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80화 (80/320)

80.

삐약이…….

황당한 호칭에 잠깐 얼이 빠졌다가 “아니야?”하고 되묻는 말에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도라이 선배님은 한국계 미국인 2세랬다. 우리 직속 선배 그룹인 만큼 풀 네임도 확실히 외워뒀다.

에드워드 라이 도.

그러니까 초면에 삐약이라고 부르는 건 미국인 감성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아, 아뇨. 맞아요. 진하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응. 나도 반가워.”

분명히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는데 어쩐지 나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한테 찍히면 여러모로 난감할 텐데…….

필사적으로 방긋방긋 미소를 유지하면서 선배님을 마주 봤다. ‘저는 무해한 사람입니다.’ 어필하듯 머릿속으로 자기 세뇌를 열심히 하면서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이내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던 깊은 시선이 거둬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선배님이 이서호를 불렀다.

“서호.”

“네, 넵!”

기합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목청을 크게 높여 대답한 이서호가 제 목소리에 놀란 듯 두 손을 교차시켜 입을 가렸다. 눈치를 살살 보는 게 이서호답지 않았다.

“오랜만인데 형 반갑지 않아?”

“반갑죠! 완전!”

“그런데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제가요?”

나름대로 평정을 가장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쟤 진짜 연기 재능있는 거 맞나?

“뭐, 됐다. 알만하니까. 그보다 뉴삐야.”

……뉴삐는 또 누구야.

“너, 너.”

못 알아듣는 눈치이자, 이번에는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왜 뉴삐야? 이것도 미국식인가…….

“생각해 보니까 삐약이는 너무 창의력 없잖아~ 뉴삐약이는 너무 기니까 뉴삐.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이름을 잘 못 외우거든.”

어떻게 감히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한 채 네네,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선배님을 대하는 참된 자세다.

“뉴삐, 우리 회사가 왜 SR인지 알아?”

“아…….”

난감하다. 나 이거 모르는데…….

오디션 볼 기획사를 물색할 때, 여러모로 알아봤는데도 이것만은 끝내 알 수 없었다. 테오스 팬덤에서는 스타 라이츠 약자이지 않겠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잘 모르겠다.

“모르나 보네?”

미소는 부드러운데 왜 이렇게 압박감이…….

첫인상을 완전히 말아먹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소속사 회사명의 어원도 모른다니, 갓 데뷔한 신인 주제에 정신 안 차리냐고 혼날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혜미 실장님께 여쭤봤어야 했어. 놓친 건 내 잘못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슬쩍 시선을 돌리다가 유찬 형과 눈이 마주쳤다. 눈웃음짓고 있는 형은 그저 선배님을 방송국에서 만나게 되어 좋은 것 같았다.

“그래? 이리 가까이 와봐.”

선배님은 주변을 한 바퀴 슥 훑어보더니 내게 손짓했다. 옆으로 몇 걸음 옮겨가자 선배님의 팔이 어깨에 터억, 얹어졌다. 허리를 조금 수그린 선배님이 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귓가에 속삭였다.

“수란이야.”

“……네?”

“수란 몰라? 수란. 덜 익힌 계란, 쑤알.”

이게 그 유명한 부장님 개그인가? 나 이런 개그 하는 사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힐 뻔했을 만큼 재미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무조건 웃으면서 박수 쳐야 하는 거 맞……겠지?

너무 재미있다면서 온 힘을 다해 웃자, 갑자기 선배님이 표정을 싹 굳히셨다.

“농담 아니었는데?”

냉기 풀풀 날리는 얼굴과 목소리에 쩌적, 하고 공기가 얼어붙는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박수 치던 나는 그대로 굳은 채 눈꺼풀만 끔벅거렸다.

망했다, 선배님들한테 미움받을 거야…….

역시 사람 대하는 건 너무 어렵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쌓아본 적이 없는 게 문제다.

