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체력 회복!
예능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건 이쪽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나는, 형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생각해보니 형이랑 같이 움직이는 건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우리 중 체력이 가장 좋은 데다, 깃발도 벌써 세 개나 찾았으니까. 눈썰미가 좋아서 깃발을 잘 찾는 모양이었다.
내 초록색 깃발도 찾아주지 않을까? 무엇보다 같이 다니면 형이 몇 개의 깃발을 찾아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따 모여서 알려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장서는 강현 형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노란색 테이프가 둘러쳐진 구역이 나타났다. 저기 저 밖으로는 넘어가지 말라는 표식이었다. 테이프를 따라서 안쪽으로 돌아다니다가 높게 솟은 잡초 사이에 숨어 있는 초록색 깃발을 발견했다.
“형, 저 깃발!”
“가져와.”
뿌듯한 얼굴로 깃발을 뽑아든 나는, 한 손에 두 개의 깃발을 모두 쥐었다. 여기서 깃발을 분리하면 우리 계획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그냥 손에 쥐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달랑달랑 흔들리는 깃발들을 뿌듯하게 감상하다가 다시 깃발을 찾는 데 집중하며 매의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깃발을 수색하는 내내 강현 형이 손을 잡아주는 덕에 체력도 유지되어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20분이 흘러 1차 수색을 마치고, 어느새 기장팀에 합류할 시간이 됐다.
“형, 저 펜션으로 돌아가야 해요.”
“아, 지금 가?”
“네.”
강현 형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런데 안도하려던 그 순간, 급습하듯 옆구리 쪽으로 쑥 들어온 강현 형의 커다란 손이 내게서 깃발 두 개를 낚아챘다.
그리곤 곧장 빠른 속도로 경사진 산길이 평평한 아스팔트라도 되는 것처럼 단숨에 달려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차렸지만, 믿고 싶지 않아 그저 멍하니 카메라 감독님까지 따돌릴 정도로 빠르게 멀어지는 강현 형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형?”
형에게 닿을 리 없는 내 허망한 부름만 공허한 숲을 메웠다. 와중에 새소리는 왜 이렇게 맑고 예쁜지…….
“허…….”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가득 안고 터벅터벅 펜션을 향했다. 배신당했어……. 아, 물론. 형은 기장팀이 져야 나를 다시 데려갈 수 있으니 그랬겠지만, 그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막내야~”
펜션 입구에서 마주친 봉재범 선배님이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른 기장팀 선배님들은 아직인 것 같았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내 표정을 보신 봉재범 선배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신 것 같았다.
아까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봉재범 선배님은 “아, 고놈 영악하네.” 하면서 즐겁게 웃었다.
“그래서 결국 안주머니에 숨긴 하늘색 하나?”
“……네.”
선배님은 다음에 뒤통수 제대로 때리면 된다면서 나를 토닥여주셨다. 예능이 이렇게까지 약육강식이었나……. 보는 것과 하는 것은 천차만별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기장팀 선배님들이 속속 펜션으로 복귀했다. 다 모여서 찾은 깃발을 확인해 보니 초록색이 6개, 하늘색이 11개였다. 고작 하늘색 하나만 사수한 나는 또 미주알고주알 억울함을 토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찾았는데……. 뺏겼어요.”
나는 절대로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자, 강현 형이 하늘색 깃발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렸다.
“아니 근데, 동진 형은 뭐 찾는 거 쥐약이면서 어떻게 4개나 찾았어?”
“서호가 많이 갖고 있더라고.”
전동진 선배님은 전재규 선배님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눈으로는 나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 이서호가 비명 지른 이유가 이거였구나.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다는 거에 안심되기도 했고, 그 절절한 비명의 원인이 깃발을 빼앗겨서였다는 게 귀엽기도 했다. 그렇게나 몰입했어?
“우리 막내 복수는 형아가 했다.”
“고맙습니다!”
“후후. 나를 한 번 찬양해 봐!”
나는 열심히 선배님의 위대함에 대해 찬양했다. 내가 말하면 말할수록 전동진 선배님의 어깨가 점점 하늘 높이 솟았다. 으스대느라 허리를 잔뜩 젖히고 있어 납작한 배가 볼록 튀어나와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이었다. 전재규 선배님이 갑자기 몸을 바짝 낮춘 채 살금살금 전동진 선배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동진 선배님은 허리를 과하게 젖힌 채 하늘을 보며 웃으시느라 전재규 선배님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았다.
내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며 상황을 살피자, 전재규 선배님이 다급하게 손바닥을 휘휘 저으시면서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시키는 대로 다시 쫑알거리자 전재규 선배님이 조심조심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전재규 선배님의 재빠른 손이 볼록 나온 배 위로 안착했다.
“악!”
동시에 전동진 선배님이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둥글게 말며 몸을 수그렸다. 기습 공격을 당한 선배님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며 배를 때리고 튄 범인을 스캔했다. 슬그머니 도망치려던 전재규 선배님의 등 뒤로 스산한 목소리가 흘렀다.
“전, 재, 규, 야? 어디 가니?”
“응? 내가 뭘?”
시치미를 뚝 뗐지만, 전재규 선배님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슬금슬금 계속 거리를 벌리자 전동진 선배님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리 와. 좋은 말 할 때 오자. 응?”
“때릴 거잖아!”
“당연하지!”
전동진 선배님은 냅다 줄행랑치는 전재규 선배님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얼핏 100미터 경주 중인 육상 선수들 같았다. 펄쩍펄쩍 뛰는 두 분을 뒤로하고 우리는 피디님 앞에 섰다.
“깃발을 건네주시는 순서대로 게임에 참가하게 되며, 도전자 교체는 불가능합니다.”
