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63화 (63/320)

63.

이주한. 전생의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앞으로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널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어.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망한 걸 전부 네 탓으로 돌리고 싶어져. 미안하다. 마지막까지 널 받아들이지 못해서.」

형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맞댔을 때 들은 말이었다. 독한 단어로 날 찌르던 다른 멤버들보다 나는 주한 형의 말이 가장 아팠다. 노력했는데 안 되더라, 그런 의미였으니까.

처음부터 적대시하고 멀리했던 사람들과 달리 주한 형은 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의 유찬 형이랑 비슷했었지, 이 사람. 멘탈 약한 것까지.

그런데 왜 음방 녹화가 끝난 방송국 화장실에 있는 거지?

“어? 혹시 디아스…….”

이주한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물었다. 내 기억보다 훨씬 앳된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저쪽은 나를 모르는데, 나는 형을 안다. 아닌가? 내가 아는 건 전생의 이주한일 뿐, 이 세계의 이주한은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였다. 계속 옛 기억이 떠올라 평소보다 신경 써서 미소를 만들어야만 했다. 모쪼록 내가 잘 웃고 있기를.

“아, 네에. 맞아요. 저희를 아세요?”

“그럼요! 저도 아이돌 연생이거든요.”

“아하…….”

더 이상하다. 아이돌 연생이 왜 이 시간에 방송국 화장실에……. 으음.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봐도 되는 건가? 실례겠지?

“나중에 저희 그룹 앨범 들고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잘하실 거다? 나중에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응원하겠다? 어떤 대답이 좋을지 몰라 어정쩡한 반응밖에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어서 가장 무난하게 들릴 격려의 말을 골랐다.

“성공하실 거예요.”

“……정말요?”

“네? 네. 그럼요. 춤추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강현 형만큼 춤에 진심이었던 사람이었다. 천재 소리 듣는 강현 형보다는 못 하지만 그래도 춤추는 걸 즐거워했다. 전생에서 함께 활동할 당시, 제대로 된 안무가도 섭외할 수 없었던 우리 그룹의 안무를 짜기도 했었고.

강현 형도 안무 잘 짜는데, 다음 타이틀곡은 형의 창작 안무로 해도 좋지 않을까. 데뷔 앨범은 우리 멤버들이 의견을 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없었지만, 두 번째 앨범은 실장님께 실력을 보여주면 허락해 주실 것 같았다.

“……어요?”

이런.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다.

“네? 뭐라고 하셨죠?”

“저 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봤어요.”

궁금증과 경계심이 섞인 시선이 날 향했다. 아. 나 실수했구나…….

“몸 선이 딱 봐도 춤추는 사람 같아서요.”

“……몸 선이요?”

주한 형은 자신의 딱 달라붙은 셔츠와 바지를 내려보면서 갸웃거렸다.

“네. 저희 멤버 중에도 춤 좋아하는 형이 있거든요. 그 형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저도 모르게 확신하는 투로 말했나 봐요.”

너무 억지라서 안 믿을 것 같다. 몸만 보고 춤 좋아하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오오! 열심히 노력한 보람 있네요. 댄서의 근육이 잡혔나 봐요? 어떻게 다른데요?”

미, 믿어주네?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가 폐급 영혼이 아니었다면 전생의 멤버들과도 지금의 멤버들처럼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라서 어떻게 다른지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엇? 아니에요! 사과하실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사실 저 인정 받은 게 처음이라서 기쁘거든요.”

“처음이요?”

“네. 음.”

주한 형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입꼬리를 당겼다. 애써 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사실 2군이라…….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고민하고 있거든요. 회사에서는 매번 열정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뭘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전 최선을 다하는데 말이죠.”

“아. 서운하셨겠어요.”

“네……. 좀 많이 그랬죠. 오늘도 기획사 선배님들 마지막 활동 무대라서 보고 동기부여 받으라고 딸려 온 거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하지만 어째서 생방송까지 전부 끝난 시간까지 남아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말이 동기부여지, 사실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거예요. 공짜 인력 취급이죠, 뭐. 지금도 대기실에 물건 놓고 왔대서 찾으러 온 길이고요. 헉, 이건 비밀입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 죽어요!”

주한 형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입가에 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처롭게 늘어진 눈썹에 염려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여서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비밀로 할게요.”

“고맙습니다! 때려치울까, 하는 우울한 마음에 화장실에 박혀 있었는데 선배님 덕분에 다시 의욕이 되살아 난 것 같아요.”

그러더니 ‘댄서의 근육.’이라면서 흥얼거렸다. 형은 팔에 힘을 주면서 불끈불끈 솟는 잔근육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그때 끼익, 화장실 문이 열렸다. 동시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하온아?”

