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54화 (54/320)

54.

“아, 떨린다.”

유찬 형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은 밝았다. 다음에 나가려는 걸까?

“형 뭐 하려고요?”

“성대모사.”

“아하.”

자신 있어 보이는데 들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잘하면 본전……. 못 하면, 뭐. MC님이 살려주실 거야.

“하온아.”

“네?”

“너 좀 안아 보자.”

구석인 데다가 이미 머리도 흐트러졌으니 괜찮겠지?

“네네.”

나는 유찬 형을 위해 기꺼이 내 등을 내어줬다. 양팔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와 감싸 안았다. 아, 편안하다. 형한테 기대고 있었더니 정이한까지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도.”

“여기요.”

등은 유찬 형에게, 왼쪽 팔은 정이한에게 내어준 채 제대로 춤판을 벌인 강현 형을 봤다. 이번 선곡은 장난기가 쏙 빠져있어서 아주 날아다니고 있다.

“형들.”

“응?”

“으응.”

“데뷔 쇼케이스 재밌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내 말에 동의하며 웃어 주었다. 댄스 천재답게 사람들을 홀리는 멋진 퍼포먼스를 보인 강현 형이 돌아왔다. 흐르는 땀을 닦는 형은 무척 뿌듯하고 즐거워 보였다.

다음 순서로 나선 유찬 형은 성대모사를 대차게 말아먹었다. MC의 유도하에 사람들은 울상 짓는 유찬 형을 보듬어주었다. 표정 보니 다행히 두부 멘탈이 터지진 않은 모양이다. 대신 돌아오자마자 다시 나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내 체력도 회복되어 서로 좋은 거니까 기꺼이.

정이한은 무대를 뒤집어 놓았는데, 자꾸만 내 쪽을 바라봐서 곤란했다. 아니, 관객들한테 어필해야지 왜 이쪽을 보는데. 나중에는 아예 비스듬히 서서 날 보면서 랩 하더라. 덕분에 인터뷰할 때 나까지 끌려나가야 했다.

듬직한 막내 인정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의 타이틀곡을 선보이는 순서가 왔다. 마지막 순서라는 MC의 말에 곳곳에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탄식이 터졌다.

우리를 몰랐던 사람들도 계속 자리 지키는 게 신기했고,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건 더 신기했다.

“자, 마지막으로 디아스의 ‘Dear Friend’ 무대를 보시겠습니다!”

빼곡히 모인 사람들을 찬찬히 훑으면서 무대 중앙으로 이동했다. 어깨에 툭 손이 올라와서 보니 강현 형이었다. 톡톡. 가볍게 두들기고 나를 지나쳤다.

내가 긴장한 것처럼 보였나. 얕게 뱉던 호흡을 정돈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멤버들은 나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흩어졌다. 위치를 확인한 뒤 내게 등을 보인 채 돌아서서 고개 숙였다.

우리가 시작 대형을 맞추자 조명이 꺼졌다. 흥분과 기대가 섞인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작게 들렸다. 전주가 나오기 직전 내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익숙한 전주가 시작됐다. 나는 잔뜩 설레는 표정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고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이서호와 강현 형의 등을 툭 치자, 두 사람이 몇 발자국 밀려가면서 각각 옆에 있는 유찬 형과 정이한의 팔을 붙잡았다.

멤버들이 모두 날 바라보고 나는 도망치듯 무대 앞쪽을 향해 스텝을 밟았다. 멤버들이 쫓아와 나를 붙잡았고, 나는 번쩍 들려서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전주 구간의 짧은 퍼포먼스가 끝나고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통통 튀던 멜로디가 딱딱하고 묵직하게 바뀌었다. 우리는 얼굴을 굳힌 채 정면을 주시했다.

정이한의 나직한 싱잉랩이 스타트를 끊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정이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나는 이서호를 발견하고, 이서호도 나를 본다. 우리는 서로 엉덩이를 부딪치면서 즐거워했다. 둘이 되니 재미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또 다른 친구를 찾으러 간다.

그사이 멜로디는 점점 밝고 경쾌해져서 도입부의 통통 튀는 느낌을 되찾았다.

다섯 명이 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 다 함께 무대를 뛰어다녔다. 잔뜩 흥이 달아오른 앞자리 관객들이 우리를 향해 열렬한 환호성을 보내줬다. 댄스 브레이크 타임에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동작을 취할 때마다 소리는 더욱 커졌다.

내 담당은 윙크였는데, 다들 많이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억지로 만든 표정 연기가 아니라 무대가 즐겁고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분위기가 뜨거워질수록 힘이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체력이 차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큰 동작으로 안무를 소화해냈다. 말 그대로 멤버들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좋은 것만 나눠줄게~”

유찬 형의 고음이 끝나고 곧바로 내가 이어받았다.

“네가 함께해준다면~”

시원하게 소리를 냈다. 녹음했을 때보다 훨씬 잘한 것 같아!

“좋겠어.”

내 파트 끝자락을 물며 들어온 정이한이 앞으로 나서면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스포트라이트가 옮겨가고 나는 대형에 합류했다.

