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얘들아!”
아, 매니저 형이잖아. 괜히 긴장했네…….
“하온이 운동해?”
매니저 형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애매하게 부엌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뜀박질하려던 자세로 멈췄던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면서 “아침에 조금씩……. 해보려고요.” 하면서 얼버무렸다.
“그래그래. 하온이는 다 좋은데 항상 체력이 불안해. 잘 생각했어. 다른 애들은?”
“서호랑 강현이는 욕실이고, 이한이는 방에서 머리 말려요.”
유찬 형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잘 속여 넘긴 것 같다. 유찬 형은 여전히 히죽거리면서 날 봤지만, 그래도 내 체면을 위해 입에 자크를 잠근 모양이었다. 고마운 형!
“그래? 그럼 애들 다 모이면 이야기해야겠다.”
“뭔데요?”
나와 유찬 형을 번갈아 보는 매니저 형의 광대가 자꾸만 움찔거리면서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걸 보니 좋은 소식인 것 같은데? 그것도, 아침부터 헐레벌떡 달려올 정도로!
“후후. 다 모이면 말할게.”
허어, 또 이러시네. 열려라 입. 좋은 소식이 뭔지 알려줘! 주문이라도 걸듯이 매니저 형의 입술을 뚫어지게 보면서 형 주위를 서성거렸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푸근한 얼굴을 한 형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 굴러다녔다.
“하온이 궁금해할 때마다 이렇게 옆에 와서 서성대는 거 너무 귀엽지 않아?”
“하온이는 항상 귀엽죠.”
유찬 형이 뿌듯해하면서 대답했다. 내가 그랬던가……?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행동을 지적받은 나는 벙찐 얼굴로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러자 매니저 형이 말해주지 말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안 이상 민망해서라도 그렇게 못 한다고. 나는 호기심 따위 내색하지 않는 쿨한 아이돌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표정을 관리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 안 되겠어. 궁금해! 좋은 소식이란 게 대체 뭔데!
이것저것 추리하다가 어제 올린 영상에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하루 만에 반응이 올 리가 없으니 고이 접어 두었다. 결국 매니저 형이 전한다는 좋은 소식이 뭔지 제대로 후보를 추리지도 못한 채 멤버들이 전부 모여 버렸다.
드디어 매니저 형의 입이 열렸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무려 두 가지나 있어. 먼저 너희 리얼리티 미션 통과한 거……. 보지 말라고 했지만 다들 이미 봐서 알겠지?”
“……아하하.”
머쓱한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만 몰랐던 것 같아 억울해지려는 찰나, 정이한이 내 귓가에 대고 “하온이 몰랐어?”하고 물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하온 넌 뭐 올리면 안 궁금하냐? 어떻게 안 봐? 나는 조회수랑 댓글이랑 계속 봤는데?”
안 궁금하다. 그런 거 계속 궁금해하고, 연연했다면 망돌 시절 못 버텼다. 하지만 이서호도 이해는 됐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잠깐 눈을 뗀 사이 혹시 한 명이라도 더 우리를 봐주지 않았을까, 기대하며 부단히도 찾아봤었다.
크게 의식해본 적 없었는데, 전생의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체념하는 법을 배운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지레 포기한 거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난 일이니 더 생각하지 말자.
“어? 잠깐. 이서호, 너 설마 댓글까지 봤어? 정 궁금하면 조회수만 확인하고 봤다는 얘긴 서로 안 하기로, 또 댓글은 절대 안 보기로 약속한 거 잊었어?”
유찬 형이 엄한 목소리로 이서호를 나무랐다. 맞아. 차트에 한 번 오른 뒤에 눈에 띄는 성적이 없어서 분위기가 조금 처진 적 있었다. 그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로 조회수나 차트 순위에 관한 이야기를 최대한 자제하기로 합의 봤었다. 소속사 방침도 그렇고, 멘탈 관리를 위해 당연히 댓글 및 서칭은 절대 금지.
“헙. 아! 진하온, 너 때문에 딱 걸렸잖아!”
내가 뭘. 나는 죄가 없어요, 하는 순진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웃어주니 갑자기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른 이서호가 고개를 픽 돌렸다. 나와 눈도 못 마주치면서 투덜대는 입은 잘만 살아있었다.
“아, 하 씨, 진하온, 진짜…….”
답답하네. 도저히 궁금해서 안 되겠다. 이따가 이서호를 은밀히 납치해서 왜 그러는지 캐물어야겠어. 그 전에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댓글 보고 멘탈 터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안 보기로 했잖아.”
