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
교주의 이름이 또 나왔다. 테오스 선배님들한테 준재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 멤버들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이미지로 통한다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었다.
“아, 모르겠어요. 실장님께서 방출됐다는 것만 알려주시고, 이유는 아예 말씀을 안 해주셔서……. 지금은 저희랑도 연락이 안 돼요.”
“그래?”
선배님의 반응을 보면 교주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소한 몸짓 하나도 놓칠세라 신경을 집중해 관찰했다.
“정말 모르겠어?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찬 형이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발끝으로 떨궜다. 선배님은 가만히 유찬 형의 정수리를 보다가 이서호를 향해 고개 돌렸다.
“넌?”
“……모르겠어요.”
쯧, 혀 차는 소리를 낸 선배님은 마지막으로 강현 형과 정이한을 차례차례 보며 “너희는?” 하고 물었다. 강현 형은 관심 없어서 모르겠다고 했고, 정이한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다.
“준재혁, 얼굴 잘났지. 학력도 좋지. 집도 잘 살잖아? 뭐 돈 좀 있는 집 자식이라며? 게다가 너희 메보였잖아. 메보가 데뷔 직전에 방출당할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나.”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우리 광신도에게 진실을 알리면 발작할지도 모르는데.
“인성 문제. 쓰레기였다는 소리 아니야?”
천하의 교주도 테오스 선배님들까지 사로잡진 못한 모양이었다. 유찬 형과 이서호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시원함도 함께 느꼈다.
도라이 선배님, 좋은 사람이었어!
“어쩌면, 하고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나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추측만으로 판단하고 결론 내리고 싶진 않아요. 이미 한 번, 실수한 적 있거든요.”
유찬 형은 말을 맺으며 지그시 나를 봤다. 나랑 있었던 일을 반면교사로 삼은 건가. 이미 내게는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유찬 형 마음에는 아직 미안함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저 형도 어쩔 수 없다니까.
“네 생각이 그렇다면 됐어. 서호 너는?”
“……저는.”
이서호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손등 위로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여전히 재혁 형의 동생이에요. 형이랑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과연 광신도 다운 대답이었다.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지만, 어쩐지 에둘러서 내게 ‘너는 형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충분히 아는데.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그럼 하나만 묻자. 너에게 디아스는 어떤 의미야?”
“너무너무 소중한 가족이에요. 형들도, 진하온도요.”
담담하게 묻는 선배님의 말에, 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던 이서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소중한 가족.
그 말이 발치에서 넘실거리던 불안을 멀리 날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 재혁이는 잊어. 나중에 디아스에게 피해 줄지도 모를 사람이잖아. 그런 상황이 와도 준재혁을 감싸고 돌 거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건, 피해를 줄 정도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힘없이 축 늘어진 이서호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감돌았다.
“일은 벌어지고 나면 늦어.”
“한 번만, 만나보고요. 만나서 얘기하면 마음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아무 말도 못 들었잖아요.”
선배님은 길게 한숨 쉬면서 고개 저었다. 그러다가 결국 헛웃음을 흘리면서 표정을 풀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살짝 벌어진 이서호의 입술 사이로 숨이 훅 내쉬어졌다. 보기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선배님은 특별한 액션을 취하지 않는데도, 공간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바락바락 대들진 않으니 엄청 난 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제가 언제요.”
“언제긴. 너 내가 그 자식 좀 쎄하다고 했을 때 ‘형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하고 소리 빽 치고 도망쳤잖아. 그 뒤로 나 설설 피해 다닌 거 모를 줄 알고?”
와, 어떻게 선배님 같은 목소리 톤에서 이서호 목소리가 나오지?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재수 없고 카랑카랑한 어조까지 쏙 빼닮았다. 성대모사의 달인이 여기 있었네!
“……그, 그, 제가 왜 그랬을까요?”
“뭐에 씌었었나 보지. 그건 이제 됐으니까 예전처럼 편하게 해. 언제까지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 할 거야?”
“……저 용서해 주는 거예요?”
“그럼 이 형아가 계속 화낼 줄 알았냐? 내 아량이 바다같이 넓고 깊은 것에 감사해라.”
