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오늘은 종일 촬영을 했지만, 멤버들과 계속 함께한 덕분에 체력이 여유로웠다. 30이나 남아 있고 배탈은 가벼운 상태 이상 쪽에 속할 테니까 충분하겠지.
아니지, 갑자기 멀쩡해지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스킬 효과가 어떤 식으로 적용될지 미지수라 그냥 쓸 순 없을 것 같았다.
“형, 배 많이 아파요?”
“……아니, 참을 만해.”
핏기 가신 얼굴로 말해봤자 신뢰성 제로다. 일단 약부터 찾아서 먹이고 스킬을 써야겠다. 그러면 약빨 듣는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약 가져올 테니까 누워있어요.”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아픈 사람은 그런 걱정 하는 거 아니에요. 속상하니까 아프지 마요. 그러게 왜 국은 먹어서……. 먹지 말랬잖아요.”
“그, 그거 때문 아니야.”
“아니기는. 얌전히 기다려요.”
정이한의 목덜미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토닥 두들겨주자 이불을 더 끌어당겨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다. 눈만 내놓고 나를 보는데 진짜 귀여워 죽겠다.
나는 곧바로 큰 방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잠들었을까 봐 좁은 틈새로 얼굴부터 빼꼼 밀어 넣었는데, 둘 다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유찬 형.”
“응? 아직 안 잤어?”
유찬 형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면서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소화제나 진통제 있어요?”
“어디 아파?”
손님이 나라는 걸 확인한 뒤 신경 끄고 있던 강현 형도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저 말고 이한 형이 배탈 났어요.”
“에고, 그걸 다 먹더라니…….”
무의식중에 솔직하게 말한 유찬 형이 “헙.”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도망치듯 거실로 나갔다.
나도 내가 원인인 거 알아…….
시무룩해진 내가 유찬 형의 뒤를 터덜터덜 쫓았다. 형은 거실 TV장 아래에 있는 선반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구급상자가 여기 있었군.
“아, 다행이다. 여기 있네.”
응? 형도 지금 안 건가?
“정곤 형이 꼼꼼하게 챙겨뒀나 봐. 이사 와서 없을까 봐 걱정했거든.”
“아.”
“약 있어? 사러 나가야 해?”
강현 형이 겉옷을 들고나왔다.
“있어. 안 나가도 돼.”
“어.”
유찬 형은 약을 손에 쥔 채 일어났다. 내게 안 주는 걸 보니 직접 가져갈 생각인 것 같았다. 스킬 써야 하는데 보는 눈이 있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형이 정이한을 보러 가는 걸 막을 명분도 없었다. 밤새워 간호하진 않을 테니 좀 기다렸다가 써야겠네.
“물은 제가 가져갈게요.”
“그래. 부탁할게.”
컵에 물을 담아 돌아가니 유찬 형이 침대에 걸터앉아 정이한을 살피고 있었다. 정이한의 손 위에 약을 꺼내 얹어주는 걸 보고 곧바로 물컵을 내밀었다.
“형, 하온아. 고마워, 미안해…….”
“미안하긴. 빨리 낫기나 해. 내일 무대 서야 하는데 아프면 어떡해.”
“나을게.”
겉옷을 방에 두고 온 강현 형이 문을 똑똑,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 약 먹으면 나을 것 같아.”
“……어.”
약을 삼킨 정이한은 다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하지만 눈을 감진 못하고 이불을 꼭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자꾸 형들과 나를 곁눈질했다. 이 상황이 불편한가 봐.
“유찬 형, 우린 비켜주자.”
“하지만…….”
“제가 볼게요.”
“아, 그럴래? 그럼 하온아, 혹시 이한이 계속 아프면 몇 시가 되든 상관없으니 나 불러. 알았지?”
“네. 그럴게요.”
“미안해. 이한이 좀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스킬 써주면 금방 털고 일어날 테니까. 형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한 뒤, 다시 정이한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신경 쓰여서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툭툭 닦아줬다. 뺨을 선홍빛으로 물들인 정이한이 눈을 내리깐 채 미안해했다.
“좀 자요. 옆에 있을게요.”
“응. 고마워…….”
“고맙긴요.”
잔다는 사람이 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날 보는지 모르겠다. 하긴, 아픈데 잠이 오겠어? 그새 이마에 땀이 또 맺혀 있었다. 한 번 더 땀을 닦아준 뒤 속으로 외쳤다.
정이한한테 구원 스킬 써줘!
<시스템: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조건이 뭔데?
<시스템: 대상과 직접적인 신체 접촉 시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접촉? 자연스럽게 접촉할 방법이…….
아, 그렇지.
여전히 날 보고 있는 정이한을 물끄러미 내려보면서 안심하라고 웃어 보였다. 그리고 예전에 정이한이 내게 해줬던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정이한의 두 눈 위에 얹었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이러면 게임처럼 뭔가 비현실적인 이펙트가 터져도 괜찮겠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시스템: 대상 ‘정이한’의 ‘상태 이상:배탈’을 회복하시겠습니까?>
응. 회복시켜 줘.
체력이 실시간으로 뚝뚝 깎여나가는 게 느껴짐과 동시에, 손바닥을 스치는 눈꺼풀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기다리다가 눈꺼풀을 깜빡이던 움직임이 멈췄을 즈음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정이한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른 숨을 내며 잠들어 있었다.
문제는 나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체력이 마이너스로 내려가 버렸다. 분명히 ‘대상의 상태 이상 정도’에 따라 요구되는 체력이 다르다고 적혀 있었는데,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걸 꾹꾹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건가.
나는 맹렬히 돌아가는 상태 이상 돌림판을 보면서 쓰러지듯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다행히 어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으니 오늘도 그렇게 잠들어도 이상해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30분짜리겠지? 그래야 하는데.
