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88화 (88/320)

88.

파일럿 예능 촬영이 코앞이라 한참 정신없는 김서준 피디에게 다가온 메인 작가가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피디님, 디아스 애들 제대로 터질 것 같은데요?”

동시에 톡으로 너튜브 링크가 날라왔다. 김서준 피디는 정연식 선배님의 촉이 이번에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구나, 생각하면서 곧바로 링크를 클릭했다.

세 개의 영상 중 가장 시선을 잡아끈 건 걸그룹 스칼렛 멤버 다섯 명의 뒷모습이었다. 디아스 채널 썸네일에 걸그룹이 걸려 있으니 이상했다.

‘스칼렛이랑 뭐한 거지?’

아직 데뷔 앨범 활동기도 안 끝났는데 벌써 걸그룹이랑 콜라보를 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연말 무대에서 일회성 합동 무대만 해도 싫어하는데, 갓 데뷔한 남돌이 그럴 리가 없지.

김서준 피디는 일단 보고 판단하기 위해 <[디아스] 스칼렛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mine’> 영상을 재생시켰다.

다섯 명의 멤버들은 카메라를 등진 채 가사에 맞춰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상이 재생되고 10초가 흐른 시점에서도 아직 클로즈업샷 한번 없었다. 꽤 떨어진 거리에서 찍힌 영상 속 멤버들은 동작을 딱딱 맞춰가며 걸그룹 군무의 진수만 보여주고 있었다.

‘디아스 애들이 여장한 거구나.’

김서준 피디의 입꼬리가 흐뭇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씰룩였다. 아니나 다를까, 15초가 지났을 때 멤버들이 동시에 몸을 돌려 얼굴을 드러냈다.

‘오.’

다들 진지한 얼굴로 임하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위화감이 적었다. 그래도 정면으로 보니까 확실히 남자는 남자였다. 개중에 긴 웨이브 머리 가발을 찰떡같이 소화해내는 독보적인 멤버가 한 명 있긴 했지만.

“이야, 쟤는 진짜 걸그룹 같네.”

심지어 요염한 표정 연기까지 찰떡이었다. 때마침 클로즈업 샷을 받은 영상 속 멤버, 진하온이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검지를 까딱거리는데, 스칼렛의 비쥬얼 멤버 루비에 비견될 충격적인 미모였다.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매혹적이라 김서준 피디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화면에 집중했다. 스칼렛의 음원이 그대로 나오는 걸로 봐서는 립싱크 중인 것 같은데, 꼭 직접 부르는 것처럼 표정 연기며 립싱크가 뛰어났다.

그런데 영상이 재생된 지 30초가 지난 시점, 배경이 갑자기 공원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잡음이 섞여들기 시작함과 동시에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은 ‘mine’의 흥행 일등 공신인 ‘집착광공’ 안무가 등장하는 대목이었다. 루비가 사피의 팔을 유혹적으로 쓸어 올려 목을 조이듯 감아쥔 뒤, 도발적인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면서 앞으로 튀어나오는 동작이었다.

루비 파트의 진하온이 사피 파트인 백강현을 상대로 안무를 하고, 백강현은 비웃음을 띤 채 그런 진하온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비주얼 합은 스칼렛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데…….

배경으로 깔리는 걸쭉하고 거친 남자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위화감에 현실 웃음이 터졌다.

와, 진짜 못 부르는데 열심히 불러. 어떡하냐.

“푸, 푸흐, 푸흐흡.”

딱 보니 랩퍼 멤버가 불렀나 보네. 심지어 원곡 키를 전혀 낮추지 않아서, 굵은 저음은 한 소절 한 소절 힘겨운 새 된 소리만 내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부르는 거야? 디아스 랩퍼 멤버면 정이한이나 백강현일 텐데, 다들 립싱크를 너무 잘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잡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는 동시녹음이었다. 일부러 잡음 제거를 하지 않은 게 분명해 현장감이 확 살아났다. 스태프들이 끅끅대며 웃음을 참아내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그런데도 멤버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유혹적인 얼굴로 열심히 립싱크하고 있었다. 여장을 벌칙 받는 것마냥 소화하는 일부 남돌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당연히 댓글 반응이 폭발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얘들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법 똘끼 있구나 오히려 좋아.

─ 저기 제일 작은 누나 제 취향인데 못 찾겠어요ㅠㅠ 그룹명이랑 이름 좀 알려주세요ㅠㅠ

┗ 디아스의 진하온이에요

┗ 디아스인건 알아요 여기 디아스 채널이자나요 그거 말고 저 누나 그룹이요 ㅡㅡ

┗ 디아스 진하온이라고 ㅂㅅ아

┗ ??

