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이한아! 이한이도 이리 와!”
정이한이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한테 합류했다. 내 등 뒤에서 긴 팔을 쭉 뻗어서 나와 유찬 형을 한 번에 끌어안는다.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쳤다.
이건……. 지하철에서 낑겼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걸?
그와 동시에 거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서호가 튀어나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헐레벌떡 뛰쳐나온 이서호의 입가에는 치약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칫솔을 입에 문 채로 검지로 제 휴대폰 액정을 가리키며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우리 차트 드러가써!”
셋이 옹기종기 뭉쳐 있는 우리를 보고는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다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아르르르, 소리를 내며 치약 거품을 헹궈내고 나왔다. 얼마나 대충 헹궜는지 치약 거품이 입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들 이미 봤구나아!”
이서호까지 알았으니 마지막은 강현 형인가. 머리 말리러 들어간 강현 형이 떠올라서 큰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서호, 서호야, 잠깐……!”
정이한이 갑자기 주춤거리면서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서호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싸한 촉에 고개 돌린 순간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날다람쥐처럼 팔다리를 펼친 이서호의 배였다.
“이얏호오!”
“커헉!”
“악!”
“윽!”
이서호의 점프 공격에 우리는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정이한이 내 밑에 깔리고, 내 등 위로는 유찬 형과 이서호가 포개져 있었다.
“아으, 내 꼬리뼈…….”
미리 알았으면 도망가지 왜 내 밑에 깔린 거야, 도대체…….
“이서호, 다치면 어쩌려고 대책 없, 헉. 야! 너 치약 묻은 걸 어디다 닦아! 야! 이서호!”
유찬 형이 내 위에서 발버둥 쳤다. 상황은 이해하지만 비켜주세요. 정이한 죽겠어. 잠깐 사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정이한이 컥, 컥 막힌 숨을 내뱉었다.
“둘 다 내려가요. 이한 형 죽겠어요!”
“앗, 미안.”
이서호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유찬 형은 일어나자마자 옷을 끌어당겨서 등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정이한한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면서 힐끔 보니 유찬 형의 등 한복판에 치약이 묻어 있었다.
“유찬 형, 갈아입어야겠네요. 뒤에 치약 묻었어요.”
“아오, 이서호!”
“미안해…….”
이서호가 두 손을 번쩍 들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아서 사과하는 걸 보니 잘못한 건 아나 보군.
그때 내 손을 잡고 일어난 정이한이 갑자기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윽.”
“이한 형?”
“으, 응.”
“왜 그래요? 아파요?”
“좀 세게 부딪혔나 봐.”
정이한이 꼬리뼈를 문지르면서 어설프게 웃었다. 속없이 웃는 거 보니까 괜히 뚱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 봤으면 피하지 왜 그대로 있어요? 위험한 줄 알면서.”
“나 피하면 하온이가 깔리잖아.”
“……그, 래도.”
정이한, 생존 본능 일 안 하나? ‘내가 깔리든 말든 일단 피하고 봤어야죠.’ 하고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저대로 자빠졌으면 체력 손실이 어마어마했을 것 같긴 하니까.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다칠 거 알면서 피하지 않은 미련함에 속이 끓기도 했다.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정이한은 살포시 웃으면서 별것 아닌 양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정이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구원 스킬을 발동시켜 봤다. 이런 부상도 치료해 주나?
스킬 사용과 동시에 체력이 3% 정도 빠져나갔다. 찰과상 같은 것도 상태 이상에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신기하다.”
“뭐가요?”
“하온이가 손 꼭 잡아주니까 안 아파.”
“……기분 탓이에요.”
온순하게 웃는 정이한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예쁘기만 한데, 이서호는…….
이서호한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미 유찬 형한테 절찬리에 혼나는 중이었다. 멤버들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대책 없이 뛰어드느냐, 아파트에서는 항상 층간소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냐, 씻으러 갔으면 제대로 씻고 나와야지 등등.
이서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시무룩해지는 걸 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정이한이나 챙겨야지.
“저희는 아침이나 먹어요. 제가 차려줄게요.”
“어? 아니야! 진짜 괜찮아!”
“……왜요!”
“힘들잖아……. 그, 먹고 싶은 거 말하면 내가 해줄게.”
정이한이 팔을 걷어붙이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이거 정말 서브 미션 패널티 때문인 거 맞을까? 서브 미션 패널티가 이렇게 다른 사람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리는 없을 텐데?
“저도 배우면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쉬운 것부터 배울래요. 형, 도와주실 거죠?”
이러면 거절 못 하겠지. 정이한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거절의 말을 뱉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계란후라이부터 해볼래?”
“좋아요!”
정이한에게 주의 사항을 꼼꼼하게 듣고 계란후라이에 도전했다. 하지만 내 첫 번째 계란후라이는 왜 그런지 스크램블에그가 되었는데, 계란을 깨다가 들어간 껍데기가 아주 맛깔스럽게 토핑되어 있었다…….
이거 언제 들어갔냐.
씹을 때마다 아작아작 씹히는 게 아주 별로였다. 미간을 찡그리고 있으니 정이한이 달걀 껍데기는 칼슘이라 먹어도 된다면서 위로해줬다. 고등어는 회로 먹을 수 있으니 덜 익어도 괜찮다고 위로해줬을 때 이서호의 기분이 이랬겠구나, 깨달았다. 내가 한 건 위로가 아니었어.
일단 계란후라이부터 정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나는 요리에 대한 의지를 다잡으면서 정이한의 말따마나 칼슘 덩어리인 계란후라이를 꿀꺽 삼켜서 넘겨버렸다.