“어? 이한 형.”

“서호 돌아왔는데 너 안 와서 찾으러 왔는데…….”

정이한은 나와 주한 형을 한 번씩 보더니 사납게 얼굴을 굳혔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왔다. 내 옆에 나란히 서서는 주한 형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누구셔?”

딱딱한 어조가 경계심을 잔뜩 드러내고 있었다. 주한 형은 경직된 자세로 정이한을 보고 있었다. 눈치로 나와 같은 그룹 멤버인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설명하자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해요.”

“……응? 그래?”

“네. 방금 막 알게 된 분인데…….”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는 코어 기획사 소속 연습생 이주한입니다!”

주한 형은 훈련받는 군사처럼 팔을 딱딱하게 굳힌 채 큰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코어였구나. 유찬 형이 SR로 오기 전 소속되어 있던 대형 기획사였다. 어쩌면 둘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네. 그사이 잔뜩 경계하던 정이한의 눈매가 한층 부드럽게 풀렸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정이한입니다. 하온이랑 같은 그룹 멤버고요.”

“넵!”

“하온아, 우리는 이제 가자. 매니저 형 금방 온대.”

“아? 네. 가요.”

주한 형에게 꾸벅 묵례한 뒤 정이한을 따라갔다. 이서호를 찾으러 온 건데 이서호도 돌아왔고, 매니저 형까지 온다니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형, 먼저 들어가 계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응? 왜? 오래 걸려?”

“아니요. 오래 걸리진 않는데.”

“그럼 기다릴게.”

대기실이랑 가까운데 굳이…….

하지만 정이한과 실랑이할 시간에 빨리 할 말을 전하고 돌아오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알았다고 대답한 뒤 화장실로 돌아갔다. 마침 주한 형이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네, 네?”

“그쪽 아이돌 데뷔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혹시 나중에 기획사 옮기고 싶어지더라도 ‘스완’은 가지 마세요.”

“……네?”

“응원하고 있을게요. 힘내세요.”

“아, 네에. 고맙습니다.”

이 세계에도 스완이 존재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면 좌절과 절망뿐이라는 걸 알기에 말해주고 싶었다.

전생의 그룹이 망한 건 내 탓도 있겠지만, 영업력도 자본도 한참 부족했던 기획사 탓도 컸다. 앨범 프로듀싱은 물론, 뮤비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한 형은 실력 있으니까 스완이 아니더라도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어에서 데뷔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번 세계에서도 스완을 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 오지랖 넓은 성격 맞네.

어쩌면 보답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전생에 형과 좋은 사이였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노력해 줬던 사람이니까.

몸을 돌리자 날 기다리는 정이한이 보였다. 지금의 나는 넘치는 애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한테도 기회가 오기를 바랄게.

***

“서호 형.”

“……어, 어.”

“서호 형아.”

“……어.”

이서호가 계속 어색하게 군다. 날 피해 도망치는 이서호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화난 거 아니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또 도망쳐다닌다.

결국 나는 팔짱 낀 채 대기실 끝까지 도망친 이서호를 멀뚱히 바라봤다. 벽을 빤히 보고 있던 이서호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내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잠깐. 내가 없는 게 안심될 정도야?

아니. 귀에 바람 좀 넣은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잖아. 화난 거 아니라면 왜 도망쳐다니냐 이거지.

혹시 나한테 정떨어졌나? 에이, 설마. 고작 장난 한 번에 그렇게까지……. 아니, 그럴 수도 있나?

“어…….”

그럼 어떡하지? 사과해도 받아주질 않으니 이 관계를 어떻게 돌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나는 거세게 뛰는 가슴께를 꾹 누르면서 내려봤다. 미움받는 건 익숙한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서호야.”

“응?”

유찬 형이 이서호를 불렀다. 형에게 대답하는 이서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오직 나만. 나에게만 태도가 달라졌다.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그만 도망쳐다녀. 하온이 계속 피할 거야?”

“악! 형! 부,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럼 뭔데?”

“……그, 그냥.”

“지금 하온이 얼굴 좀 봐봐.”

그제야 이서호가 휙 나를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성큼성큼 다가온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 저런 반응이지…….

“야, 진하온.”

“……응.”

“미, 미안해. 아니, 내가 좀 당황해서. 그러니까, 아으으! 유찬 형 말대로 부끄러워서 그랬어……. 씨, 너는 거울 안 보고 사냐? 그 얼굴로 그렇게, 어? 뽀뽀할 것처럼, 어? 그렇게 오면 내가 놀라잖아!”

“……나 미워진 거 아니고?”

“절대 아니야!”

놀란 이서호가 펄쩍 뛰듯이 대답했다. 아, 다행이다. 뭐야.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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