┗ 누나 아니라 형이라곸ㅋㅋㅋㅋㅋㅋㅋ

─ 00:31 여기서부터 걍 저항없이 처웃음

─ 레트입니다. 합격입니다.

┗ 감사합니다 형님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한앜ㅋㅋㅋㅋ 앜ㅋㅋ 우리 이한이 고음불가ㅠㅠㅠㅠᅟᅲᆿㅋㅋㅋㅋㅋㅋ

─ 홀홀,,할매는,,내..강아지,,,노래못불러두,,,사랑한데이,,,

댓글을 보던 김서준 피디는 스칼렛의 공식 팬덤인 “레트”가 댓글 창에 등판해 디아스 팬들과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현장을 보곤 흐뭇하게 웃었다. 아무리 웃겨도 원곡 가수의 팬덤이 불쾌감을 느끼면 실패였다.

디아스는 완벽한 의상, 메이크업, 거기에 곡 특유의 섹시 군무까지 제대로 재현했다. 선배 곡을 패러디하는 것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갖춘 셈이었다. 거기에 코믹 요소를 더한 후반부 반전 또한 노래는 엉망이었어도, 춤과 표정 연기만은 완벽했다.

‘이거 기대되는데.’

김서준 피디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다음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어지는 영상은 과거에 유행했었던 ‘똥밟았군’ 패러디 영상이었다. 다섯 개의 선이 쭉쭉 그어지더니 멤버들이 한 명씩 빈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박유찬, 경비원 정이한, 허리 굽은 할머니 백강현, 노란색 멜빵 바지의 이서호, 양복을 입은 진하온.

진지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멤버들이 눈을 감은 채 일 열로 쭉 늘어섰다. 멤버들이 눈을 뜸과 동시에 정이한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진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똥~”하고 첫 음을 끊었다.

‘목소리 되게 좋은데…….’

그런데 가사가 문자 그대로…. 똥이다. 정이한의 똥이 베이스에 깔린 상태에서 백강현, 박유찬, 이서호, 진하온 순서대로 화음을 쌓았다. 네 명이 부르는 ‘똥’이 겹겹이 쌓여 마침내 모든 멤버들의 화음이 어우러졌을 때였다.

[“밟았군.”]

다섯명이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영상은 진하온 솔로로 넘어갔는데, 배경에 깔린 노래가 멤버들이 직접 부른 아카펠라였다.

인상적인 건, 노래 분위기가 원곡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바빠 죽겠는데 가다 말고 똥 밟은 현대인의 진득한 애환과 분노, 괴로움이 녹아들어 있는 듯한 구슬픈 음색이라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했다.

그런데도 원곡의 멜로디가 살아있어서 디아스 멤버들의 보컬 실력이 엿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춤 역시 각이 딱딱 맞게 떨어지며 원곡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제대로 내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백강현이었는데 몸빼 바지를 입고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화려한 비보잉을 선보였다. 원작 구현에 충실한 영상과 구슬프고 환상적인 아카펠라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불협화음. 이거 웃어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 살면서 이렇게 감미로운똥은 처음이네요

┗ 어감잌ㅋㅋㅋㅋㅋㅋㅋ

┗ 똥은 죄가 없닭!

─ 웃어야 할지 소름 돋아야 할지ㅋㅋㅋㅋ

─ 0:11 수트진하온... ㅇㅇ걍죽어줄게 극락갈게

─ 눈 감고 노래만 들으면 천상의 하모니

┗ ㄹㅇㅋㅋ

─ 이거 똥말고 다른걸로 듣고싶다...ㅠㅠ

─ 0:41 ㅅㅂ백강현 비보잉하는뎈 복근 머선일이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할머니 3대 몇 치세요?;;;;

─ 0:36 서호갓기 유치원복이 이렇게 잘어울릴일이냐고 이서호 내가낳을걸.....

─ 그런데 얘네 이거 왜 하는거임? 아시는분?

┗ 리얼리티 미션인듯요!

┗ ㅈㅅ한데 이거 어디서 볼 수 있나요?

┗ 담주 월요일부터 1일 1화 공개요!

마지막 영상도 클릭했는데, 앞선 두 영상과 달리 재미 부분은 조금 떨어졌다. 가벼운 사복 차림의 멤버들끼리 숙소로 보이는 장소에서 느끼한 팝송을 부르며 끈적끈적하게 골반 돌리는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하여튼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챌린지나 패러디는 참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고 생각하며, 김서준 피디는 찬찬히 댓글 분위기를 살폈다.