“형, 하온이 그만 놀려요.”

만면에 웃음기를 가득 띄운 유찬 형이 선배님을 만류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매섭게 날 보던 선배님의 분위기가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장난이야, 장난. 바짝 언 거 귀여워서 놀릴 맛 난다. 마음에 들어~”

선배님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슥슥 헝클어트렸다. 무대 콘셉트에 맞춰 섬세하게 세팅해 놓은 머리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정전기 때문에 여기저기 제멋대로 치솟아서 벼락 맞은 꼴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 농담 아니었어. SR은 수란의 약자야. 대표님이 수란 귀신이거든.”

“……정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회사 이름인데, 저렇게 하찮은 이유로 작명을 했을 리가……. 아니지. 그래서 어디에도 정보가 없었나?

“야야, 너희는 이런 것도 말 안 해주고 뭐 했냐~ 덕분에 나만 재밌었네.”

“아니,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말해요.”

“회사 어원이 안 중요해? 박유찬 그렇게 안 봤는데~”

편안하게 대화하는 유찬 형 덕분에, 티 안 나게 조금씩 선배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나는 얼른 형들을 따라갔다. 긴장해서 그런지 대기실까지 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대기실이 코앞에 보이자 집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대기실 앞에 매니저 형이 유독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면서 서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으니까 새삼, 진짜 무섭다.

“어! 정곤 형~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나와 있어요?”

선배님은 매니저 형과 구면인지, 형을 무척 살갑게 대했다. 분명 매니저 형은 테오스가 해외 투어 중일 때 입사한 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친해진 거야?

“진정이 안 돼서 나와 있었습니다.”

“에이, 나만 믿으라 했잖아요. 깔끔하게 떨궈주고 왔어요.”

뭐지? 이게 무슨 소리지? 소파남과 마주친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유찬 형이 말했나? 확인차 유찬 형을 바라봤더니 형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매니저 형한테 톡 보내놨었거든, 하고.

“정곤 형, 삐약이들 시간 되죠? 조용히 할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네.”

선배님은 대기실 문을 턱짓하면서 말했다. 외부인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인가? 우리가 쓰는 대기실은 좁고, 같이 쓰는 다른 기획사 아이돌 그룹들과 오가는 스태프 때문에 북적거렸다. 조용히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네, 됩니다. 벤으로 가실까요?”

***

주차된 벤에 올라탄 선배님은 운전석 헤드 뒤쪽에 긁힌 자국을 문지르면서 추억에 감겼다.

“캬, 여기 가죽 내가 긁은 건데 그대로네~”

기획사 연습생들의 출퇴근과 외부 스케줄을 책임져주던 벤은 테오스가 새 차량을 바꾸면서 남은 걸 굴리던 거였다. 그러다가 우리 디아스가 데뷔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쓰고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신인 때 타고 다니던 차 타니까 감회가 남다르네~”

우리는 추억 회상에 한창인 선배님을 중심으로 나눠 앉았다. 긴장한 탓에 다들 조용했다.

“응? 왜들 그렇게 긴장했어? 긴장들 풀어. 얼굴 뚫어지겠다.”

“형이 은밀히 할 말 있다는 식으로 겁주시니까 그렇죠…….”

유찬 형이 “우리 뭐 잘못했나 싶어서…….”하고 중얼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이서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두 손을 가지런히 양쪽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말없이 입을 앙다물고 있는 것만 봐도 지금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만했다.

“아, 그래.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문라이트 김호채. 그 쓰레기가 뉴삐한테 찝쩍거리고 있는 거 맞지?”

찝쩍거린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주 달갑지 않은 관심인 건 맞았다. 왜 그러는지 짐작도 안 되고. 그런데 날 싫어하는 쪽은 아닌 것 같아서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하던 유찬 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 새끼 손버릇 안 좋은 거 알지? 지 마음에 들었다 하면 남녀 안 가리고 껄떡대기로 유명하거든?”

