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6화 (26/320)

26.

‘하지만 똑똑한 유찬이마저 이렇게까지 휘둘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명백한 증거가 없으므로 방출한 연습생의 뒷이야기를 흘린들 회사 이미지에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SR은 침묵했다. 그 덕에 준재혁은 어렵지 않게 새로운 소속사에 들어갔고, 올 상반기 데뷔가 확정된 아이돌 그룹의 마지막 멤버로 합류했다고 들었다.

언제가 되었든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그때 또 휘둘릴 거라면 처음부터 버리고 가는 게 맞다. 억지로 하는 설득은 그때뿐이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 이상 반복될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유찬이는 데려갈 수 있겠어.’

「실장님, 하온이 저희 숙소로 옮기면 안 되나요? 진수랑 같이 있는 거 같은데 진수도 재혁이 엄청 따랐거든요. 진수가 가끔 과격한 행동을 해서 걱정돼요. 저랑 같은 방 쓸 거니까 다른 애들이랑 크게 엮일 일 없을 거고, 서호는 제가 설득할게요. 자꾸 마주쳐야 친해지잖아요. 그럼 다른 애들도 오해란 거 깨달을 거예요. 하온이 좋은 애니까.」

박유찬의 말이 얼마나 기쁘던지. 얘는 됐구나, 싶었다. 낯선 사람이 가득한 숙소가 불편하다고 했으니 한 명이라도 편한 사람이랑 같은 방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해 허락했다.

박유찬의 말처럼 부대껴야 친해지는 것도 맞는 말이니까. 그걸 솔선해서 해보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김진수.

김혜미 실장이 아드득 이를 갈았다. 전민수 팀장은 연습생 리더로서 아이들을 잘 다스리고 친근감 있는 성격이라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김혜미는 데뷔 조만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 연습생은 평가 때만 보기에 개개인의 성향을 몰랐다. 그저 전민수 팀장이 올리는 보고서만 읽어볼 뿐이었다. 김진수가 준재혁을 따른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 숙소에 넣지 않았을 거다.

‘내 실책이야.’

진하온은 억울하게 휘말린 피해자였다. 그걸 알면서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 침묵했다. 그냥 내치기에는 아까운 원석들이라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

김혜미는 진하온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생긴 애꿎은 피해자는 원망 어린 시선 한 번 보인 적 없었다. 자신이라면 이런 더러운 기획사 박차고 나갔을 텐데.

오히려…….

「그럴게요.」

차 안에서 이야기할 때 깊게 가라앉아 있던 그 애의 눈동자는 분명 제 말의 속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었다. 나가지 말라는 말에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애정이 묻어나는 눈동자가 가슴을 콱 찔러왔다. 미워해야지. 싫어해야지. 이딴 데 싫다고 도망쳐야지. 그런데도 저를 좋아해 주는 진하온이 사랑스럽고, 미안하다.

“으아아아! 미치겠네. 하온아, 너는 왜 그렇게 순해 빠져서……!”

김혜미는 깔끔하게 빗은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마구 헝클어트렸다. 진하온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데뷔 조를 꾸리는 게 낫다. 하지만 손수 찾아내 여기까지 키워낸 애들이 아까웠다. 죄책감이 가슴을 콕콕 찔러왔다. 어쨌든 여기는 회사다. 이익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후우…….”

감정에 휘둘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도 나아가고 있어.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하자.’

김혜미는 엄마처럼 멤버들 한명 한명을 챙길 수 없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멤버간의 유대감은 회사가 만들어 줄 수 없지만, 판을 짜줄 순 있었다. 서랍에서 검은색 머리끈을 꺼내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다.

‘지켜보는 기간 포함해서 가장 빠르게 준비하면 4월이려나.’

김혜미는 달력을 보면서 일정을 가늠했다. 일단 데뷔 준비 시작하고, 지켜보자. 데뷔라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함께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를 파악할 시간도 늘어날 거다.

그러면 서호가 하온이를 보는 눈도 바뀌겠지.

진하온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 깨끗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뭐든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따라서 웃게 해준다.

정이한도 멤버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존감이 회복될지도 모른다. 남의 마음을 짓밟는 애들은 없으니까. 잘 되면 4월에 데뷔하는 거고, 아니면 미루는 거고.

대표가 정한 데드라인은 6월이었다. 6월까지 바뀌지 않는다면 방출할 것. 그리고 새로운 멤버를 영입해 데뷔시킨다. 현재 확정된 멤버는 박유찬, 백강현, 진하온. 단 세 명뿐이었다.

‘지금 연생 중에는 이한이랑 서호만큼 저 세 명과 어울리는 애가 없어. 누굴 세워놔도 묻힌단 말이야. 비주얼 합, 실력. 모두 버리기 아까운 애들인데…….’

진하온을 마지막으로 완벽한 그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물에 흠뻑 젖어 있는 채였다. 깨끗하게 마르면 좋겠지만 흉하게 우그러진다면 새로운 도화지로 바꿔야 했다.

‘으음. 그런데 왠지 잘 될 것 같단 말이지.’

진하온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귀인 같았다. 4월 데뷔, 그리고 신인상까지. 느낌이 좋았다.