장난기 섞인 웃음과 경쾌한 운율을 담은 어투에, 비로소 이서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응!”
해맑은 대답에 이서호를 보는 선배님의 눈동자가 따스하게 물들었다.
“그래그래, 이제야 좀 삐약이 같네. 가만, 새로 온 후배님이 뉴삐니까 넌 이제부터 원삐 해야겠다.”
“원조 삐약이?”
“응.”
“으하하! 그게 뭐야!”
순식간에 기가 확 살아난 이서호의 웃음소리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를 바꾼 선배님 때문인지, 이서호가 밝아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벤 안의 공기가 무척 따듯하고 아늑해졌다.
하지만 어쩐지 내게는 숙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주 중요하고, 어쩌면 내 선택 한 번으로 많은 것이 바뀔지도 모르는 숙제.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과거로만 치부했던 인물. 준재혁.
하지만 교주가 데뷔하고 나면, 예전에 이서호에게 말한 것처럼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여전히 광신도 기질을 보이는 이서호는 그와 재회하고 나면 어떻게 나올까. 지금처럼 나를 가족으로 봐줄까?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원망할지도…….
사람은 이따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원망할 대상을 찾아 화풀이하기도 하니까. 그것이 책임 전가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은 제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아니, 아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모르잖아.
***
디아스 멤버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가는 길, 도라이는 이서호를 떠올렸다. 여전히 준재혁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의 태도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도라이의 눈에 비친 준재혁은 음습하고 음흉한 성향이 꼭 김호채의 상위 호환 같았다. 호감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김호채는 머리가 나빠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대놓고 보이기라도 하지, 준재혁은 자신을 포장하는 게 아주 능숙했다.
게다가, 말하는 걸 가만히 듣다 보면 그를 향한 호감도와는 별개로, 묘하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처세술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곰곰이 곱씹어 보면 개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지만.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마치 머릿속에 들어와서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 같은 불쾌감을 자아냈던 터라, 도라이는 준재혁과 거리를 뒀다. 심지어 테오스 멤버들조차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좋은 사람 아니야?’하고 의아해하는데도.
처음 만났을 당시 14살이었던 이서호는, 보기만 해도 미소 지어질 만큼 깜찍한 애였다. 도라이가 연습생들을 삐약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전부 이서호 때문이었다. 작은 병아리 같은 녀석이 쫑쫑거리는 게 얼마나 귀여웠던지.
‘이제는 너무 커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엽단 말이야.
형아, 형아 하며 저를 잘 따르던 녀석이 틱틱대기 시작한 건 준재혁과 어울려 다니며 그에게 흠뻑 빠진 이후부터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따른다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준재혁만이 진리이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다 틀렸다는 듯이 굴었다.
‘실장님한테 대들 정도로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는데.’
한낱 연습생이 소속사의 결정에 반기를 든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아이돌 소속사와 연습생은 그 어떤 업계보다 가혹하고 명확한 갑을관계였다.
‘준재혁 그 새끼가 그렇게 행동하게 할 정도로 애를 망쳐놨다, 이거지. 아직도 기다릴 만큼.’
때마침 신호에 걸린 도라이는 검지로 핸들을 툭툭 두들기면서 신호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붉은색 신호가 꼭 준재혁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위험하니 이 이상 접근하지 마시오, 라고 말하는 듯한.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늘 만난 뉴삐는 첫인상부터 정말 느낌이 좋았다. 준재혁이 오고 나서 애들이 어딘가 이상해졌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한창 테오스의 팬덤이 커지던 때라 무척 바빴던 시기였다. 그래서 녀석들을 신경 써 주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좋은 애가 온 것 같네.’
삐약이들이 뉴삐를 지키려고 그 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김호채는 여전히 요주의 인물이었다.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미성년자인 뉴삐에게 애먼 짓을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면, 제대로 손을 뻗어 올 게 분명했다. 자신을 방패 삼으라 말했지만, 신인이 대선배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답은 하나인가. 애들이 빨리 크는 거.’
연예계, 특히 아이돌은 팬덤의 규모가 곧 파워였다. 디아스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품어주는 팬덤이 커져야 김호채를 밀어내기도 한결 쉬워진다.
