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8화 (48/320)

48.

“하온아…….”

매니저 형이 세상 다 죽어가는 얼굴로 날 봤다. 이제 더는 저 험악한 얼굴을 마주하는 게 무섭지 않은 걸 보니 나도 다 적응한 모양이다.

“왜요?”

“너 안색이 너무 안 좋다…….”

그런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딱히 평소랑 다르지 않았다. 햇빛을 못 봐서 하얀 것뿐이다. 체력 회복이 더뎌서 50에서 좀처럼 올라가지 않고 있긴 하지만…….

“다른 애들은?”

“강현 형 없어요?”

“없어.”

안 간다면서! 날 배신하다니!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사이 매니저 형은 불안한 듯 계속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없는 형들을 찾고 있었다. 내 감정은 살짝 뒤로 미뤄둔 채 어제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해주자, 매니저 형이 경악하면서 서둘러 외투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애들 다 데려올 거니까 어디 가지 마. 알았지? 절대 가면 안 된다!”

“네. 그럴게요.”

“어제 일찍 데려다 놨더니 언제 또 간 거야. 내가 못 살아, 진짜.”

흠흠. 나도 공범자라 할 말이 없군. 닫힌 현관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냉동실을 열었다. 배고프니까 핫도그라도 먹, 음. 다들 배고프려나.

냉동실에서 꽁꽁 얼린 국을 꺼냈다. 전자레인지로 해동하면서 즉석밥 돌릴 준비도 했다. 냉장고에는 우리 숙소와 어울리지 않는 반찬이 즐비했다. 멤버들이 집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반찬을 꺼내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해동이 끝난 국을 냄비에 옮겨서 끓이고, 이번엔 즉석밥을 넣어 돌렸다.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갈 때쯤 익숙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아아아아! 안 들린다, 안 들린다아아!”

“……정곤 형, 우리가 잘못했다니까요.”

“내가 계속 말했지? 일찍 쉬라고. 너네 건강 관리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어? 안 했어? 그런데 연습실에서 밤을 새워? 새벽에 강현이랑 하온이 둘만 걸어서 숙소로 돌아와? 그런데 강현이는 또 연습실을 갔어?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어?”

매니저 형이 되게 화났나 봐. 나는 주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멤버들을 엿봤다. 이서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야! 진하온, 이 배신자! 어떻게 정곤 형한테 나불나불 다 불 수 있어?!”

“아침 먹어.”

“……아침?”

“응.”

단순한 이서호가 낚였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세이렌에 홀린 어부처럼 다가온다. 안 그래도 배고팠다면서 신나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뿌듯했다.

“하온이가 아침 준비한 거야?”

창백한 얼굴의 유찬 형이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매니저 형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내가 형들 구해줄게.

“네. 형들 빨리 와서 아침 먹어요.”

살살 웃으면서 손짓했다. 그 사이 이서호는 의자에 앉아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숟가락 든 손이 움찔거렸다.

“왜 안 먹고 그러고 있어?”

“형들도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먹어. 으, 배고파. 너도 빨리 앉아.”

나 생파 할 땐 그냥 뜯더니? 아! 그때도 먼저 먹진 않았었구나.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진짜 가정교육 하나는 착실하게 잘 받았다니까. 애가 철이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에요.

답지 않게 냉장고를 뒤져가며 아침을 준비해 놓은 덕에 매니저 형의 잔소리 폭격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정곤 형도 같이 먹어요. 하고 불렀더니 슬그머니 우리 식탁에 합류했다.

“너희, 오늘은, 오? 이거 맛있네. 절대, 못 나가.”

먹거나 말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나는 일부러 매니저 형한테 반찬을 더 밀어줬다. 많이 드세요.

나름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끝났다. 다들 맛있게 잘 먹는 걸 보니 충만함이 들었다.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을 이런 식으로도 느낄 수 있구나. 요리라도 배워볼까. 밥 먹는데 쓰는 시간은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조금 바뀐 아침이었다.

평화로운 식사가 끝난 후 매니저 형은 다시 우리를 모아놓고 잔소리를 했다. 데뷔 쇼케이스가 코앞인데 건강 관리 제대로 못 한다면서 혼났다. 앞으로는 매니저 형이 우리 연습 시간을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기껏 아침 먹였더니 억울하다. 2절이 있을 줄이야…….

***

4월 4일. 데뷔 쇼케이스를 이틀 앞두고 드디어 메인 미션이 완료됐다.

<시스템: 메인 미션 완료! 보상으로 포인트 1,600이 지급됩니다!>

이거 실패하는 줄 알고 남들 모르게 식은땀 질질 흘리고 있었다. 계속 S만 나와서 이대로 등급 2단계 하락인 줄 알고 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다. 멤버들은 내가 데뷔 때문에 긴장한 줄 알더라.

<시스템: 메인 미션 5회 완료로 주간 미션이 삭제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인 미션 5회 완료로 서브 미션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주간 미션 없어졌다. 계속 못 하고 있어 신경 쓰였는데 아예 없어지니 서운했다. 할 수 있을 때도 40포인트 못 받는 거잖아. 대신 서브 미션이 생겼으니 괜찮으려나.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지. 일단 새로운 미션이 뭔지 확인이나 해보자.

