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9화 (49/320)

49.

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정이한이 날 올려봤다. 한쪽 눈을 찡긋거려 윙크한 뒤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우리 데뷔곡의 훅 부분을 내질렀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다들 정신이 산만한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무를 춘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내가 부른 파트의 동작을.

멈춘 시간이 조금씩 달라서 전부 똑같진 않았지만 틀린 사람은 없었다. 와중에도 각도가 가장 잘 살아 있는 강현 형을 향해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고 싶다.

“……야! 가뜩이나 심란한데 왜 장난쳐!”

이서호가 어정쩡하게 올라간 팔을 내리면서 씩씩거렸다. 내게 이목이 쏠려 나는 더 당당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연습 많이 했잖아. 기습적으로 부른 노래에 정확하게 반응할 만큼.”

“아.”

유찬 형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이서호도 “그렇긴 하지…….”하고 동의했고. 강현 형이 “허.”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본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나 봐.

“그러네. 연습 많이 했지. 무의식중에 안무 동작 나올 만큼 했네. 우리가 그만큼 노력했어.”

중얼거리는 어투의 끝은 처음과 달리 힘이 들어갔다. 유찬 형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와, 나 진짜 긴장 많이 하고 있었나 봐. 손에 땀이 흥건해.”

이서호가 바지춤에 손바닥을 슥슥 문댔다.

“진하온. 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덕분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야.”

“누구랑 다르게 난 똑똑하거든.”

“아놔. 하여간 칭찬해주면 안 된다니까.”

이서호의 비글미가 돌아왔다. 입술을 내밀면서 투덜거리는 게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좋아. 할 수 있어!”

유찬 형이 주먹을 불끈 쥔 채 갑자기 소리쳤다. 마인드 컨트롤이 끝난 모양이다. 하여간 순두부야. 물렁물렁 순두부.

대기실 분위기는 한층 편안하게 바뀌었다. 매니저 형이 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매니저 형에게 음향이나 마이크 문제는 없을지 체크 해 달라고 했다. 형이 꼼꼼하게 체크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도시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이 리허설 시간이 돌아왔다. 멤버들은 다시 긴장했지만 아까처럼 집단 멘붕 사태는 아니었다.

원래 간이 리허설은 동선만 체크하면서 간단히 무대 컨디션을 살피는 자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신인답게 풀 파워로 격한 안무를 소화했다. 덕분에 무대에서 내려온 뒤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데…….

서브 미션의 돌발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잔뜩 신경 쓰고 있는데 유찬 형이 함박웃음과 함께 어깨를 쭉 폈다.

“우리 잘한 것 같다. 그렇지?”

“네. 다들 잘했어요.”

내가 동의하자 이서호가 “그럼그럼! 내가 누군데~”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졌다. 조금 전에 긴장으로 고장 나 있던 사람이 누구더라?

“이서호. 잠깐 이리 와봐.”

“……어? 오, 왜?”

강현 형이 부르자 이서호가 쭈뼛거렸다. 형은 정이한까지 소환했다. 내 옆에 있던 정이한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날 봤다. 나는 정이한을 위한 마음으로 등을 밀어서 강현 형에게 보내주었다.

“조금 전에 부족했던 동작 속성으로 다시 가르쳐 줄게.”

저런. 그럴 줄 알았지.

우리 모두 예상한 결과였다. 나는 체력 관리를 해야 하므로 얌전히 빠졌다. 어깨를 움찔거리던 유찬 형마저 결국 속성 연습에 합류해, 결과적으로 나 혼자만 쉬게 되었다. 앉아 있는 게 멋쩍어졌다. 그래도 쉬어야지…….

***

본격적인 리허설 시간이 다가와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헤어, 메이크업을 받을 때까지 네 사람의 연습은 계속됐다. 메이크업 받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땀 흘렸냐는 잔소리를 한 바가지 먹은 멤버들이 의기소침해졌다. 본의 아니게 나 혼자 칭찬받았다.

본격적인 리허설도 성공적으로 끝내고, 우리는 편한 듯 불편한 무대 의상을 입고 옹기종기 모였다. 나는 리허설 하는 내내 사고가 터질 조짐이 보이는 곳이 있는지 살피느라 신경을 바짝 세웠다. 일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션 실패 시 데뷔 쇼케이스가 실패한다고 했으니 리허설 땐 아무 일 없는 게 맞다. 하지만 무언가 조짐이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편히 쉴 수 없었다.

메이크업을 고친 뒤 본격적인 기자 쇼케이스 시작 전까지 우리는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잠시 흩어졌던 긴장이 다시 고이는 것 같았다. 리허설과 다르게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첫 번째 무대였다.

솔직히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 다시 시작된 인생.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멤버들. 내 그룹 디아스의 이름을 걸고 하는 첫 번째 무대였다.

“하온아.”

“네?”

“잠깐 너 좀 안아 보자.”

“……네? 갑자기 왜요?”

저 형이 미쳤나. 왜 갑자기 나를 안아 본대?

“떨려서 그래.”

남자와 신체 접촉해서 빠지는 건 체력뿐이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래. 뭐. 그 정도야. 유찬 형을 위해 체력 좀 쓰자.

무대 끝내고 이동하는 사이 쉬면 되겠지. 혹시 모르니 체력을 볼 수 있게 바꾼 뒤 대답했다.

