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64화 (64/320)

64.

이서호가 왜 피했는지 알고 나니 안심되었다. 정말 화나서 도망쳐다닌 게 아니었으니 내가 사과해도 소용없었던 거고. 내 얼굴 보는 게 부끄러웠던 거라 나 없다고 안심한 거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네. 부끄럽다고 그렇게까지 날 피해 다녔다고? 괜히 사람 오해하게 말이야. 내가 뾰로통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하자 제 대답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서호가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내가 왜 미워하냐? 진짜 아니야. 오해하지 마라. 어?”

이서호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면서 필사적으로 말했다. 내가 계속 입 다물고 그윽이 바라보니 이서호가 말을 더듬거렸다.

“야, 야아. 진짜 오해라니까…….”

낑낑거리면서 우왕좌왕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서 도망쳐다닐 땐 속 상했는데 이제 마음이 다 풀렸다. 하지만 나는 웃음을 꾹 참은 채 시무룩한 척 대답했다.

“하긴……. 이해해. 원래 나 싫어했잖아.”

“야! 언제 적 이야기를. 아니야! 지금은 너 좋아해. 되게 좋아해. 진짜야!”

안절부절못한 채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하지 않고 뱉은 말이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이서호의 얼굴이 잘 익은 딸기처럼 변해갔다. 이럴 때는 진짜 귀엽다니까.

“윽, 조, 좋아한다는 건, 아, 그러니까. 그게.”

하긴. 이 녀석 의외로 부끄러움 많이 탔지. 내가 이해해야지.

“알았어. 이해했어.”

“……진짜냐? 오해 안 하지?”

“응. 그런데 서호 형.”

“엉.”

“내가 가까이 가면 부끄러워?”

고개를 기울여 이서호를 올려다봤다. 이서호의 미간이 좁아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커다란 손바닥이 내 얼굴에 턱 얹어졌다. 이서호가 내 얼굴을 꾹꾹 밀어냈다.

“어. 이것 좀 치워라?”

나는 메이크업을 지키기 위해 뒤로 크게 물러나면서 외쳤다.

“야! 나 메이크업!”

“흉악한 얼굴 들이밀지 마!”

“내 얼굴이 왜 흉악한데!”

“거울 좀 보고 살아라, 응?”

“매일 보거든?”

심지어 지금도 보고 있다. 무대 메이크업처럼 진하게 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메이크업 누나 눈에도 괜찮아야지. 혼나려나?

“많이 망가졌어?”

심각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이서호가 옆에서 꼼지락거린다. 기웃거리면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내가 들이미는 건 부끄러운데 네가 하는 건 괜찮냐?

“유찬 형! 하온이 메이크업 좀 봐주라!”

“오냐.”

유찬 형이 끄응차, 하는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형. 왜 그래. 형 아이돌이야. 갑자기 이상한 컨셉 잡지 말아주라…….

우리 옆으로 온 유찬 형은 나를 의자에 앉힌 채 빙글 돌렸다. 고개를 들어 형을 올려다보는데 턱 밑에 손가락이 닿았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돌려본 뒤 만족스럽게 웃는다.

“우리 하온이 예쁘기도 하지.”

갑자기? 내 메이크업은 어떤데요?

“어휴, 진짜 완벽하다. 어쩜 이렇게 예쁘냐. 매일매일이 우리 막내 리즈라니까.”

“형, 메이크업 봐달라니까?”

이서호가 황당해하면서 혀를 찼다. 그리곤 팔불출이라면서 구시렁거렸는데, 나도 동의하는 바다. 이럴 때 빠지지 않는 정이한이 “맞아. 하온이 예뻐.”라면서 순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핳!”

갑자기 이서호가 날 손가락질하면서 웃기 시작했다. 네가 왜 웃긴지 나도 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어째서 항상 내 몫인지. 나는 얼굴로 쏠리는 열을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했다. 너무 솔직한 내 얼굴이 원망스러워.

“메이크업은 괜찮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유찬 형이 생글생글 눈웃음 지으면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만지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유찬 형은 괜찮다. 형의 손길 한 번이면 더 완벽해지니까!

“얘들아!”

어디서 쿵쿵, 위협적인 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매니저 형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들어온 형은 우리를 소집했다. 미니 팬미팅 시작하나 봐!

“SVS 예능국에서 너희 출연 섭외 왔다!”

매니저 형은 잔뜩 흥분해서 우리한테 예능 섭외 소식을 전했다. SVS에서 하는 파일럿 예능인데 황금 시간대에 방영한다고 한다. 무려 지상파 방송국의 황금 시간대의 파일럿 예능. 그것도 메인 게스트라는 소식에 우리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자세한 건 미팅 때 들어봐야 아는데 김혜미 실장님도 긍정적으로 보고 계시더라. 프로그램이 너무 이상하지만 않다면, 거의 확정이라고 보면 돼.”

“우와아!”

예능, 결국 올 게 왔다. 다른 멤버들처럼 순수하게 기뻐하기에는 내 체력이 걸렸다. 진짜 연기라도 올려야 하나.

“전부 너희가 열심히 한 덕분이야. 오늘 녹화한 <음악 열차> 정연식 피디님이 너희 라이브 하는 거 보고 추천하셨다고 하더라. 우리 팬미팅도 정 피디님이 도와주신 거야. 팬미팅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피디님한테 먼저 인사하러 갈 거거든? 예의 바르게 잘해야 한다.”