“게임에 통과한 사람은 깃발 더 안 찾아도 되는 겁니까?”
“네, 통과한 분은 바비큐장에서 편안하게 식사하시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넘었구나. 식사라는 말에 게임 시작 전부터 밥은 먹이고 굴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시던 추덕수 선배님이 손을 번쩍 들었다.
“먼저 도전하겠습니다!”
추덕수 선배님에게 주어진 게임은 참참참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피디님의 손가락 작대기가 참참참 운율에 맞춰 흔들리다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선배님의 고개도 같은 방향이었다.
“안돼에에에! 내 점시이이임! 재범 형, 저 한 번만 더 해볼게요. 하나만 주세요…….”
“일단 우리 막내 하나 가지고.”
봉재범 선배님이 찾은 깃발은 세 개였다. 그중 하나를 내게 내어 주시다니…….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배님께 무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덕수는 기다려. 일단 도전합니다.”
봉재범 선배님의 게임은 훈민정음.
“난이도 최상 문제입니다.”
“아! 왜!”
“28번을 가져오셨으니까요.”
봉재범 선배님이 이를 득득 갈면서 소매를 걷어붙이셨다.
“아오, 진짜. 줘봐요.”
“5초 이내에 맞춰주시면 됩니다. 주변에서 도와주시면 반칙으로 간주해 경고를 받게 됩니다. 경고 3회가 누적되면 곧바로 이번 경기에서 패배합니다.”
피디님이 들고 있던 A4 용지를 뒤집었다. 그곳에는 ‘ㅂ, ㄹ, ㅌ’의 제시어가 있었다. ㅂㄹㅌ? 뭐가 있지? 버럭……탕? 버…….
“3, 2, 1. 탈락!”
“아! 비읍, 리을, 티읕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가 있는데!”
“많습니다.”
봉재범 선배님이 피디님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강도준 선배님을 봤다. 강도준 선배님은 “저도 몇 개 생각나는 건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문제에 이상 없음을 증명해 버리셨다.
“도대체 뭐가 있는데?”
“바리톤도 있고, 백린탄도 있고, 바람통.”
와. 역시 아나운서는 달라. 봉재범 선배님은 씁쓸히 실패를 인정했다. 그러더니 지체 없이 나머지 깃발 하나를 더 내밀었다.
“한 번 더 합시다.”
봉재범 선배님이 깃발을 내밀자마자 추덕수 선배님은 전동진 선배님께 깃발 나눔을 요청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도준 선배님도 나처럼 하늘색 깃발만 세 개 가져오신 터라, 이미 그쪽에 두 개의 초록색 깃발 중 하나를 나눠준 상태였다.
“묵찌빠입니다.”
짧지만 치열한 접전 끝에 봉재범 선배님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촬영 끝나서 퇴근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뻐하시는 선배님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강도준 씨, 게임은 젠가입니다.”
“……네?”
“젠가요. 저쪽으로 가셔서 하시면 됩니다.”
피디님이 오른쪽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강도준 선배님은 황당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젠가를 하러 갔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의 젠가 빼내는 기술이 아주 정교했다.
와, 게임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뭐가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네.
“그러면 저는 뭡니까! 도즈언!”
네 번째 주자로 나선 전동진 선배님이 호기롭게 깃발을 내밀자 1초 만에 “꽝입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선배님은 허망하게 흩날리는 깃발을 수납하는 피디님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 기회조차 없다니…….”
동시에 젠가가 와르륵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강도준 선배님의 비명이 들렸다.
“젠가 국대야? 왜 이렇게 잘해!”
저쪽도 실패네. 나는 성공해야지. 의지를 다잡으면서 피디님께 깃발을 내밀었다.
“하온 씨, 게임은 신조어 맞추기입니다.”
“와! 막내 성공하겠네!”
“크으, 꿀이다, 꿀!”
다들 내 성공을 예상하면서 기뻐했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신조어라니……. 잘 모른단 말이다. 전생에서도 게임하기 바빠서 영화, 드라마도 안 봤다. 내가 본 건 너튜브 뿐인데……. 그나마도 댓글은 잘 보지 않았던 터라 신조어랑은 거리가 멀었다.
큰일이다…….
“제시어는 스불재입니다.”
스불재? 그게 뭔데? 뭘 줄인 말인데? 머릿속이 멍했다.
“와! 쉽다, 이거 진짜 거저 주는 문제네.”
전재규 선배님이 나를 부러워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선배님께 기회를 드리고 싶네…….
스……프? 스프……. 불……고기. 재……, 제육……은 아니고. 점심 식사 배 게임이라 그런지 먹을 것만 생각난다. 흑…….
“막내 몰라?”
선배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궈지는 것 같았다. 민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전동진 선배님이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대더니, 그대로 빵 쏘자마자 옆으로 쓰러지는 시늉을 하셨다.
“기장팀 경고입니다.”
“으악!”
곧장 옐로카드를 치켜든 피디님의 말에 선배님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선배님의 행동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곱씹으면서 열심히 단어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권총, 빵 쏜다, 쓰러진다, 사람……. 이윽고 그럴듯한 말이 떠올라서 냅다 던져 버렸다.
“스나이퍼 불러서 재워버린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설마 정답인가?
“으하하하하하하하!”
“캬하하핰핳카핰!”
“아니, 으헉, 으햐햐햐!”
“…….”
그럴 리가 없지. 이거 아닌가 봐. 흑, 그럼 뭔데…….
“하온 씨, 탈, 푸흡, 흐윽, 끅, 흠, 험흠, 탈락!”
나 빼고 다 알아? 나만 모르는 문제였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게 나라냐. 말 좀 줄이지 마……. 신조어 만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