─ 하온잌ㅋㅋㅋ 골반 돌리는데 서호 동공 같이 돌아감ㅋㅋㅋㅋ

─ 0:08 이서호 부끄러워하는거 개킹받냌ㅋㅋㅋㅋ

─ 이한이가 둘 사이 끼어드는 데 왜케 일상같지?ㅋㅋㅋㅋㅋ

┗ 기분탓임ㅎㅎㅎㅎ

─ 유찬오빠 약혼녀 두고 누구한테 청혼하시는 거예요 오빠는 진짜 최악이에...

┗ 이여자 끌어내.

┗ 나...박유찬... 그 뭐냐 사랑? 그런거 하는듯

─ 백강현은 골반돌리기의신이다 백강현은 골반돌리기의신이다 백강현은 골반돌리기의신이다

┗ 할매 현은 봄?ㅋ

┗ ㅇ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서온러가 이 떡밥을 좋아합니다

┗ 님 댓글 삭제좀 해주세요 애들도 볼 수 있는데...;;;

─ 얘네도 진짜; ㅌㅇㅅ 후발주자로 나온 애들이라 그런가 비게퍼 지리게하는듯ㅋㅋㅋㅋ

┗ 엥 그냥 애기들끼리 꽁냥꽁냥 노는거구만 그걸로 비게퍼니 뭐니 몰아가는거 얼척X

┗ 꽁냥꽁냥은 무슨ㅋㅋㅋㅋㅋㅋ소속사가 나서서 알페ㅅ로 장사질하는거구만

┗ ㅂㅅ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 ㅂㅁㄱ

팬서비스용으로 제작된 듯한 영상 취지에 맞게 이쪽 댓글 창은 거의 팬들의 댓글이 베스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개의 영상과 함께 뮤직비디오까지 인기 급상승 동영상 자리를 차지하며 조회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

원래 하루 안에 끝내야 했던 리얼리티 영상 촬영은 이틀 동안 이어졌다. 아무래도 선배님들 곡을 커버하는 거라서 퀄리티에 계속 집착했더니 촬영 시간이 자꾸만 길어졌다. 결국 매니저 형과 피디님이 일정을 조율해 주셨다. 덕분에 코디까지 완벽하게 갖춘 상태로 우리 마음에도 쏙 드는 영상을 뽑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이서호가 이상하다.

나랑 눈만 마주치면 슬금슬금 시선을 돌린다. 그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닿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서 파닥거리기까지 했다.

오늘은 예능 촬영이 있는 날이라서 데면데면하게 굴면 곤란한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서호! 일어나!”

오늘도 어김없이 유찬 형과 강현 형이 힘을 합쳐 비몽사몽 정신없는 이서호를 질질 끌고 나왔다. 눈을 반쯤 뜬 채 비비적거리면서 웅얼거리던 이서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이서호가 다리에 힘을 준 채 곧추서더니 “어, 어, 어! 나 일어났어!”하고는 허둥지둥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내가 저 잠보의 잠을 싹 달아나게 할 정도의 짓을 했었나?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네. 지난번에는 귓속말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랬다 치고, 이번에는 뭐가 문제지? 혹시 유찬 형은 알고 있으려나?

그때, 욕실로 사라진 이서호와 나를 번갈아 보던 유찬 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유찬 형.”

“응?”

“서호 형 왜 저래요?”

“어제 우리 촬영한 거 방송 나오면 알 거야. 피디님이 슬쩍 물어보신 게 있어서 확신하는데 분명히 내보낼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며 히죽히죽 웃는 유찬 형 덕에 궁금증만 더 커졌다. 몇 회차에 나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기다려……. 그냥 알려주면 안 되나.

“이따 예능 촬영가야 하는데 계속 저 피해서 도망 다니면 어떡해요?”

“내가 말해둘게.”

유찬 형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내 등을 팡팡 두들기면서 말을 보탰다.

“우리 막냉이는 아~무 것도 걱정할 거 없어! 형아가 다 해결해 줄게!”

갑자기 신뢰성이 수직으로 하락하는데?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유찬 형을 흘겨봤다.

그러던 와중 다급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형이 오려면 앞으로 한 시간 남았는데?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매니저 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형 이외에는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다. 멤버들도 전부 숙소에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본능적인 경계심이 치솟았다. 연약한 형들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프라이팬이라도 들고 있으려고 다급하게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얘들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