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93화 (93/320)

93.

“예능계에서 구르고 구른 기장팀이랑 예능 초보 디아스 중에 어느 팀이 이길 것 같아?”

“……아.”

기장팀에 제대로 붙으라는 의미겠지? 현재 스코어는 1:1이었다. 몸풀기 게임은 우리가 이겼지만, 첫 번째 본 게임은 기장팀이 이겼다. 체력적으로는 디아스가 유리하다고 해도, 예능은 체력 좋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디아스 멤버들을 배신하는 건 마음에 걸렸다. 꼭 데려 가준다고 했으니까 디아스 팀이 이길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펜션 주변에 계곡 있는 거 봤지?”

그 말에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예능의 대가인 봉재범 선배님도 입수 벌칙을 떠올리신 걸까?

“아직 물에 들어가긴 쌀쌀한 날씨잖아. 벌칙 계곡 입수일 것 같은데, 막내 물에 들어가고 싶어?”

“아니요!”

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선배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그러면 골라. 기장팀의 스파이가 될래? 아니면 확실히 기장팀이 돼서 이길래?”

내게 선택권이 넘어왔다.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확신에 찬 선배님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이번 게임 저희가 이길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나한테 다 계획이 있어.”

나는 선망의 눈길로 봉재범 선배님을 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다. 이번 게임에서 이기면 멤버 한 명 데려올 수 있을 거고, 그럼 체력 문제도 없는 거잖아. 나는 옹기종기 모인 네 명의 멤버를 흘끔 봤다.

이쪽을 힐긋대고 있던 정이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벙긋거리는 입 모양을 보니 “데리러 갈게.” 같은데…….

나는 울망거리는 정이한의 시선을 안간힘을 다해 외면했다. 미안. 나 이겨야겠어. 입수는 진짜 싫었다.

“기장팀의 막내가 되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열망을 꽉꽉 눌러 담아 대답하자 봉재범 선배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 깃발 찾으면 깃대랑 분리해서 깃대는 버리고, 천만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는 거야. 조끼 안쪽에 주머니 있는 거 확인했지?”

헐. 깃발을 분리하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다른 팀 깃발 찾아서 숨기는 것만 생각했는데…….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초록색 조끼 안쪽을 손으로 더듬으며 지퍼 달린 주머니가 있는 걸 확인하고 대답했다.

“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깃발을 다 찾아야 한다는 거야. 초록색뿐 아니라 하늘색도. 제한 시간 안에 못 찾은 깃발은 공수표 되는 거 알지?”

“네. 알아요.”

“처음에는 1시간, 다음에는 30분 뒤에 모여서 가지고 있는 깃발 개수 확인할 거야. 너희도 이해했지?”

줄줄이 나오는 작전 계획에 그저 입만 떡 벌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재범 형, 미션 종류가 뭔지 모르니까 일단 1시간 뒤에 모여서 미션부터 해보는 건 어때요?”

“아, 그럴까? 그럼 1시간 뒤에 여기서 모이자.”

“네!”

선배님들, 계속 티격태격하시더니 이럴 때는 죽이 척척 맞았다. 우리 멤버들은 정직하게 할 것 같은데……. 역시 이쪽으로 붙는 게 맞는 것 같아. 예능이니까 배신도 좀 해주고 그래야지. 작전 회의의 끝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높게 울렸다.

동시에 모든 사람이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수색할 생각이었는데! 혼자 덩그러니 남을 순 없으니 나도 열심히 발을 놀렸다. 시작부터 망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

“헉, 헉.”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양쪽 무릎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땀방울이 뺨을 간지럽히며 흘러 턱 끝에 맺혔다. 손등으로 슥 닦아낸 뒤 허리를 폈다. 내 주변에는 담당 카메라 감독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펜션에 깃발 없는 게 사실일까? 아무리 돌아다녀도 깃발은커녕 깃발 비슷한 나뭇가지도 안 보였다. 아무래도 펜션에 숨겨 둔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무럭무럭 싹텄다.

“으아아악!”

“……아아악!”

“…………아악!”

갑자기 고막을 때리는 메아리에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이서호 목소리인데 어디서 뭘 하는 거지?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놀란 건지 궁금해졌다.

설마 다친 건 아니겠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카메라 감독님을 지그시 바라봤다.

“감독님. 서호 형, 다친 건 아니겠죠?”

감독님은 무전할 수 있잖아. 불안한 마음에 확인해 주세요, 하는 마음을 담아 감독님을 붙잡고 물어봤는데, 단번에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알지?

“출연진 부상이면 바로 연락이 옵니다. 조용한 거 보니까 다친 건 아니에요.”

“아!”

하긴, 저 비명이 다쳐서 나온 거라면 단순 타박상은 아닐 테니까. 이서호에 대한 걱정은 접고 다시 수색하러 움직이려던 때였다. 오른쪽 숲의 커다란 나무 뒤쪽에서 하늘색 천이 펄럭거리는 게 보였다.

“어!”

하늘색 깃발!

드디어 첫 번째 깃발을 찾았다. 혹시나 주변에 디아스 팀이 있진 않을까 해서 이리저리 살펴본 뒤 잽싸게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 뽑아버렸다.