“……하온이 말이 맞아. 좋은 댓글 천 개가 달려도 악독한 말 하나밖에 안 보이는 게 사람 마음이야. 그런 거 오래 남아. 괜히 찾아보지 마.”
정이한도 말을 보탰다.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듣다 보니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우울의 극한을 달리던 연습생 시절의 정이한이 떠올랐다. 혹시 예전에 받았던 아픔을 또 떠올리진 않을까 걱정돼서 힐끔 살폈는데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라는 건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백 번쯤 괜찮았다가 한 번 크게 앓게 만든다.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있을 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다가도 대뜸 코끝이 시큰거리며 서러워질 때가 있었다.
정이한도 그런 일을 겪게 될까 봐 걱정됐다. 잘 지켜봐야겠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 보이면 어떻게든 도와줘야지.
“얘들아, 나를 잊지 말아 줄래…….”
매니저 형이 오른쪽 손을 슬그머니 들어 올리면서 시무룩하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멋쩍게 웃으면서 매니저 형에게 진한 관심을 줬다.
“커흠. 너희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 회사는 데뷔 후 어느 정도 연차가 찰 때까지 반응 서칭 금지, 댓글 열람 금지 조항 아직 유지 중이야. 아티스트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지.”
조금 딱딱하게 말한 형은 우리를 한 명 한 명 다정한 시야에 담은 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는 이한이가 말했으니까 나는 더 말하지 않을게. 너희 믿어도 되지?”
그런 조항을 두고 있으면서도 휴대폰을 사용하게 두는 건, 우리를 신뢰하겠다는 회사의 목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매니저 형이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그러면 좋은 소식 이어서 전해줄게. 너희가 쪽지에 적은 ‘멤버들과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전부 하고도 남아돌 정도로 조회수가 찍혔어. 그래서! 소원 리스트는 적어 낸 건 일단 다 한다더라. 이번 활동기 끝나고 리얼리티 2탄에서 진행할 예정이야.”
“헐! 진짜요? 강현 형 해외여행 적었는데요?”
이서호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물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금방이라도 폴짝 뛰어오를 것 같았다. 해외여행의 주인인 강현 형도 은근히 기대 어린 눈으로 매니저 형을 봤다.
“그래? 나도 자세한 건 못 들었고……. 쪽지에 적은 내용 리얼리티 2탄 촬영 때 전부 다 실행할 예정이라는 것만 전해 들었거든. 강현이 말고 다른 애들은 뭐 적었는데?”
이제 리얼리티 끝나서 말해도 되나? 내가 적은 건 비밀로 부치고 싶은데. 흠.
“저는 별 보러 가고 싶다고 했어요.”
가장 먼저 쪽지 내용을 밝힌 유찬 형 다음으로 정이한이 “전 숲으로 힐링 여행이요.” 하고 말했다. 바로 뒤이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어트랙션 체험! 놀이공원도 대환영!” 외친 건 당연히 이서호였다. 강현 형이 적은 내용은 다들 아니까, 이제 남은 건……. 멤버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혔다.
나는 철저히 우리의 시청률과 팬분들의 재미만을 고려하여 공포체험을 적어 냈었다. 이건 아무런 정보 없이 당해야 리얼한 반응이 나올 텐데.
“저는, 음. 급하게 적어서 기억 안 나는데…….”
어쩔 수 없지, 시치미라도 떼보자. 대충 얼버무렸더니 이서호가 갑자기 짝 소리 나게 손뼉 친 뒤 말했다.
“맞다! 진하온 촬영 끝난 뒤에 급하게 적는 거 봤어. 그러게 진작하라고 했……었잖아.”
아, 또 부끄러워하네. 나는 뒷머리를 헝클이며 머릿속으로 진지하게 이서호 납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꼭 물어봐야겠어.
“그래그래, 너희 해외여행 보내주려나 보다.”
매니저 형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다 같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나 해외 나가는 거 처음이야. 해외 한 번 나가면 우리 소원 다 해치울 수 있겠네. 별도 보고, 숲속에서 캠핑 같은 것도 하고, 놀이공원이나 어트랙션 체험이야 당연히 할 수 있겠지. 어쩌면 내가 쓴 공포체험까지 아주 알뜰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예산이 그렇게까지 지원이 되나?
자체 리얼리티라서 예산은 전부 회사 자금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벌어오는 수입이라고 해봤자 쥐꼬리일 텐데 너무 많은 투자를 받는 거 아닌가 싶었다. 새 숙소, 앨범 제작비, 리얼리티 촬영까지.