<메인 미션>

─ 데뷔곡으로 음원 차트 100위 이내에 들기

O 성공 시 1,000 포인트 획득

O 실패 시 가장 높은 스탯 등급 1단계 하락

<서브 미션>

─ 데뷔 쇼케이스 돌발 상황을 극복하라! (0/1)

O 성공 시 데우스 선물 상자 x1 획득

O 실패 시 데뷔 쇼케이스 실패

서브 미션 실패 시 뭐라고? ‘데뷔 쇼케이스 실패’라는 단어가 눈에 콱 들어왔다. 모든 신경과 사고가 좁아지는 것 같았다.

잠깐 진정하자. 차근차근 생각해.

일단 메인 미션은 예상 범위다. 1위 미션 안 나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가장 높은 스탯이면 지금 나한테는 매력이고, 실패하면 S-가 된다는 거지. 일단 알았다.

문제는 서브 미션이다. 서브 미션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메인 미션 패널티가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일 정도였다. 데뷔 쇼케이스 돌발 상황?

우리 데뷔 쇼케이스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나는 오후 4시에 진행하는 기자 쇼케이스. 그리고 두 번째는 오후 8시 엔터로 광장에서 하는 야외 쇼케이스. 데뷔 전에 모은 팬덤이 적은 만큼 팬 쇼케이스를 대신하는 공연이었다.

둘 중 어디서 돌발 상황이 생긴다는 거지? 그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일단 미션으로 나왔다는 건 내가 대응할 순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것 중 생길 수 있을 만한 돌발 상황이…….

음향이나 마이크가 안 나오는 것, 동선이 꼬이는 것. 누군가가 넘어지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애초에 우리는 공개되지 않았기에 기자가 물어뜯을 구석도 없다. 주목도가 낮으니 어그로 끌어 봤자 소용없잖아.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무대에서 공연하는 도중에 무언가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하지만 애초에 원인이 뭔지 모르는 이상 무얼 상상하더라도 오답이었다.

“진하온 뭐하냐? 왜 그렇게 심각해? 데뷔 쇼케 할 생각에 떨려 죽겠어?”

“……너는 걱정 없어서 좋겠다.”

“뭐? 야이씨, 왜 갑자기 시비야!”

“맞잖아. 아니면 무슨 걱정거리 있어?”

이서호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잠깐 “음. 으음. 으으으음.”하면서 고민하는 척한다. 그래 봐야 없다는 거 다 알아.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시비 아니지?”

“그……러네?”

“응. 그럼 가.”

지금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이서호는 뭔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면서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금세 유찬 형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들러붙는다.

서브 미션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다.

정말 내가 대응할 수 있을까? 데뷔 쇼케이스 실패하면 어떡하지? 나는 익숙하지만 멤버들은 아니잖아.

솔직히 데뷔 쇼케이스는 ‘우리 이제 시작합니다!’하고 공식으로 땅땅 선언하는 게 다다. 실패한다고 문제 될 건 없다. 크게 책잡힐 일만 아니면 출발이 잠깐 삐끗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멤버들이 의기소침해질 게 뻔하기에,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었다. 답도 없는 걸 열심히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하온아, 많이 힘들어? 누울래?”

이번엔 정이한이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정이한이 마주 웃어 준다. 방긋방긋. 아주 예쁜 미소였다.

그래. 일단 좋은 점부터 생각해보자. 첫 음방 보다는 차라리 데뷔 쇼케이스에서 일 터지는 게 낫다. 규모가 다르니까. 그리고 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언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불시에 기습당하는 것과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로 당하는 건 차이가 있잖아.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면 된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미션으로 나온 거라고 믿자. 그게 아니면 농락하는 거잖아. 분명 이 시스템은 나를 도와줄 가이드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지. 나를 믿자.

그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역시 연습뿐인가.

“강현 형! 우리 연습 시작해요!”

“어.”

“가자아!”

이서호가 파이팅 넘치게 소리 질렀다.

***

4월 6일. 기자 쇼케이스장에 도착하자마자 매니저 형은 우리를 대기실에 몰아넣었다.

“그럼 얘들아 쉬고 있어. 무대 체크 좀 하고 12시까지 도시락 챙겨 올게. 점심 먹고 간이 리허설 할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네.”

딱딱하게 굳은 유찬 형은 다 낡아빠진 로봇처럼 굴고 있었다.

“하아……. 미치겠다. 긴장돼.”

유찬 형이 연거푸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직 메이크업 받기 전인 게 다행이었다. 몇 번째 한숨이야.

“으으으으으!”

이서호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앓는 소리를 내며 뱅글뱅글 돌았고, 정이한은 내 옆에 딱 달라붙은 채 팔을 꼭 붙들고 있었다. 조금 무거웠지만 손이 차가워서 내버려 두었다. 강현 형은 무덤덤해 보였지만 아까부터 계속 같은 동작의 춤을 반복해서 추고 있었다.

결론은 모든 멤버들이 계속 정신 사납게 구는 중이라는 거다. 나는 오늘 터질 돌발 상황이라는 게 대체 뭘지 신경 쓰여 죽겠는데.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체력이 더 빨리 빠지고 있었다.

“……하아.”

또다시 유찬 형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거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어쩌면 돌발이 멤버 실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멘탈 유지보수로 회피할 수 있겠지.

어떻게 해야 자신감을 회복할까. 우리는 연습을 오래 했다. 과장 좀 50%쯤 보태면 이제는 눈 감고도 대형을 맞출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연습했으니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노래만 나오면 즉각 반응할 수 있을 텐데.

…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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