신호등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도라이는 이내 블루투스 모드로 김혜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사이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 어머, 라이야~ 웬일이니?
“모르는 척하시기는. 귀국하자마자 디아스 애들 무대 보고 오라고 등 떠민 게 누구시더라?”
- 나였지~
김혜미 실장이 자신을 보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도. 김호채를 만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겠지만, 자신이 디아스 애들의 무대를 마음에 들어 하리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무대 위의 디아스는 반짝거렸다. 무대를 보는 내내 모두가 이 일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 그래서, 실제로 보니까 애들 어땠어?
“잘하던데요. 우리보다 나은 것 같아요. 위기감 느껴질 만큼.”
김혜미 실장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에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아직……이라는 건 언젠간 우릴 넘어설 거란 뜻인가?”
- 뭘 또 그렇게 곡해해서 듣니?
“으하핫.”
- 그래서 어때? 내가 좀 밀어붙여도 되는 걸까?
“실장님이 하라면 해야죠. 저희에게 결정권이 있나요~”
- 어머, 꼭 내가 강요한 것처럼 말한다?
김혜미와 통화하는 내내 도라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감돌았다. 6년 차로 접어든 만큼 멤버들과 재계약을 놓고 가볍게 의견을 나누는 빈도수가 꽤 늘어났는데, 그럴 때마다 모든 멤버들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재계약할 거야.’라고 입을 모을 정도로 지금 회사에 불만이 없었다.
그런 신뢰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은 김혜미 실장이었다. 그녀는 일에 있어 강요하거나 강압적이지 않았고, 언제나 아티스트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줬다. 가끔 하기 싫은 일을 받아 올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분명한 이유를 들어 모두를 설득해내곤 했다.
“아, 실장님.”
- 응?
“문라이트 김호채 이야기 들었어요? 새로 온 애기한테 관심 두는 것 같던데.”
- 뭐? 걔네 활동 끝났잖아? 그리고,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방송국 왔어?
“활동 끝났었어요? 전혀 몰랐네.”
도라이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김혜미 실장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애써 분노를 삭이는 김혜미 실장의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 아, 그 자식을 어떻게 조지지?
“워어, 실장님이 그런 거친 단어도 쓰세요?”
- 우리 애한테 껄떡대니까 그렇지! 어디서 그딴 더러운, 아으, 혐오스러워!
바퀴벌레를 발견해 기겁하는 사람과 다를 거 없는 말투였다.
- 김호채를 한 방 먹이긴 해야겠는데, 증거가 없네. 찌라시는 이미 몇 번이나 돌아서 효과도 없어. 그쪽 기획사에서 잘 막는 모양이더라고.
도라이도 희롱당한 사람이 누구인진 알지만, 그쪽 이미지에 타격이 클 거라 섣부르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한 거고.
“애들이 빨리 크는 수밖에 없네요.”
- 라이 네가 좀 업어줄 수 있을까?
“업어주고말고. 처음 생긴 후배님들인데, 저도 애들 맘에 들고요.”
- 라이야, 그럼 너 드라마 단역 하나 할래? 출연하는 컷이 얼마 안 돼서 촬영 기간이 짧거든. 너희 컴백 앨범 작업하기 전에 끝날 것 같은데.
도라이는 차세대 연기돌로 주목받는 멤버였고, 그런 만큼 들어오는 대본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도라이는 테오스 그룹 활동 이외에는 큰 흥미가 없었기에, 수없이 쏟아지는 극본을 대부분 고사해 왔었다.
그걸 알기에 김혜미 실장의 어조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아, 그쪽이 확실한가 봐요? 예능 쪽은 필요 없어요?”
- 예능도 잡을 거긴 한데, 이건 좀 놓치기 아까워. 승리한이 주연이거든. 알잖아. 흥행 보증수표인 거. 거기에 얼굴 비치면 좋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디아스 애들 까메오 출연시키는 조건으로?”
- 나 너무 속 보이게 말했나?
“하하, 한 입으로 두말할 순 없으니 해야죠. 촬영 언제부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