<시스템: 상태 이상 ‘두통’에 걸렸습니다.>
아, 이런.
머리를 헤집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입으로 베개 모서리를 앙 문 채 소리를 삼켰다. 혹시라도 정이한을 깨울까 봐, 내 모습이 카메라에 이상하게 잡힐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베개를 움켜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새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힘줄이 툭 튀어 나왔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팔과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신음을 삼키는 게 힘들어 어쩔 수 없었다. 하도 힘을 주고 있었더니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참아.
그동안 내가 필사적으로 상태 이상을 회피하려고 한 건 아이돌 활동을 위해, 아이돌로서의 내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멤버들이 날 걱정해 준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었는데, 이젠 아니다. 멤버들이 나를 왜 그렇게 과보호하는지 알았다. 소중한 사람이 아픈 걸 보니 마음 한켠이 콕콕 쑤시고 불편했다.
형들이 속상해하는 거 보기 싫어. 바보 같은 나는 반대 입장이 되어보고서야 형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정이한이 배탈 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속상한데……. 내가 고열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날 멤버들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지 알 것 같았다. 왜 그 이후로 과보호가 심해진 건지도.
멤버들에게는 항상 기쁘고 행복한 것들만 주고 싶으니까, 버틸 거야. 앞으로는 절대 상태 이상 들키지 않을 테다. 아니, 더 완벽하게 관리해서 상태 이상 터질 일 없도록 할 거다.
잠깐 사이 식은땀이 줄줄 쏟아져 온몸이 축축해졌다. 그래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온전히 30분을 버텨냈다. 두통은 상태 이상이 끝남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사라졌다.
30분짜리라서 다행이다.
잠시 누워서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이대로 잠들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졸린 눈을 비비며 체력 수치만 바라봤다. 이런 꼴로 멤버들한테 갈 순 없으니까 나 혼자 회복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데 무리 없을 수준까지 체력을 회복하고 난 뒤, 밖으로 나갔더니 소파에 유찬 형이 앉아 있었다.
“이한이는?”
“괜찮아요. 엄청 깊게 잠들었어요. 형도 가서 자요.”
“어, 다행이다. 너는 왜 그래? 땀 많이 흘렸네?”
유찬 형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날 보면서 다가왔다.
“좀 덥더라고요. 샤워 한 번 하고 자려고요.”
“……하나도 안 더운데? 하온이, 너 열 나는 거 아니야?”
“안 나요.”
내가 앞머리를 들어 올리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 있으니까 확인해도 된다! 이마에 손을 올려 체온을 확인한 유찬 형이 안도하면서 웃었다.
***
어제 샤워하고 잔 덕분에 내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여전히 곤히 자는 정이한의 안색을 확인한 뒤 먼저 씻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침 샤워를 끝낸 뒤 머리까지 싹 말렸을 때 정이한이 일어났다.
“이한 형, 아픈 건 어때요?”
“아주 좋아. 싹 나았어!”
정이한이 멀끔해진 안색으로 편안하게 웃었다. 깨끗하게 나아서 다행이다. 구원 스킬이 유용하긴 했지만, 부디 다음부터는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때마침 똑똑, 방문을 두드려오는 소리에 열어보니 강현 형이었다.
“이한 형, 몸은?”
“괜찮아!”
정이한이 평소보다 경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한이 괜찮대?”
“괜찮대.”
강현 형의 어깨너머로 유찬 형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들 걱정돼서 모여든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난 서호 깨우러 간다…….”
유찬 형의 목소리가 왠지 씁쓸하게 들렸다. 리얼리티를 촬영 중인 새로운 숙소에서도 아침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평화로운 아침이네.
나는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점검하면서 음악 어플을 켰다. 오늘은 멤버들끼리 아침 먹고, 10시부터 피디님 오셔서 미션 주신다고 했고. 오후에는 음방 라이브…….
<시스템: 메인 미션 완료! 보상으로 포인트 1,000이 지급됩니다!>
“어?”
실시간 차트에 우리 타이틀곡이 올라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98위였지만, 그래도 100위권에 곡을 올렸다. 메인 미션이 완료되었다는 게 확실한 증거인데도 왠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고침도 해보고, 어플을 껐다가 다시 켰는데도 여전히 98위였다.
“왜 그래?”
“형, 이거…….”
정이한한테 음원 차트를 보여주자 그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번 보고, 여러 번 눈을 깜박거리다가 또 보고, 손등으로 눈을 비빈 뒤 또 봤다.
“우리 98위인 거 맞아?”
“네, 이거 껐다가 다시 켠 건데 순위 그대로예요.”
“어? 뭐가 98위라고?”
이서호 때문에 지친 유찬 형에게 소식을 전해주자, 눈이 동그래진 형은 움직이다 말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농담이지?”
“진짜예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형에게도 어플을 보여줬다.
“허…….”
유찬 형은 길게 탄식하듯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붙들었다.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로 액정을 들여다보던 형이, 이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지금 형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아이돌을 쫓았던 형이다. 물렁물렁한 멘탈로 그동안 티만 안 냈을 뿐,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순간이 참 많았겠지. 우리 리더 형.
한참 들여다보던 유찬 형의 입가가 조금씩 당겨 올라갔다. 그러더니 햇빛처럼 눈 부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환하게 웃어 보인 형이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고는 기쁨에 벅차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됐다! 됐다고!”
듣기만 해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목소리에, 나도 유찬 형을 같이 얼싸안고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우리 더 올라갈 수 있겠지?”
기대감 어린 유찬 형의 질문에 나는 확신을 담아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럼요!”
여기서 만족할 생각 없다. 나는 멤버들과 함께 더욱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