“네!”

뿌듯하게 웃던 매니저 형이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개구리 캐릭터가 붙어 있는 마이크가 들어 있었다. 이서호가 귀엽다면서 바로 전원을 켠 뒤 “아아!” 소리를 냈다.

“오! 귀여워요!”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오셨어요?”

유찬 형이 마이크를 톡톡 두들기면서 물었다. 매니저 형은 소품실에서 직접 골라왔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도시락 차 20분 뒤에 올 거거든? 피디님께 인사드리고, 팬분들이랑 소통하고 있어. 도시락 도착하면 너희가 직접 나눠 줄 거야.”

“오오! 저 그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이서호가 눈을 빛냈다. 유찬 형도 꽤 기대되는지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이동하자! 나 따라와.”

매니저 형의 인도하에 야생곰 반이 줄줄이 따라나섰다. 유찬 형이 앞서고, 그 뒤에 촐싹거리는 걸음의 이서호가 바통을 이었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대기실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손이 잡혔다.

“이한 형, 긴장돼요?”

“……으응.”

정이한은 무대 위에서는 날아다녔지만, 실상은 낯가리고 숫기 없는 성격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려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정이한의 손을 맞잡은 뒤 최대한 표정을 풀어 부드럽게 웃어줬다.

“우리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러 가는 거예요. 편하게 하세요.”

“너는 괜찮아?”

“괜찮죠.”

정이한과 나란히 대기실을 나가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사전녹화를 하지 않았다면 분명 긴장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팬분들의 마음에 나도 있다는 걸 안다. 지금의 나는 천하무적이었다.

“계속 손잡아주면 안 돼?”

“되죠.”

아, 서브 미션. 나 애교 부려야 하는데……. 정이한을 매달고 애교 부릴 수 있으려나? 하도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깜박 잊고 있었다. 차라리 하지 말까. 그래도 체력 회복약은 아쉬운데…….

***

“얘들아, 들어가자마자 인사 잘하고. 정연식 피디님 말고 다른 피디님들도 계시니까 두루두루 인사해야 해. 알았지? 예의 바르게 굴고, 계속 웃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피디실 앞에서 매니저 형이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 경청하던 우리가 끄덕끄덕 대꾸하자 피디실을 두들기고는 문을 열었다.

피디실은 몇 개의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중 정연식 피디님은 창가 자리에 앉아 계셨다. 날카롭게 자로 잰 듯 예리한 눈빛이 우리에게 쏘아졌다. 위압적일 만큼 벼려진 기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디아스?”

유찬 형이 우리에게 신호를 줬다. 동시에 인사하려고 하는데 피디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피디님은 웃으면서 우리를 피디실 안쪽에 있는 회의실로 이끌었다.

“우렁차게 인사할 필요는 없어요. 자자, 다들 편하게 앉아요.”

어정쩡하게 서서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매니저 형을 봤다. 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는 긴 회의실 책상 한쪽에 주르륵 앉았다. 선반을 뒤적거리던 피디님이 과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셨다.

“편하게 먹어요. 아, 다이어트 중인가?”

“앗, 아니요. 활동기에는 다이어트 안 해요.”

유찬 형이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그렇다고 안 먹기에는 성의를 거절하는 것 같아 예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 몰라서 바짝 긴장한 나는 마른침만 삼키면서 열심히 표정 관리만 할 뿐이었다.

“와아! 감사합니다!”

그때 목청 큰 인사와 함께 이서호의 긴 팔이 쭉 뻗어 나왔다. 초코칩 하나를 가져간 뒤 바스락거리면서 포장지를 뜯는다. 이서호, 진짜 대단해. 이런 면은 정말 존경스럽다.

“그래요, 그래요. 많이 먹어요.”

피디님이 웃으시면서 우리 쪽으로 과자 상자를 쭉 밀어주셨다.

“오늘 이렇게 오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내가 디아스를 좋게 봤거든요.”

“가, 감사합니다!”

유찬 형이 넙죽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장 호들갑 떨 것 같던 매니저 형은, 피디님을 만나는 자리라서인지 의외로 조용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SVSKPOP 채널에 디아스 데뷔 무대 영상을 올리려고 해요.”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기적 같은 소식을 두 번 연달아 듣다니. SVSKPOP 채널은 구독자 수가 천만 명에 가까웠다. 거기에 우리 영상이 올라간다면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가장 인기 있는 K-POP 채널은 케이블 방송사가 가지고 있었지만, 방송 3사 채널의 인기도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K-POP, 즉 아이돌과 가수에 관심 있는 구독자를 타겟으로 한 맞춤 채널이었기에 우리로서는 횡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이유 없이 주진 않을 텐데…….

음악방송 산하 채널이긴 했지만, 출연한 모든 아이돌 그룹이나 가수의 영상이 SVSKPOP에 업로드되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인기 있는 가수, 1군 아이돌 그룹 위주로 동영상이 올라간다.

신인 아이돌이어도 인지도가 있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기획사의 힘이 좋아야 했다. 사실 기획사의 힘이 좋다면 인지도가 있을 테니까 의미 없긴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거다.

“단, 조건이 두 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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