이서호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좋아 죽겠다는 티를 폴폴 내고 있었다. 나는 이서호를 따라 웃었고, 이서호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타이틀곡 무대가 끝나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마이크를 타고 숨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도 모든 멤버들의 표정이 밝았다. 무뚝뚝한 강현 형도 해사한 미소를 선보였다. 기자 쇼케이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함을 모두가 느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MC의 호들갑이 이어졌고 그사이 우리는 다시 조르륵 대열을 맞춰 섰다. 가벼운 토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다 같이 인사하려던 때였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건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바짝 굳어버렸고,

“악!”

우렁찬 비명을 내지른 이서호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으윽, 강현 혀엉…….”

“미안. 나도 모르게.”

“……피하면 어떡해!”

강현 형이 머쓱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서호는 형의 손을 잡고 일어난 뒤 팔꿈치를 문지르면서 낑낑거렸다.

“괜찮아?”

내일부터 바로 음방 뛰어야 하는데 크게 다친 건 아니겠지? 하도 아파하길래 걱정돼서 살펴보는데 이서호의 입술 끝이 삐죽거렸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히 걱정되지.”

“그래? 걱정돼?”

삐죽 솟던 양쪽 입꼬리가 쭈욱 밀려 올라갔다. 그러더니 두 팔을 빙빙 돌리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내가 넌 줄 아냐? 난 튼튼하거든!”

“그럼 다행이고.”

엄살이었네. 하여간 관종 같으니라고. 이서호가 무사한 걸 확인한 나는 얼른 굉음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눈을 굴렸고, 얼마 안 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쓰러진 조형물 근처에 모여서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까 대포 카메라를 든 여성분이 올라가 있던, 바로 그 조형물이었다. 난간 쪽으로 걸쳐진 채 접시가 있던 곳이 흉측하게 깨져서 사라진 상태였다. 굉음은 접시 부분이 아래로 추락하면서 난 소리인 듯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현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사람들의 집중력은 모두 흩어진 뒤였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MC가 훨씬 톤이 올라간 어조로 말했다.

“와아……. 진짜 깜짝 놀랐네요. 여러분 많이 놀라셨죠? 우리 디아스 멤버 분들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아요?”

“네, 저희는 괜찮습니다!”

유찬 형이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이서호가 뭔가 말하려는 기색이 보여 재빠르게 팔을 붙잡았다. 지금은 대화를 이어 봤자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이서호는 날 한 번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사이 MC는 다시금 마무리 멘트를 진행했고, 우리는 인사한 뒤 무대에서 내려왔다.

벤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서 안도의 숨을 삼켰다. 서브 미션은 일종의 경고였다. 미션이 없었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모두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가 보다, 하고 넘어갔겠지.

아까 내려오라고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 여성분은 분명 접시와 함께 추락했을 것이다. 높이가 상당해서 만약 그렇게 됐다면 크게 다치거나 심각한 경우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태평하게 아이돌 데뷔 쇼케이스에 대해 언급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무대 영상을 찍으려다가 인명 사고가 발생한 것이 되니 당연하다.

그룹의 이름 역시 우리가 원하는 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알려질 확률이 높았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비판하는 여론이 불거졌을 테고, 디아스 연관 검색어에 ‘쇼케이스 사고’가 따라다녔겠지.

사회 분위기가 나쁜 쪽으로 흘러가면 우리 데뷔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 혹은 이번 앨범을 포기하거나. 어느 쪽도 최악이었다.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다.

막아서 다행이야.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저 조형물 하나가 쓰러진 게 다였다. 관리 소홀로 인한 후폭풍은 우리와 상관없는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상관없는 게 맞기도 하고.

“생각해보니까 진하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서호가 불현듯 깨달았다는 듯 날 보면서 말했다. 형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여들었다.

“그러게. 원래는 특정 팬한테 과한 서비스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 경우에는 칭찬해줘야 하는 건가?”

유찬 형이 뒤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냥 웃어 버리자 유찬 형이 나를 따라 웃었다.

“이번에는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말 안 나올 수 있지만, 다음에는 안 돼. 알지?”

“네. 조심할게요.”

결국 마지막 쐐기까지 박는다. 나도 미션만 아니었다면 무대에서 내려갈 생각 없었다.

“그런데……. 우리 병원 갈까?”

뜬금없는 소리에 멤버들이 동시에 정이한을 쳐다봤다.

“왜요? 어디 아파요?”

“하온이 너 많이 놀랐을까 봐. 새벽에 또 아프면 어떡해.”

그러면서 내 이마에 손을 얹는다. 나는 아주 멀쩡하다. 심지어 지금 체력 상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슬슬 바닥이 보이긴 했지만 돌아가는 길에 눈 좀 붙이면 문제없다.

“어, 맞아. 몸 약한 사람은 깜짝 놀라기만 해도 아플 수 있다더라! 진하온 병원 데려가자. 유찬 형! 정곤 형한테 말해줘!”

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