이 풀릴 때마다 자꾸만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수영 못 하는데. 물 들어가기 싫은데. 보기보다 수심이 깊으면 어떡하지? 불안한 마음에 유찬 형의 셔츠 자락을 꾹 잡아당겼다.
“왜?”
“형, 저 수영 못 해요.”
“못해?”
“네. 깊진 않겠죠?”
“아까 살펴보니까 그렇게 깊어 보이진 않았는데.”
유찬 형은 계곡을 쭉 훑어본 뒤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위험한 곳이었으면 애초에 벌칙 장소로 안 썼을 거야.”
“그렇겠죠…….”
그래도 영 안심이 되지 않아서 최대한 물을 안 보려고 노력하며 표정 관리에만 힘썼다. 그러던 와중에 봉재범 선배님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막내~ 형들이 못 뽑아줘서 미안해. 결국 입수하게 됐네.”
“아, 아니에요.”
“이한이가 하온이 뽑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추덕수 선배님이 추임새를 넣으면서 정이한을 향해 팔꿈치를 콕콕 찔렀다.
“누가 강현이랑 서호 주장했더라?”
“재범 형이었잖아요. 힘 좋을 것 같다고.”
“아! 여기서 그걸 밝히면 내가 뭐가 되냐~”
끝까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방송 분량을 만들어내는 기장팀 선배님들을 보며 애써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여기서 얼굴 굳히면 벌칙 받기 싫어서 표정 굳은 아이돌 되는 거다. 차라리 빨리 들어가서 끝내고 싶은데, 서두가 너무 길었다.
“저…….”
그때, 정이한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응? 이한이 왜?”
“하온이 대신에 제가 들어가면…….”
그 말에 선배님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반응을 보였는데, 정리하자면 전부 ‘그게 되겠냐?’는 뜻이었다. 안되는 거 알면서도 용기 낸 정이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어쩐지 찡했다.
“디아스 팀! 벌칙 수행하겠습니다!”
유찬 형이 손을 번쩍 들면서 끼어들었다. 우리를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유찬 형이 조끼를 벗어서 바위에 걸쳐두는 걸 보고, 나도 똑같이 벗어서 형의 조끼 위에 겹쳐 올렸다.
“하온아, 스트레칭 하자.”
“넵!”
일부러 더 경쾌하게 대답하면서 춤 연습하기 전에 항상 하는 대로 스트레칭을 했다. 기장 팀 선배님들이 박자가 딱딱 맞는 걸 신기해하자, 강현 형이 춤 연습하기 전에 하는 거라고 알려줬다.
“형아랑 같이 갈까?”
유찬 형이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형의 손을 맞잡으니 조금 안심되었지만, 몸은 여전히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수영 못 한다고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나도 참 이상했지만,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에 자처해서 몸 담그는 일은 목욕할 때밖에 없는, 천생 육지파니까.
유찬 형 말대로 깊지 않을 거야. 얕으니까 예능 벌칙 장소로 쓰이겠지. 그렇게 나를 달래면서 아주 천천히, 유찬 형을 따라 차가운 계곡에 발을 들였다.
맨발에 닿는 계곡물이 예상보다 훨씬 더 차가워, 순식간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오전보다 더 차가운 것 같아…….
“으악! 차가!”
유찬 형이 얼른 계곡물에서 발을 빼며 다리를 탈탈 털었다.
“얘들아! 한 번에 가자고!”
기장 팀 선배님들이 목소리를 높여 우리의 벌칙 입수를 응원해왔다. 잠시 심호흡한 유찬 형은 “갑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성큼성큼 계곡으로 들어갔다. 형을 졸졸 따라가다 보니 종아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너, 너무 차가워! 찌릿찌릿한 게 정말 농담 아니고, 혼절할 것처럼 차가웠다. 준비 운동 안 했으면 심장마비 왔겠어.
그래도 막상 들어오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서 마음은 편해졌다. 이쯤 되니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물이 좀, 아니. 무척 차가운 거 빼고는 아무렇지 않네. 이게 제일 큰 문제기는 했지만…….
“으, 발바닥 아프다. 하온이는 괜찮아?”
“저도 아픈데 참을만해요.”
자갈들이 발밑에서 굴러다니는 탓에 원치 않은 지압 효과까지 있었다. 벌칙에 뜬금없이 발바닥 지압이 있길래 뭔가 했더니 이거였다. 그래서 신발 벗고 양말만 신은 채 물에 들어왔는데, 넓적하고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폭포를 받아주는 웅덩이 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폭포를 향해 내디뎠다. 웅덩이는 그리 넓지 않아서 금세 폭포 앞까지 도착했다. 우수수 쏟아지면서 갈라진 물줄기에 형과 나는 순식간에 물세례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어 버렸다.
폭포 아래까지 들어가야 벌칙 수행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여기가 가장 깊은 곳일 텐데도 물은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숨 쉬는 게 좀 답답해졌지만, 발만 닿아 있으면 괜찮지.
“으아……!”
그나저나 물이 아니라 무슨 돌덩이에 두들겨 맞는 것 같네. 머리와 어깨에 쏟아지는 압력이 어마어마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자 물이 등짝을 갈기는 것마냥 쏟아졌다.
그 압력에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는데, 유찬 형이 얼른 팔을 잡아준 덕에 가까스로 이겨내고 상체를 바짝 세웠다.
“조심해.”
“네. 형도 상체 숙이지 마요.”
물이 자꾸만 눈에 들어가 연신 얼굴을 문지르면서 정면을 봤다. 이대로 10초를 버텨야 했는데, 5초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기장 팀이 다 같이 입을 모아 카운트다운을 외쳐주기 시작했다.
“3! 2! 1! 디아스 팀, 벌칙 수행 성공!”
봉재범 선배님이 목소리 높여서 외치자,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다 같이 우와아아아! 소리를 내지르면서 계곡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
왜 들어오지? 발끝만 담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도망친 추덕수 선배님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이 계곡으로 뛰어 들어왔다. 폭포에 두들겨 맞는 게 아팠기에 일단 유찬 형과 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기장팀과 마주치기가 무섭게 물 폭탄을 맞았다. 기장 팀 선배님들이 다 같이 손으로 물장구치면서 우리에게 물을 튀겨댔다. 유찬 형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한 손으로 넘긴 뒤,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동시에 나와 마주 봤다.
“하온아, 손 좀 잡아줄래?”
“네? 아, 네.”
한 손을 내밀자 형이 으응, 도리질 치며 다른 쪽 손도 요구해왔다. 두 손을 모두 내어주자마자 유찬 형은 기다렸다는 듯 물속으로 풍덩 잠수해 고개만 내밀고 발장구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물이 튀어 오르면서 기장 팀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이걸 하려고 손잡아 달라고 한 거야?
“푸흡, 아하하!”
덕분에 기장 팀 선배님들은 쉽사리 접근하질 못했다. 우리 쪽으로 열심히 물을 뿌려 댔지만, 상체를 튼 채 손만 허우적거려서 전부 이상한 곳으로 튀거나 내게 닿지 못했다.
“진하온!”
그때였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서호가 뒤에서 덥석 업히듯이 나를 끌어안은 채 체중으로 내리눌렀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린 나는 그대로 계곡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