아, 잠깐. 자꾸 연락하라던 게 그런 의미였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매력 스탯 때문인가? 역겹고, 소름 돋았다.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진짜 무조건 피할 거다.

최선을 다해 도망쳐다녀 주겠어.

그러면 형들이 아까 그렇게 나를 감싸고 돈 이유도 설마 이거야? 나 빼고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나만 몰랐어? 이건 또 이거대로 충격인데…….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나 보다. 왼손을 토닥여오는 온기가 느껴졌을 때야 내가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이한이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우리가 지킬 거야.”

“……형도 조심해요.”

정이한이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누가 날 건드리겠어.”

하긴, 정이한 첫인상이 매섭긴 하지. 그래도 원래 변태들 취향은 종잡을 수 없는 거니까. 다시 한번 주의를 건네려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는 나름 조용히 말한다고 속닥거렸는데, 선배님이 우릴 보면서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그런데 하온이 아직 어린데 정말, 그런 거 맞아요? 좀 이상해서 저희가 필사적으로 막기는 했는데…….”

“나 믿냐?”

“믿죠.”

“그럼 믿어. 그 새끼 변태 자식이니까. 그러니까 박유찬.”

“……넵.”

“아쉬워했네, 미안해했네 하면서 여지 주는 식으로 거절하지 마. 앞으로는 확실히 연락 못 할 것 같다고 말해. 그래도 돼. 아니, 그렇게 대처하는 게 맞아.”

“하지만, 저희 입장 상 그러기가 어려워요.”

맞아. 우리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심지어 인지도도 낮은 데다, 한줌단 팬덤이라 문라이트랑 척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때도 무조건 참았던 거다.

지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마주치지 않도록 피하는 게 전부였다. 오늘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면 답이 없지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우리 후배님들 안 된다고 확실하게 말했으니까. 뭐라고 하면 내 핑계 대.”

“그래도 돼요? 저희 때문에 괜히 형들한테 피해 가면…….”

선배님은 우리를 향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일 없어. 그 새끼 나한테 약점 잡힌 거 있거든.”

아! 그래서 그렇게 순순히 물러난 거구나. 원래 테오스의 리더 도라이는 팬들이 ‘또!라이’ 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골때리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난 동족 혐오인 줄 알았지……. 그런 사람과 선배님을 비슷한 부류로 오해했다는 게 미안해졌다.

“그런데 이거 공개를 못 해. 나도 목격한 게 전부라 확실한 물증이 없거든. 그 새끼도 알아. 알지만, 내가 워낙 또라이로 유명하잖아? 도라이라면 훼까닥 돌아서 폭로하고도 남을 놈이다 싶으니까 입 다물고 물러선 거야. 증거는 없어도 증인이 있으니까.”

선배님은 유찬 형한테 거듭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당부한 뒤에야 나를 봤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거로 보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얌전히 기다렸다.

선배님은 길게 숨을 내쉰 뒤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곤 입을 열었다.

“뉴삐야. 너. 잘 생각해. 그 자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한테 연락할 놈이니까, 혹시 불러내도 절대 나가지 마. 네가 그런 놈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괴로워하는 걸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거. 그게 멤버들한테 가장 큰 상처고, 피해야. 알겠어?”

“네……!”

기세에 떠밀려서 엉겁결에 대답했지만, 나도 부른다고 쪼르륵 갈 생각 없다. 내가 미쳤다고 나가? 아무리 협박하더라도 나는 꿋꿋하게 버틸 거다.

무엇보다 형들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걸 안다. 그러니 지뢰인 거 뻔히 알면서 밟을 생각은 없다.

“그래, 뉴삐 너 꽤 똘똘하네. 안심해도 되겠어.”

선배님은 마치 내 속내를 읽은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멤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춘 뒤 폭탄 발언을 했다.

“그런데 재혁이는 어떻게 된 거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