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는 잠시 눈을 감고 18살 소년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이곳에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네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혹시 내 말이 데우스에게 들린다면 전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감정을 추스른 뒤 조심스럽게 교복을 옷장에 걸어 두었을 때였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창 하나가 떠올랐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여러 개의 단어들이 룰렛처럼 미친 듯이 돌아가다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제야 쓰여 있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빈혈 / 기절 / 두통 / 발열 / 호흡곤란 / 근육통>
빙글빙글 돌아가던 글자가 ‘근육통’에서 멈췄다. 전신이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두말할 것 없이 근육통 증상이었다.
“아니…….”
상태 이상이라는 게 이런 거였어?
딱 봐도 사람들 앞에서 터졌다간 곤란해질 증상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 뭐. 성장 속도 두 배를 거저 주진 않겠지.
<시스템: 조건을 만족하여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있을 건 다 있네. 상태 이상을 겪어서인지, 기억을 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이 생겼다. 근육통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 스킬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어차피 상태 이상 터지는 조건도 확인해야 했다.
“억, 윽, 악!”
무시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프지 않다고는 안 했다.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한 게 강도가 장난 아니었다.
인고 끝에 스킬을 눌렀다. 총 네 개의 스킬이 있었다.
죽어도 고(F): 죽을 때까지 집중한 당신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스킬 발동 시 체력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단, 스킬 종료 후 체력이 일괄 소모되며 남은 체력이 0 이하가 되면 상태 이상에 걸립니다.
스킬 유지 시간에 따라 종료 후 소모되는 체력 수치가 달라집니다.
쓸모 있어 보이는 것 하나. 잠깐 켜보려고 했는데 아직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색이 희끄무레한 걸 봐서는 비활성화된 것 같기도 하고. 사용하려면 조건이 따로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체력’이 있었지? 상태 창을 불러서 확인했더니 뭘 했는지 모르지만 80이 남아 있었다.
상세 정보를 살펴보니 주절주절 많이 써 놨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힘들면 떨어지고 쉬면 오른다는 거였다. 0이 되면 상태 이상 발동!
제일 웃긴 건 체력에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한 신의 안배.’라고 아주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죽는 것보다는 상태 이상이 낫지. 정말 나은 건진 모르겠지만 죽는 것보다 나은 건 맞으니까. 혼란하다.
일단 다음 스킬.
돌려돌려 돌림판~ (F): 이건 그냥 주는 합격 목걸이.
체력 100, 포인트 40을 소모해 랜덤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1000 / 2%: +500 / 5%: +300 / 45%: +55 / 30%: -60 / 10%: -80 / 5%: -300 / 2%: -500
가챠다. 진짜 도박 좋아하는 신이야. 헛웃음을 흘리면서 확률을 살폈다. 성공과 실패의 폭이 무척 컸다. 40이면 주간 퀘스트 두 번 완료한 포인트인데? 더블로 가면 한 번이고.
이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요구 체력 100이다. 가챠 한 번에 상태 이상 한번. 하지만 45% 확률로 15를 더 먹을 수 있는데 안 하고 배겨?
일단 생각해보고 다음.
데우스의 축복: 인생에서 단 한 번, 가장 간절한 순간 데우스가 소환됩니다. 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이루어줍니다.
데우스가 다음에 보자, 라고 한 게 바로 이 스킬을 염두에 둔 건가? 죽은 뒤에 또 만나자는 줄 알았네.
마지막 스킬.
데우스의 은총: 황금색 신들의 게임이 종료되었을 때 육체를 제공한 영혼과 게임에 참가한 영혼이 구제됩니다.
단, 참가자가 게임을 중도 포기하거나 실패했을 경우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대상: 진하온, 박유연
보상: 영혼에 신의 은총이 새겨집니다. 영원한 윤회의 고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원래 네 이름이 유연이었구나. 유연이. 유연이. 동글동글한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봤다.
이제야 데우스가 말했던 재구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박유연이라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나로 바뀌었다. 박유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성공하는 거다.
유연아, 영원한 윤회의 고리래. 마지막 순번이 돌아오지 않는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번 삶처럼 슬프고 아픈 일 없게 해줄게.
나는 퐁퐁 샘솟는 의지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근육통에 신음하면서 널브러졌다. 이거 장난 아니네.
***
근육통 상태 이상은 꼬박 하루 동안 지속됐다. 상태 이상에 걸렸을 땐 다행히 체력 감소가 없었다. 대신 경험치도 안 오른다.
어쨌든, 덕분에 하루종일 근육통에 시달리면서도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치를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이었다. 내가 살던 곳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있었다. 가령 같은 사람이 있다면 대중에 노출된 성격과 업적은 유사했다. 다만 시기의 차이는 있었다.
