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주말 계획은 글렀으니 물 마시고 체력 회복이나 하자. 강현 형 있을 때 많이 배워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생수통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강현 형이 굴려준 거였다. 곧장 주워들어서 벌컥벌컥 비우고 있을 때였다.
“너는 괜찮아?”
“네? 뭐가요? 제 체력이요? 문제없어요. 쉬면서 하는 거니까.”
“그거 말고. 나한테 지적받는 거 괜찮냐고.”
이상한 말을 하네. 지적이 아니라 코칭이잖아? 아, 어감이 다를 뿐 같은 의미긴 하구나. 당연히 괜찮지. 나는 무해한 미소를 곁들여서 끄덕였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데 당연히 괜찮죠? 형 덕분에 제 실력 많이 늘었거든요. 저 진짜 고마운데. 형 귀찮을까 봐 미안하긴 하지만.”
“……안 귀찮아. 내일도 나와.”
그렇게 말하는 강현 형의 귓불이 조금 붉게 변해 있었다. 고속버스 기사님의 무료 버스 운영 소식에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지금은 그렇겠지.”
속삭이듯 지나간 작은 목소리였다. 내 귀에 분명히 들렸지만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딱히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냥 못 들은 척 생글생글 웃었다.
점심은 둘 다 가볍게 편의점 주먹밥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춤을 췄다. 덕분에 주간 미션도 클리어했다. 라이브로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미친놈처럼 췄더니 조금 이상한 눈으로 보긴 했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 포인트가 280이 되었다는 거니까.
***
일요일에는 노래를 바꿨다. 고작 그 정도가 네가 원하던 수준이었냐는 눈칫밥을 좀 먹긴 했지만 뻔뻔하게 나갔다. 결국 강현 형도 네 수준에 그 정도면 잘하긴 했지. 라면서 허락해줬다.
그렇게 일요일은 온종일 다음 주 미션 곡을 연습하면서 보냈다. 경험치가 쑥쑥 올라가서 일요일 저녁 11시가 되었을 땐 대략 95%까지 채울 수 있었다.
몇 시간 더 하면 춤 스탯을 B까지 올릴 수 있는데, 강현 형이 숙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나도 그만뒀다. 혼자 하는 건 효율이 별로였거든. 한 번 버프 맛을 보면 노버프는 재미없어지는 법이다.
월요일에 부족한 경험치를 채우려던 나의 원대한 계획은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다. 오후 2시 즈음 실장님이 우리를 전원 소집하셨기 때문이다.
곰치 때문인가? 그런데 왜 데뷔 조 멤버들 전부 오라는 거지? 조금 신경 쓰여서 유찬 형을 힐끔거렸다. 형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줄 뿐이었다.
실장실에는 이서호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연습실에 있던 나와 유찬 형, 강현 형까지 도착하니 꽉 찼다. 나머지 한 명이 아직 안 왔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날, 세상 우울함은 다 안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뒤로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못 봤으니 도망쳤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다.
실장님은 우리를 쓱 훑어보더니 누군가에게 내선 전화를 걸었다. 이한이 좀 불러주세요, 라고 하는 걸 보니 회사에 있긴 한가 보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것 봐서는 한두 번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한이까지 오면 말할게.”
“네.”
우리는 준비된 의자에 조르륵 앉았다. 잠시 후 정이한은 실장실 문을 두들긴 뒤 허락까지 받고 들어왔다. 되게 예의 바르네. 생긴 거랑 진짜 다르다니까. 얼굴만 보면 문 벌컥 열고 인상 찌푸리면서 건들건들 들어올 이미지인데 말이지.
“다 모였네.”
실장님의 밝은 미소를 보니 곰치 이야기는 아닌 듯싶었다. 실장님은 우리를 한 번씩 쓱 훑어본 뒤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 왠지, 어쩌면……!
나의 남다른 촉이 뾰족뾰족 솟아올랐다.
실장님은 가타부타 말없이 노래 한 곡을 재생시켰다. 이거 내가 부른 거다. A-로 승급한 뒤에 실장님 앞에서 불렀던 노래였다. 나 메보 시켜 줄 건가 봐!
데뷔 조 모아놓고 내가 부른 노래 들려주는 이유가 뭐겠어? 당연히 공식적으로 내 포지션을 발표하기 위해서겠지. 나름대로 추론을 끝낸 나는 합리적인 김칫국을 들이마셨다.
잔잔하게 시작하는 도입부가 지루할 수 있는데, 멤버들은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블라인드 평가받는 거 같다. 이거 되게 긴장되네.
한 단계씩 음이 높아지고, 후반부에서는 길고 높은 고음 파트가 이어졌다. 아, 음정이 조금 흔들렸어. 더 깨끗하게 뽑아낼 수 있을 텐데……. 노력하자!
“아!”
1절까지만 들려주고 끊자 이서호가 아쉬워했다. 내가 부른 걸 알고 있긴 한 건가? 나는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확 달라지는 편이라 이서호라면 모를 것 같긴 했다.
“아쉽니? 더 듣고 싶어?”
“네! 더 듣고 싶어요!”
“그래? 다른 애들은?”