“그게 도움 된다면요.”

유찬 형한테 반걸음 다가갔더니 형이 나를 품에 포옥 안았다. 생각보다 세게 끌어안아서 조금 답답했는데 온기가 좋았다.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야. 이런 게 의지한다는 건가?

“하, 긴장 좀 풀리는 것 같다.”

데우스세요? 내 생각 읽힌 줄 알았네.

응? 잠깐. 방금 체력이 일 올라간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혹시 몰라서 체력을 예의 주시하던 때였다.

“어? 그럼 나도.”

갑자기 정이한이 합류했다. 뒤에서 나와 유찬형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대기실 끝에서 혼자 캠에 대고 주절대던 이서호가 우릴 보고선 와다닥 달려왔다.

“뭐야! 나도!”

이서호는 유찬 형과 정이한의 목에 팔을 걸고 허리를 숙여 우리를 바짝 밀착시켰다. 강현 형 빼고 다 모였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강현 형! 형도 와! 빨리!”

이서호가 마지막 멤버를 불렀다. 저 형이 합류할 리 없잖아.

“…….”

강현 형의 대답이 없다. 내 시야가 꽉 막혀서 보이지 않았지만 한심하게 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웬걸. 유일하게 비어있던 오른쪽 옆구리가 꽉 찼다.

강현 형은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얌전히 우리 곁에 서 있었다. 유찬 형이 날 감싼 팔을 풀고는 강현 형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안녕. 형도 올 줄 몰랐어.

“얘들아. 우리 지금처럼 서로한테 의지하자. 너희만 있으면 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장난기 쏙 빠진 진지한 어조였다. 저렇게 말하니까 리더 같네.

“응!”

이서호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어.”

무뚝뚝한 강현 형의 대답이 이어졌고,

“응.”

듣기 좋은 저음이 내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래요.”

마지막은 나였다. 우리 꼴이 웃겨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 민망한데 뭉클하고. 웃긴데 든든하고.

그 순간 체력이 또 올랐다. 아, 이거.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휴식으로 판정되는가 보다. 그만큼 지금 상태가 좋다는 거겠지?

휴대폰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찰칵찰칵. 우리들이 고개만 돌려 소리 난 쪽을 바라보자 매니저 형이 열심히 촬영 중이었다. 매니저 형을 부르는 유찬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곤 형?”

“응? 난 신경 쓰지 마. 계속해. 계속해.”

그렇게 초를 치시고, 판을 깔아주시면 민망해서 못 하죠. 철면피가 못 되는 사람들은 나처럼 어색해하면서 떨어졌다.

“뭐야? 벌써 끝이야?”

이서호가 아쉬워하면서 유찬 형한테 매달렸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정이한을 등에 매단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황당하네. 지금도 체력이 오르잖아?

잠깐. 뭔가 다른데? 나는 지금까지 체력이 빠지던 상황과 차오르던 상황들을 비교했다. 그러다가 지금 상황이랑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모르는 히든 조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심리적으로 안정감, 포근함을 느낄 때. 그러니까…….

지금처럼 안겨 있거나, 손을 잡을 때. 그때마다 나는 항상 따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휴식으로 인정되는 건가?

아! 맞아.

뮤비 촬영 첫날 체력 회복하려고 벤에서 잤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정이한이 내내 손을 잡아줬고, 일어났을 땐 평소보다 체력이 많이 찼었다. 벤이 편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것도 일종의 힌트였다.

하지만 평소에 멤버들과 연습할 때는 체력이 차진 않았다. 단순히 같이 있어서 심리적 안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거 맞나 봐. 접촉.

“얘들아, 이제 준비하자.”

매니저 형이 우리를 불렀다. 일단 힌트는 얻었으니 차근차근 확인해 보자. 시간 날 때 천천히 확인해도 되는 일은 뒤로 미루고, 눈앞의 서브 미션부터 해결해야 했다.

“아악! 잠깐만! 너희 헤메 왜 그래! 어디 부비적거리기라도 했니? 특히 하온이!”

아. 이런.

이 생각을 못 했네. 내 생각보다 많이 긴장하고 있었나 봐. 우리는 또 한 번 혼나면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해야 했다.

그 뒤 잔뜩 긴장한 멤버들과 함께 무대 뒤로 이동했다. 아직 쇼케이스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우리는 바짝 굳어서 스탭들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꼼꼼히 마이크 팩을 확인했다. 선이 제대로 꽂혀 있는지, 도중에 빠지진 않을지. 내 것을 먼저 체크한 뒤 유찬 형을 봐주려고 했는데 이미 스스로 체크하고 있었다.

“너희도 하온이처럼 마지막으로 체크 해.”

“응.”

“오케이!”

내가 봐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알아서 잘하는 게 더 낫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신뢰해도 이서호만큼은 신뢰할 수 없었다. 체크하는 걸 두 눈으로 좇으면서 확인했다.

“……야, 나 왜 그렇게 봐? 너 나 못 믿냐?”

“응. 너 덜렁대잖아.”

“아오! 아니라고 못 하는 게 억울하다!”

“이리 와. 내가 한 번 더 봐줄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이서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서 저도 불안한지 셔츠를 들어 올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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