그래서인지 정산받을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해서 흑자 전환 시켜드리고 싶다는 의무감밖엔 안 들었다. 실장님이 우리 밀어준 거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그리고 두 번째 좋은 소식. 내일 음방 스케줄 끝나고 너희 첫 W라이브 잡혔어. 계속 팬분들이랑 소통하고 싶다고 했지? 팬덤명 공모도 끝나서 오늘 중으로 최종 픽스 될 거야. 그러면 내일 팬덤명 발표랑 뮤비 천만 돌파 감사 인사하면 될 것 같, 아니지. 어제 영상 올린 뒤로 팍팍 올라가고 있으니까 이천만 감사 인사가 될지도?”
오, 드디어 우리 디아스도 팬덤명이……. 어? 잠깐만.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뮤비 조회수가 천만? 천만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분명히 20만 언저리였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정도로 조회수가 뛰지?
“형, 뮤비 조회수 천만이 맞아요……?”
“하온이 진짜 모니터링을 아예 안 했나 보네. 너도 참 너다.”
매니저 형은 되려 내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수치에,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 뮤비를 봤던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리얼리티 2회차 촬영이 있기 며칠 전이었던 거로 기억했다. 여느 때처럼 공부하듯 다른 아이돌 그룹의 활동 영상을 찾아보다가, 너튜브 알고리즘이 우리 뮤비를 띄워준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관심 없는 영상으로 등록하며 스치듯 본 기억으로는 분명 20만이었는데……. 공식 뮤비가 아닌 팬 메이드 영상을 잘못 보고 착각한 거였나?
“그게, 제가 봤을 땐 20만 정도였거든요…….”
상식적으로 올라 봐야 얼마나 올랐겠냐고. 그래서 당연히 지금도 20만 언저리, 많이 올라 봐야 30만 정도일 거라 믿고 있었다. 심지어 저것도 내 기준으로는 무척 큰 숫자라서 감지덕지했는데?
“뭐어? 20만?”
이서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응. 20만.”
“뭔 소리래? 설마 뮤비 뜬 첫날 확인하고 한 번도 안 본 거? 아니지, 첫날에도 이미 20만 훌쩍 넘겼었잖아.”
“어, 한 열흘쯤 전이었나……? 더 오래됐을 수도 있고. 뭐지, 분명히 20만… 이었는데.”
“열흘 전? 그때면 거의 500만 언저리에서 알박기 들어간 때였던 거 같은데.”
이서호가 기다려 보라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내게 스크린샷을 모아둔 앨범을 보여줬는데, 참 열심히도 찍어 모아놨다.
언뜻 댓글 창으로 보이는 스크린샷도 몇 장 보였는데, 결코 좋은 말만 있을 리 없는데도 참 열심히 찾아본다 싶었다. 교주랑 엮인 일에만 흥분하지, 이럴 때 보면 매사 무한 긍정인 것 같기도.
“자, 봐봐. 내가 매일 자정에 기록용으로 찍어 둔 거거든? 이날부터 봐도 이미 190만 대야. 진하온 헛똑똑이라니까. 상식적으로 우리 뮤비 조회수가 20만밖에 안 됐으면, 조회수 걸고 하는 미션을 시키셨겠어?”
그……렇구나. 비공식 팬 메이드 영상을 보고 착각한 건지, 조회수 자체를 착각한 건진 몰라도 기대를 너무 내려놓고 있었던 탓에 숫자를 단단히 잘못 본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천만은 커녕, 수백만도 감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숫자였다.
“진하온, 너무 낮잡아본 거 아냐? 디아스 나름 라이징 소리 듣거든?”
그러게, 우리 내 생각보다 훨씬 잘되고 있었구나……. 여전히 정신이 멍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솔직한 대답이 나와버렸다.
“내가 잘못 봤나 봐……. 관심 없는 영상 누르면서 힐끔 본 거라.”
“응? 하온이 설마 우리 뮤비를 관심 없는 영상으로 등록했어……?”
“에이, 설마. 아무리 서치 금지여도 그렇지.”
이서호가 유찬 형을 비웃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 조상님들의 지혜가 집약된 속담 무시하지 마라. 그리고 어차피 관심 영상 제외해도 채널 들어가면 다 보인다. 단지 알고리즘에 안 나올 뿐이지…….
차마 이서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갑자기 이서호가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리면서 내 어깨에 턱 하니 팔을 걸쳤다. 그러더니 내 상체를 확 수그리게 만들고는 머리를 막 헝클어트렸다.
“아! 뭐야!”
“이제 좀 진하온 같네!”
“난 계속 나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