촘촘하게 묶인 천을 풀고, 깃대는 다시 원래 위치에 꽂아뒀다. 그래야 나중에 제작진이 회수하기 편할 테니까.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다가 둘레길을 벗어나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걷는 건 조금 불편했지만, 걸을 때마다 올라오는 흙과 풀 냄새가 좋았다. 감독님이 불편하진 않을까 싶어서 뒤를 보면서 신경 썼는데, 감독님의 시선이 위쪽을 향해 있는 걸 발견했다.

감독님을 따라서 나도 고개를 올렸는데, 딱따구리가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이는 구멍에 초록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깃발!”

하지만 너무 높다. 혼자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은데. 나무 기둥을 붙잡고 열심히 점프해 봤는데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 뭔가 딛고 올라갈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적당한 높이의 번듯한 바위가 근처에 있어서 들어보려고 애쓰다가 포기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바위는 아무래도 빙산의 일각인 것 같다. 빠른 포기는 체력 보존을 위한 길이었다.

괜히 바위가 묻혀 있는 흙만 발끝으로 파보다가 아쉬움을 안고 나무를 올려봤다. 내가 딱 5cm만 더 컸어도 점프하면 닿았을 것 같은데…….

“……감독님.”

“네?”

“엎, 아니,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하마터면 감독님한테 등 밟고 올라가게 엎드려주실 수 있냐는 망발을 할 뻔했다.

나무 한 번 타봐?

내가 안 해봐서 그렇지, 하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높이 올라갈 필요도 없다. 아주 조금만 올라가면 충분히 닿을 것 같단 말이야. 일단 나무를 스캔한 뒤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웠다.

튼튼한 나무를 손바닥으로 짝짝 두들겨 경도를 확인한 뒤 길게 심호흡하면서 계획을 점검했다. 그런 다음, 양팔을 쭉 뻗어 나무를 끌어안은 뒤 솟아있는 투박한 나무뿌리를 밟고 올라갔다. 발끝에 감각을 집중해서 더듬더듬 내가 봐둔 옹이구멍을 찾아 걸쳤다.

여기까지만 올라왔는데도 의외로 깃발이 가까워 보였다. 손을 뻗어 보니 아주 조금 모자랐다. 여기서 점프하면 닿을 것 같긴 한데…….

“하온아!”

멀지 않은 곳에서 강현 형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외쳤다. 나무에 매달려 있어서 어디서 날 발견했는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일단 내 깃발부터 뽑고 확인하자. 나는 발끝에 힘을 준 채 반동을 이용해 뛰어올랐다.

목표는 오직 초록색 깃발!

손가락 끝에 닿을락 말락 걸린 깃대를 꽉 움켜쥐자 스르륵 뽑혀 나왔다. 바닥에 착지한 내 손에는 우리 팀의 깃발이 쥐어져 있었다.

“……진하온!”

“아, 형.”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깃발이 높은 데 있어서요.”

그 말에 강현 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호흡은 거칠었고,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이 형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구나. 그걸 증명하듯 허리춤에 하늘색 깃발이 세 개나 꽂혀 있었다.

“근처에 긴 나뭇가지도 많은데, 그걸 기어 올라가고 있어?”

“그……러네요?”

생각도 못 했다. 아예 높아서 안 닿았으면 도구를 이용했을 텐데,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어 사고가 좁아진 모양이었다. 진하온, 너 진짜 뇌청순 아이돌 등극하고 싶어서 작정했냐고…….

“무조건 안전제일. 부상 감수하면서까지 하려고 하지 마.”

“다칠 것 같진 않았어요. 헛디뎌서 떨어지더라도 다칠 만큼 높은 곳에 있던 건 아니라.”

“다들 너처럼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다치는 거야.”

할 말이 없다. 결국 나는 조심할게요,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

“그런데 형.”

“왜.”

“깃발 어디서 찾았어요? 저는 이거 처음 발견한 건데…….”

강현 형은 날 물끄러미 보다가 몇 가지 힌트를 투척해 줬다. 조금 전 내가 찾은 것처럼 나무 위쪽, 그리고 바위틈, 나무뿌리 밑동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했다. 확실히 내가 슬렁슬렁 다니긴 했네. 그냥 딱 보면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

괜히 뛰어다니면서 체력만 소모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천천히 다니면서 수색할걸.

“그런데 기장팀 스코어 알아? 무조건 우리가 먼저 통과해야 하는데 아는 거 있어?”

이글이글 빛나는 안광이 마치 춤출 때 강현 형 같았다.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한다고? 갑자기 배신하기로 결심한 게 미안해지는데…….

그래도 계곡 입수는 싫어. 차가운 계곡물에 머리까지 담그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수영은 정말 못 한단 말이야.

“각자 흩어져서 찾아보고 1시간 뒤에 모이기로 했어요. 그래서 아직 몰라요.”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앞으로 30분 남았네요.”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일단 알겠어.”

“형, 근데 이서호 봤어요? 아까 메아리 들리던데.”

“게임 시작하고 못 봤어. 나도 계속 이 근처에 있었거든.”

“아하.”

다시 가던 길 마저 가려는데, 강현 형이 좀처럼 내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감시하는 건가? 하늘색 깃발 찾아서 없애야 하는데 형이 붙어 있으면 할 수 없잖아.

“같이 찾자.”

그때, 강현 형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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