그건 지역 명사, 드라마, 프로그램, 영화, 가수, 아이돌도 마찬가지다. 인천 부평구 대신 인천 부진구가 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방영된 적 없는 대신, K-pop 오디션 프로그램은 있다. 그리고 1군 아이돌 그룹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전 세계에 없었던 테오스라는 그룹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알아둬야 할 아이돌 족보를 정리하고, 히트곡 노래를 플레이 리스트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획사 정보를 뒤졌다. 내가 오디션 볼 기획사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원하는 기획사를 찾아낸 뒤 알아둬야 하는, 나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유명했던 프로그램들을 속성으로 공부했다. 대충 특징만 알면 되니까 너튜브에서 유명한 클립 위주로 봤다.
상태 이상이 풀린 뒤에는 밖으로 나갔다. 은행에 가서 비밀번호를 바꾸고, 새로운 계좌도 만들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했다. 유연이 옷이 애매하게 헐렁해서 어쩔 수 없이 트레이닝복도 두 벌 샀다. 뛰다 보니 바지 허리 부분이 자꾸 흘러내려 곤란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야 나는 휴대폰을 살폈다. 총 네 개의 연락처가 있었는데 모두 가족이었다. 당연히 주고받은 메시지, 통화 내역은 거의 없었다. 성이 다른 만큼, 가족관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아버지와 형제들의 성이 모두 ‘진’ 씨로 바뀌어 있었다.
한 가족의 족보가 바뀌어 있는 걸 보니 참 현실감 없었다. 내 성이 바뀌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참가자 아이덴티티 하나는 확실하게 지켜주는구나, 싶다가도 이래서 한 차원에 환생자는 한 명인가? 싶기도 했다. 환생자끼리 잘못 얽히면 그거 생기는 거잖아. 설정 충돌.
그 이후에는 오직 춤과 노래뿐이었다. 홀로 방에 틀어박혀 체력이 허락하는 한까지 춤을 췄고, 노래를 불렀다. 체력이 떨어지면 휴식을 취하면서 다시 회복시켰고, 회복되면 또 반복이었다. 등급 낮은 스탯이 쑥쑥 올랐다.
원 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게 즐거워서 주간 미션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주간 미션 완료!’ 메시지가 떠서 깜짝 놀라 버렸다. B+ 받는 거 어렵지 않아요.
주간 미션은 보너스인가 봐.
***
<시스템: 춤 등급이 C+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메시지가 떴다. 정보 확인!
[F급 진하온(18) - 일반인]
체력: 100
매력: S
노래: C+
춤: C+
연기: F-
작사: F-
작곡: F-
남은 포인트: 40
크! 뿌듯하다. 드디어 춤과 노래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일반인’ 수준이 되었다. 전부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판단을 내린 것이니 틀림없다. 스탯이 낮다고 보는 눈과 듣는 귀까지 낮아진 건 아니다.
나는 힐끔힐끔 ‘남은 포인트: 40’에 시선을 줬다. 딱 가챠 한 번 돌릴 수 있는…….
아니야, 참자. 참아야 해.
주간 미션 깬 뒤로 계속 가챠 생각이 났지만 인내심을 밑바닥까지 긁어와 참고 있었다. 상태 이상에 걸리면 경험치를 못 올린다. 게다가 근육통만 해도 하루씩이나 상태가 유지되지 않았던가. 나머지 상태 이상이 어떨지 모르는 지금은 안 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춤과 노래 스탯이 C+가 되었으므로 내일부터는 밖으로 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가챠를 돌리려면 체력 100이 필요하니까 내일 아침에나 할 수 있다.
메인 미션은 시간제한이 있으니 가챠는 미뤄야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금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스탯 초기화는 피하고 싶거든. 나는 눈을 딱 감고 상태 창을 내렸다. 가챠는 오디션 합격하면 세레머니로 하자.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연습생 오디션인데.
S 스탯인 매력 하나만 믿고 가기엔 조금 불안했다. 매력을 빼고 춤과 노래 실력만 놓고 보면 날 합격 시킬 이유가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돌 오디션이니까.
외모 잘난 애들만 한가득일 테고, 개중엔 춤과 노래 실력까지 겸비한 애들도 적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꿀릴 게 많으므로 오디션은 너무 이르다.
하지만 캐스팅은 다르지. 그건 내 비주얼, 즉 매력 스탯이 먹혀들었다는 소리니까. 취향이 아니어도 호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눈에 띄면 캐스팅될지도 모른다.
캐스팅으로 오디션 보면 웬만하면 합격이고, 지금의 나는 그 웬만한 실력은 된다. 딱 아슬아슬하게 2군에 넣어서 가르쳐볼 만한 실력이니까. 합격만 하면 포인트 500이 들어오니 스탯 올려서 1군도 노려보고.
캐스팅 장소로 점찍어 놓은 카페도 있다. 이따금 SR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매니저가 출몰한다는 곳이었다. SR 엔터 사옥 근처기도 하고, 캐스팅 제의를 받았었다는 SNS 후기 글을 본 만큼 신빙성은 있었다.
춤과 노래 둘 중 하나 B- 올리기 전까진 꼬박꼬박 눈도장 찍어보자. 그때까지 못 만나면 오디션 보는 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