***

일찍 잔 덕에 누구보다 빨리 일어난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막 오전 6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체력이 꽉 차 있는 걸 확인하곤 바로 움직일 생각으로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반대편 침대의 유찬 형은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은 바른 자세로 자고 있었다. 귀 기울여야만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조용했다. 룸메이트로서 최고였다.

나는 방에서 나가기 전 엿보기 스킬을 사용했다.

[박유찬]

재능: 작곡의 마에스트로가 될 자격 있어요!

개화 조건: 불안정한 정신은 독이에요!

한마디로 작곡에 재능있는 두부 멘탈이라는 소리네. 만들어 둔 노래 있으면 들어보고 싶다. 나중에 한 번 물어볼까.

스킬 사용으로 체력 50이 떨어졌으니 보충하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작은 식탁 위에 시리얼 박스가 놓여 있었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건가? 이 새벽에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일단 먹고, 주인 있는 거면 사다 두면 되겠지.

아침도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서 쉬다 보니 체력이 30 정도 회복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는 곧바로 숙소를 나섰다.

***

연말은 연말이었다. 꼬마전구를 휘감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나무들이 밤새 번쩍거리며 빛났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졌다.

많이 내리려나. 쌓이면 길 막힐 텐데. 이따 숙소 돌아갈 때 막차 타야겠다.

곧장 올라가 텅 빈 연습실에서 나 혼자 열심히 춤 연습을 시작했다. 느릿느릿 기어 올라가는 춤 스탯 경험치를 열심히 채우다가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어? 형 오셨어요?”

“…….”

날 발견하고 잠깐 멈칫한 백강현은 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언제 왔냐고 물었다. 연습실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반쯤 됐어요.”

“일찍 왔네.”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요.”

대충 대답한 뒤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내 노래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겨우 박자를 맞추는 정도인 어설픈 동작이었다. 하지만 백강현은 그것만으로도 곡을 알아차리고는 연습실 스피커와 연결해 줬다.

“스피커 이용할 줄 몰라? 아니면 이어폰이 편해서 그래?”

“아는 데 써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의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내가 써도 되는 거구나. 확실히 전생과 대우가 다른 점이 많았다.

“다음부턴 스피커 쓸게요.”

“눈치 안 보는 것 같더니 이런 걸 신경 써?”

“저 눈치 많이 보는데.”

백강현이 코웃음 쳤다. 안 믿네. 진짠데. 나만큼 눈치 많이 보는 사람도 없을걸?

“그런데 언제까지 이 노래만 할 거야? 지겹지 않아?”

“제 마음에 들 때까지 할 거예요. 조금씩 나아지는 거 보면 재밌어서 지겨운 건 잘 모르겠어요.”

미션 통과해야 그만두지. 노래 계속 바꾸면 주간 미션 더블 포인트는 포기해야 한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더니 날 구경하던 백강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

말을 안 한다. 뭐냐고.

“왜요? 할 말 있어요?”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할 말이 무궁무진해 보이는데.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저 신경 안 써요.”

“……그래?”

“네. 뭔데요? 궁금하니까 말해줘요.”

“‘안개 속에 숨은’ 부분 착지할 때 무릎 각도를 조금 더 낮추는 게 좋겠어.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연계 동작이 어색한데, 박자를 좀 더 쪼개서…….”

할 말이 이거였나? 이런 거라면 쌍수 들고 환영이지. 나는 가르쳐 준 대로 열심히 동작을 고치면서 “이렇게요?”하고 되물었다. 백강현의 마음에 찰 때까지 동작을 고치고, 반복하고 연습하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났다.

백강현은 좋은 사람이다. 그것도 무척, 매우. 그래서 백강현도 형이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 춤 스탯을 S 등급까지 태워줄 고속버스 기사님이시니까! 응당 연장자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차가운 바닥재가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게 기분 좋았다. 강현 형이 쯧, 혀를 한 번 차더니 내 쪽으로 수건을 휙 집어 던졌다. 가슴팍에 올라온 수건을 고맙게 받아 썼다.

“너 체력 너무 쓰레기인데.”

“알아요. 고질병인가 봐요. 아무리 해도 안 늘어요.”

미션 3개를 더 깨야 체력을 올린다. 하지만 우호도 미션은 내 발목을 꽉 잡고 있다.

“그런데 형.”

“어.”

“이번 주말에 약속 있으세요?”

“왜.”

형의 스케줄이 궁금하니까. 강현 형이 도와주면 이번 주말 안에 춤 스탯을 B까지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춤을 B+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B에서 B+로 올리려면 600포인트가 필요하고, 지금 나한테는 240포인트가 있다. 이번 주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료하면 280포인트가 된다. 경험치 좀 채운 뒤 부족한 건 포인트 써서 올릴 계획이다.

뚝딱이는 될 수 없다. 자존심이 있지.

“부탁이 있어서요.”

“무슨 부탁.”

“어디 안 가시면 오늘이랑 내일 저랑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왜.”

“왜긴요. 지금까지 우리 한 거 하는 거죠.”

형이 물끄러미 날 내려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차인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계획을 며칠 미루고, 월요일 되자마자 댄스 트레이닝 받고 싶다고 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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