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53화 (53/320)

53.

분위기는 가라앉겠지만 내 뒤로 유찬 형, 정이한, 강현 형이 남았다. 충분히 타이틀곡 무대 전까지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는 신나는 퍼포먼스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정이한은 조금 걱정됐지만 떨고 있지 않으니까 잘하겠지.

“아주 예쁘고 드음직한 막내 하온 씨!”

내가 무대 중앙으로 가는 사이 MC가 멘트를 이었다.

“자! 우리 하온 씨의 개인기도 보겠습니다! 메인 보컬이니 역시 노래일까요?”

“네. 노래 부르겠습니다. 권세화 님의 겨울 바다라는 노래인데요.”

“겨울 바다요? 어, 혹시 MR 준비되나요?”

MC가 스텝들을 보면서 물었다. 찾아도 없을 게 뻔해서 그냥 내가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공개된 노래는 아니에요. 버스킹하시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인생 곡이 됐거든요. 여러분에게도 들려드리고 싶어요.”

“아! 그럼 무반주로? 이야, 그 어렵다는 무반주! 디아스의 메인 보컬이 바로 나다! 하고 주장하는 선곡이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번 들은 노래라서 가사는 틀릴 수 있어요.”

“호오! 어차피 틀려도 모를 것 같긴 한데요! 그럼 들어보겠습니다!”

MC가 호응을 유도하자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하온아! 잘해! 실수해도 괜찮아! 하는 응원 목소리가 들렸다. 내 플래카드를 들고 계신 분이었다. 그쪽을 향해 환하게 웃어 준 뒤 목을 가다듬었다.

무대 중앙에 홀로 있는데도 불쾌함을 표출하거나, 야유하는 시선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상냥한 눈빛과 호기심 어린 관심이 대부분이었다.

“하온아! 화이팅!”

유찬 형 목소리에 멤버들을 바라봤다. 다들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서호마저도 잘하라면서 방방 뛰었다.

후우.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면서 허밍을 시작했다. 반주 대신 허밍으로 대체했는데 조금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내게 집중했다. 머리 위로 팔을 올려 좌우로 흔들면서 박자를 맞춰주었다. 이런 호응은 처음이라 기분 좋은 고양감이 나를 감쌌다.

이대로 휩쓸려서 개사하려던 걸 잊으면 안 된다. 일부러 음원 발매가 되지 않은 노래를 고른 이유가 있다. 내 계획을 머릿속으로 점검하면서 첫 소절을 불렀다.

화자의 고독과 외로움을 겨울 바다의 차갑고 시커먼 어둠에 비유한 1절이 끝나간다. 반주 구간. 나는 다시 허밍 하면서 천천히 우리가 올라왔던 계단을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매니저 형이 놀라서 허둥거리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무시했다.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나를 따라왔다.

무대 바로 밑을 느리게 가로지르자 팬분들이 더 가깝게 보였다. 다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치고 싶은 걸 참는 기색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엉덩이를 반쯤 들어 올린 분도 계셨다.

노래 가사에 맞춰서 손을 뻗었다. 허공에 닿은 손은 아무도 움켜잡지 않았지만, 마치 내 노래에 응답하듯 수많은 관객의 손이 내게로 뻗어져 왔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렇게 무대 끝까지 가로질러 마침내 조형물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커다란 카메라가 집요하게 날 쫓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까. 저분이 내 노래에 호응해주실까. 걱정되었지만 나는 살짝 개사한 겨울 바다 가사에 감정을 실었다.

“위험한 곳에 혼자 있지 마요.”

손등을 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내가 함께할게요.”

2절은 1절의 화자를 위로하는 가사였다. 원래 가사는 이게 아니었지만 돌발을 막아내려는 의도에 맞추어 몇 개의 단어를 바꾸었다. 내 의도를 눈치챈다면 내려올 거고, 아니면 분위기만 어색해진 채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부디 내려와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날 찍는 카메라 끝이 살짝 흔들렸다.

“혼자 버틸 필요 없어요. 그대 옆에는 내가 있으니.”

작사 등급이 올랐다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내 곁으로 와요. 내게 기대 주세요.”

여성분이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잡힐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조금 놀랐다. 나 때문에 상체를 쭉 뻗어서 더 위험해 보였다. 와중에도 카메라가 날 찍고 있어서 놀란 감정을 숨기고 표정 관리를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조형물을 따라 돌았더니 여성분이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뒤쪽은 단차가 큰 계단처럼 되어 있어서 밟고 오르내리기 좋아 보였다.

하지만 조형물의 밑동은 상대적으로 얇은 쇠기둥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조형물이 위태위태하게 흔들거렸다.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너무 위험해 보여…….

맞잡은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긴장한 순간, 여성분이 완전히 조형물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는 걸 확인하고 손을 놓아 드렸다. 아! 하는 탄성이 들려서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얼른 다시 멤버들이 모여있는 무대로 이동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다시 무대 중앙에 도착할 때쯤 노래가 끝났다. 짧은 허밍을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였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적이 찾아왔다. 노래 부를 땐 괜찮아 보였는데 실패한 것 같은 분위기다. 역시 마지막이 너무 억지스러웠나. 개사한 가사도 오글거리고……. 난 역시 창작에 재능이 없어.