유찬 형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귀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네요. 뭐 하나 거슬리는 거 없이 맑고, 매끄러워요. 노래가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내용이라 맑은 보이스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오히려 맑아서 더 슬프게 들린 것 같아요. 순수한 슬픔이요.”
이 형 미친 거 아니야? 뭐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감상을 말해? 몸 둘 바 모르겠네. 누가 작곡에 재능 없다고 할까 봐 지금 이러는 건가?
“강현이는 어땠어?”
“이런 노래는 취향 아닌데 집중하게 했어요.”
“이한이는?”
“좋았어요. 또 듣고 싶을 만큼.”
유찬 형에 비하면 짧게 끝났지만 내 가슴은 울렁울렁 난리가 났다. 자꾸만 요동치는 심장이 곧 폭발할 것 같아서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모여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감상을 말하지 않은 건 나뿐이라서 내게 시선이 집중된 모양이었다. 홧홧한 열감이 얼굴에 쏠렸다.
팔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낯부끄럽다는 게 뭔지 체감하다니……. 이번 삶은 여러모로 놀라운 게 많다.
실장님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멤버들의 주의가 실장님에게로 옮겨간 타이밍에 맞춰 슬쩍 고개를 돌린 순간 유찬 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유찬 형의 눈매가 놀란 듯 동그래졌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면서 휘어졌다. 이 형은 알아차렸군.
“하온이 메인 보컬로 손색없겠지?”
“자, 잠깐만요! 그럼 저거 진하온이 부른 거예요?”
이서호는 기함했고, 강현 형은 나를 한 번 힐끔거린 게 전부였다. 그리고 정이한은 왜인지 모르지만 고개를 숙였다. 메인 랩퍼라서 나랑 포지션도 안 겹치는데 왜 저런 반응일까.
“응. 하온이가 부른 거야. 참고로 이건 처음 오디션 보러 왔을 때.”
실장님이 마우스를 딸깍거리자 이번엔 내 쪽이 난리 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에 엎드리다시피 실장님을 보면서 애원했다.
“안 돼요!”
우리 실장님은 참 짓궂기도 하시지. 오디션에서 부른 내 노래가 가감 없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 얼굴은 이제 삶은 문어처럼 되었을 게 뻔하다.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고개를 파묻었다. 흑역사를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게 어딨어?
“……하온이 대단하네.”
감탄하는 유찬 형의 말에 열기가 머리끝까지 확 치솟는 게 느껴졌다. 스탯 빨인데 민망함은 왜 내 몫인가…….
아니지. 전생의 내 실력은 스탯으로 올린 지금의 실력보다도 좋았으니까 내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먹기로 했다. 그렇게 나를 달래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얼굴 뜨거워…….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겠지? 물론 이렇게까지 급속도로 크려면 재능의 영역도 있긴 하지만,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안 되거든. 너희도 알잖아.”
“알아요.”
이번에 대답한 건 의외로 강현 형이었다.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고역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저희 연습생 중에도 많아요. 당장 정태 형만 하더라도 진하온보다 잘 부를걸요.”
이서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오히려 고마웠다. 드디어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온이보다 잘 부르는 애들이 몇 명 있긴 해. 하지만 음색이 특색있고 예뻐. 게다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건 다들 느꼈으니 알겠지.”
진지해진 실장님의 목소리에 나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잠깐 말을 멈춘 실장님은 이서호를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이서호가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 돌렸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었다. 암묵적인 동의에 실장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을 이으셨다.
“하온이는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디아스 메인 보컬이야.”
디아스. 그룹명도 정해져 있었구나. 다른 멤버들 반응을 보니 내가 합류하기 전부터 정해진 것 같았다. 아무렴 어때!
“네! 열심히 할게요.”
굳은 의지를 담아 또박또박 대답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실장님에게서 나를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계획은 전부 취소다. 춤에 투자할 포인트 따위 없다. 모든 포인트는 노래에 투자해야 한다. 최소한 내 귀로 들었을 때 전생의 내 실력만큼은 올려야 했다.
“중요한 용건이 아직 남았어.”
실장님은 데뷔 조 전원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은 뒤 말했다.
“너희 데뷔일은 3월 말이나 4월 초로 생각하고 있어. 싱글앨범 1집으로 타이틀곡 포함해서 세 곡 정도 받을 거야. 하지만 아직 곡, 안무, 컨셉 정해진 게 없어서 빠듯한 일정이 될 거야. 잘 따라올 수 있겠니?”
“네!”
대답한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정이한은 침묵했고 이서호는…….
“재혁 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토해낸 목소리가 침울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실장님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듯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실장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호야, 이야기했잖니. 재혁이는 같이 못 해.”
“이유도 제대로 말씀 안 해주시는데 어떻게 포기해요…….”
“말하면 믿을 거고?”
“……네.”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 간 목소리는 ‘아니오.’처럼 들렸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는 것 같더니만, 기어코 눈물이 이서호의 뺨을 타고 흘렀다. 교주가 그렇게 좋은가.
어떤 짓을, 어떻게 했길래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걸까.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다. 사람을 저렇게 홀리는 것도 재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