***
아침부터 정이한이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은 정말 맛있었다. 계란후라이 연습하느라 열 개 정도 만들어 먹은 탓에 많이 못 먹은 게 아쉽다. 멤버들한테 망친 걸 먹일 순 없으니까 나 혼자 처리한다는 게 그만 배가 찰 때까지 먹어 버렸다.
그래도 자꾸 무리해서 먹어주려고 하던 정이한도 무찔렀고, 연습 덕분에 계란후라이는 완벽하게 정복했다! 정이한이 맛깔나게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 위에 올라간 계란후라이는 전부 내 작품이었다.
다들 맛있게 먹는 걸 보니까 역시 뿌듯하네.
멤버들이 나와 정이한은 아침을 차렸으니 뒷정리에서 빼주겠다고 했다. 내가 한 건 일 벌인 것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뒷정리가 귀찮은 건 사실이라 기쁘게 받아들였다.
“저는 피디님 오시기 전까지 방에서 쉴게요.”
“어~ 이따 피디님 오시면 부를게!”
설거지 마무리를 하던 유찬 형이 고개를 쭉 빼고 대답해줬다. 강현 형도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려서, 정이한은 자연스레 심심해진 이서호에게 붙들렸다.
덕분에 방에 혼자 남겨진 나는 새로운 미션과 스탯을 확인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방에 거치된 카메라가 감시하듯 날 보고 있었다. 일상적인 모습을 가장해야겠는데?
화장실로 들어가 확인하면 깔끔하겠지만…….
역시 카메라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명색이 아이돌인데, 화장실에서 산다고 오해받으면 어떡해.
고심 끝에 나는 태블릿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태블릿을 올렸더니 아주 깔끔했다.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거려도 태블릿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메인 미션>
─ ‘나’를 찍는 카메라에 찍히기 (0/100%)
O 성공 시 500 포인트 획득
O 성공 시 신규 스킬 ‘예쁜 척’ 획득
O 실패 시 신규 스킬 ‘예쁜 척’ 획득 기회 영구 소멸
……예쁜 척?
나도 모르게 획득하는 스킬들은 있었는데, 처음 보는 스킬이 이렇게 메인 미션 보상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스킬 보상이 추가돼서 포인트도 무척 짜진 것 같고……. 어떤 스킬이길래 실패하면 영구 소멸한다는 거지?
스킬 설명을 요구해 보았지만, 시스템은 잠잠했다. 알아서 추측하는 수밖에 없나 보네.
나는 내 스킬들을 쭉 살펴보면서 스킬 이름과 설명을 다시금 확인했다. 지금까지 획득한 스킬명이 상당히 직관적이었던 걸 보면, 예쁜 척도 비슷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못 하는 애교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뭐 그런 걸까?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예쁜 척’하기 이런 식으로 말이지.
하지만 나는 이제 애교 안 할 거야…….
미니 팬미팅 때 뿌잉뿌잉을 시도했던 순간을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베개에 얼굴 묻고 이불 차는데 어떤 애교일 줄 알고 저걸 써.
게다가 대부분의 스킬이 전부 하등 쓸모없었으므로…….
아니, 아니지. 그러고 보니 의외로 조금씩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구원도 안 쓴다고 했는데 요긴하게 썼고, 엿보기 스킬도 멤버들 장점을 알아내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줬고, 죽어도 고는 비상시에 상태 이상을 미뤄줄 스킬이니까.
데우스의 취향이 이백 퍼센트 반영된 돌림판은 영 쓸모없었지만, 이거 빼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스킬도 의외로 쓸모 있을지도.
어차피 메인 미션은 해야 하는 거니까 획득하고 보면 되겠지. 메인 미션 조건이 ‘나’를 찍는 카메라라고 했으니까 리얼리티 거치 카메라도 인정되려나?
방에 설치된 카메라는 전부 나를 찍고 있었는데, 메인 미션의 경험치는 0%에서 미동도 없었다. 패드로 내 사진을 찍어 봤지만 여전히 0%였다.
요구량이 많아서 0%인 건지, 조건이 따로 있는 건지 확인해야겠네.
일단 지금은, 내 정보 확인부터!
[E급 진하온(19) - 아이돌]
체력: 120
매력: S (13/10,000)
노래: A+ (1,871/5,000)
춤: A (1,532/2,500)
연기: C+ (28/400)
작사: F+
작곡: F
남은 포인트: 4,620
소지품: 미미한 비타300x1, 미미한 박카스x1
아, 웃음이 절로 나오네.
포인트가 아주 넉넉해졌다. 연기는 아직 한 번도 안 찍었는데, 무대에서 하는 표정 연기도 인정해 주는 건지 확인할 때마다 아주 미미하게 경험치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노래 스탯이다. 지금 노래를 S-로 올려도 무려 1,491포인트가 남는다. 메인 미션을 빨리 깬 덕분이었다.
1,491이면 못해도 스킬을 두 단계쯤 올릴 수 있고, 연기 스탯에 투자한다면 B까지 올릴 수 있다. 춤까지 올리면 좋겠지만 체력 관리가 너무 중요했다. 연기와 스킬,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투자해야 했기에 남겨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쩌면 둘 다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노래는 못 참지!
<시스템: 노래 등급이 S-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전생에서도 도달해 보지 못했던 곳까지 올라갔다. 나는 곧바로 확인해 보기 위해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태블릿을 동영상 촬영 모드로 변경했다. 겸사겸사 메인 미션도 테스트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