침묵이 계속됐다. 이런. 분위기 완전히 다운시켰다. 그래도 저분 내려드렸으니까 마음은 편안해졌다. 비록 미션 완료 메시지는 안 떴지만……. 위험해 보인 건 사실이니까. 이제 뒷일은 형들한테 맡겨야지. 그 사이 문제 터질 만한 게 또 있는지 관찰해야겠네.

“하온아! 잘했어!”

유찬 형이 대뜸 소리 질렀다. 다른 멤버들이 먼저 내게 박수를 보내줬다. 나는 그쪽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와우! 진짜 대단했어요!”

“꺄아아아아아아!”

적막이 깨지면서 귀가 아플 정도로 열렬한 환호성이 밀고 들어왔다. 목적을 달성한 것 외에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온전히 내게 쏟아지는 환호성이 얼떨떨했다.

“아니, 하온 씨! 무반주 자신 있으실 만한데요? 하온 씨 음색이 제 마음을 막 어루만져 주는데……. 저도 기대도 됩니까?”

MC가 장난스레 웃으면서 내 옆에 딱 붙어 섰다. 내가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아아악! 안돼!”

객석에서 결사반대를 외치자 MC가 시무룩하게 내게서 떨어졌다.

“아, 너무해요!”

그러면서 또 관객을 향해 앙탈 부린다. 그 과장된 몸짓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

“응? 하온 씨 왜 그래요?”

“아.”

아, 입 밖으로 소리 내 버렸다. 잠깐 내려오셨던 분이 다시 조형물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 김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조형물 위에 올라가 계신 분이 위험해 보여서 신경 쓰고 있었거든요…….”

“아! 유혹당해서 내려오신 분이요!”

유, 유혹? 엄한 단어 선정에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손날을 세워 이마에 붙인 채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MC가 조형물 위를 보면서 말했다.

“앗! 다시 올라가시는 분! 우리 하온 씨가 걱정된다는데 내려오실 수 있나요~”

엉거주춤 올라가 계신 분이 얼굴을 숙인 채 머리 위로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셨다.

“자아! 이제 됐나요?”

“아, 네에! 고맙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온 씨가 여러분의 안전을 많이 신경 쓰시네요! 질서 잘 지키기! 위험한 일 하지 않기! 다들 약속해 주실 수 있죠?”

“네!”

“그럴게요!”

“하온아! 사랑해에엨!”

<시스템: 서브 미션 완료! 보상으로 데우스 선물 상자x1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아! 저기 올라가면 안 되는 게 맞았구나. MC의 도움이 없었다면 못 했을 게 분명했다. 존경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더니 MC의 광대가 치켜 올라갔다.

“크으! 좀 더 그런 눈으로 절 봐줘요! 아, 이거 뭔데 짜릿하네요?”

“이, 이렇게요?”

“캬아! 짜릿해! 최고야!”

MC가 짓궂게 눈웃음 짓자 나도 따라 웃었다. 이것으로 돌발 걱정 없이 데뷔 쇼케이스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무대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디아스 멤버들의 재능이 아주 남달라요! 점점 기대되는데요? 다음은 어느 분께서?”

나는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가면서 체력을 확인했다. 40 정도에 맴도는 걸 보니 아슬아슬하게 버틸 것 같기도 하고, 부족할 것 같기도 했다.

강현 형이 슬쩍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형과 스쳐 지나가면서 입 모양으로 ‘화이팅!’하고 말했다. 형이 은은하게 웃으면서 날 향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크으! 강현 씨는 진짜 조각상 같아요. 그, 그, 인터넷에서 많이 쓰는 거 있지 않아요? 루브르 박물관 그거요.”

“……아. 감사합니다?”

‘루브르 박물관 그거’가 뭔지 모르는 게 확실하다. 나도 모르지만…….

“으하하! 모르는 척하시기는! 디아스의 댄스 원탑! 메인 댄서시니 역시 춤일까요?”

“네. 아무 노래나 틀어 주시면 즉흥으로 춰보겠습니다.”

“키야! 이 자신감! 역시 디아스입니다! 다들 박수 보내주세요!”

관객들의 박수 소리는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귀여운 토끼가 깡충깡충 뛰는 동요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으햐햐햐햐!”

이서호가 배를 잡고 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강현 형이 허망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형 미안한데. 나도 좀 웃겨.

“아! 뭐 하십니까! 이제 곧 노래 끝나요~!”

강현 형은 퍼득 정신을 다잡고 열심히 손으로 귀를 만들어 펄럭거렸다. 얼굴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서 나도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짧은 동요가 끝나고 MC가 농담을 걸었다. 강현 형은 무척 억울해하면서 제대로 된 노래를 틀어 주셨어야죠, 했다.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쇼케이스라는 게 원래 이런 거였어?

기자 쇼케이스 때는 상품인 우리를 소개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무대에서 노는 것 같았다. 서브 미션까지 해결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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