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4화 (4/320)

4.

<메인 미션>

─ 90일 안에 연습생 오디션 합격하기.

O 성공 시 포인트 500 획득

O 실패 시 스탯 초기화

O 남은 기간: 89일

네? 실패 시 뭐라고요?

기껏 얻은 S등급 매력이 초기화된다고? 이거 무조건 성공해야 하네. 아이돌 한다고 했다가 튈까 봐 이런 미션을 넣어 놓은 건가?

합리적 의심을 하면서도, 다른 정보를 더 주워 먹기 위해 부지런히 가이드 창을 살폈다.

메인 미션이 있다는 건 지금 내 인생 자체가 게임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스탯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저걸 깨면 또 다음 미션이 나오겠지. 가령 1군 연습생으로 승급하기나 데뷔 조 들어가기 같은 거. 전부 기간 제한이 있을 수도 있고.

미션 클리어마다 포인트를 얻고, 그 포인트로 스탯을 올리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구조. 성장형 좋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도 나가면 먹히기 딱 좋겠지만, 지금 내겐 불리하다.

미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서바이벌을 할 순 없지. 게다가 서바이벌은 여러모로 하기 싫었다. 정신력 쪽쪽 빨리는 것도 이유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바글바글 모여서 부대끼는 건 정말…….

하지도 않을 거 생각하지 말자. 일단 다음은.

<주간 미션>

─ 노래 1곡 B등급 받기 (0/1)

─ 댄스 1곡 B등급 받기 (0/1)

O 노래와 춤을 같이 해서 B등급 받는 경우 포인트 2배 획득

O 성공 시 포인트 20 획득

O 실패 시 다음 주 미션 진행 불가

고작 20포인트라니. 두 배 뻥튀기해도 40포인트. 이거 어느 세월에 모으냐. 노래랑 춤 같이 하라는 건 노래 부르면서 춤추라는 의미겠지? 라이브 대비 연습인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주간 미션으로는 절대 스탯 못 올린다는 거. 하지만 게이머로서 이런 퀘스트는 절대 못 참는다. 하긴 해야지. 게다가 실패 시에 다음 주 미션 진행 불가라니 안 하면 손해다.

등급평가가 어떤 식으로 될지 궁금해서 동요 한 곡조를 멋들어지게 뽑아봤다. F-라는 스탯 때문인지 내 귀로 듣기에도 영 엉망이었다.

나 원래 노래 잘 불렀다. 메인 보컬이었다고! 이건 너무 처참해서 황당할 지경이다. 스탯이 원래 내 실력까지 죽여버리는구나. 인생 2회차 보정을 바랄 순 없겠네.

<나비야를 완창한 당신!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군요!

최종 등급: F->

F-가 불렀으니까 등급도 F-로 나오는 건가? 그럼 주간퀘 완료하려면 B까지 올려야 한다는 의미? B로 올릴 때까지 못 깨는 거고?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굳은 의지를 담아 다시금 나비야를 불렀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F-였다. 오기가 생겨서 이번에는 나비 소환술을 하듯 무겁고 진득하게 불러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F등급으로 바뀌었다.

내 공략이 열매를 맺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진 것도 잠시, 그저 등급이 F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팍팍하네, 증맬.

<시스템: 노래 등급이 F로 변경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약 올리듯 떠 있는 창을 슥 치워 버린 뒤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동요라서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잘 불렀던 노래를 불러볼까? 내 망돌 시절 활동했던 노래……는 랩을 더럽게 못 하니까 아쉽지만 패스.

뭘 부를지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해주던 노래였다. R&B 스타일의 부드러운 멜로디 라인이 인상적인,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노래. 싱어송라이터였던 권세화가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을 위해 만든 노래라고 했다. 제목은 겨울 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목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노래 가사를 몇 번 곱씹은 뒤 감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탓에 괜히 울컥거렸다. 감정 과잉이 된 것 같아 헛기침으로 털어냈다.

<알 수 없는 노래를 완창한 당신!

비록 수준은 처참했지만 노래에 담긴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최종 등급: C+>

엥? 다른 차원이라더니 노래도 다른가?

겨울 바다 만 한 스테디 송도 없는데, 알 수 없는 노래라니.

아, 맞다. 다른 차원! 갑자기 확인해야 할 것들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18살이니 학교도 가야 할 거고, 가족관계, 오디션 볼 회사도 알아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연예계 활동을 하려면 이 세계의 연예계 족보와 노래, 유명한 프로그램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다. 선배의 노래를 아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이름 외우는 게 쥐약이니 얼굴과 매칭시켜서 이름도 외워야 한다. 그리고 또…….

이리저리 쌓이는 숙제 속에서 혼란함을 느끼다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가자.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보스 목도 딸 수 있으니까.

우선순위를 결정한 뒤 놓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것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내일이 주말인지 평일인지부터 확인하자. 학교는 가야지.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데뷔 후 무단결석했던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거 없다.

나와 같은 마지막 영혼, 비슷한 삶을 살았을 테니 내 성격이 달라졌다고 한들 그걸 알아챌 사람은 없겠지. 그러니 내가 등교한들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휴대폰, 지갑이 있었다. 모두 사용한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의 물건에 손댄다는 생각에 찝찝해졌지만, 확인은 해야지.

11월 28일.

월요일.

휴대폰을 켜자 내일 학교에 가야 한다는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다. 바로 휴대폰을 뒤져 보자니 왠지 거부감이 들어 그대로 내려놓고 지갑을 열었다.

내용물을 살피니 학생증은 없고, 주민등록증이 튀어나왔다. 나는 찍은 적 없는 내 증명사진이 박혀 있었다. 생일도 나와 같았다. 1월 30일. 어쩌면 생일마저 똑같이 바꿔준 건지도 모르고.

“하아…….”

나는 길게 숨을 내쉰 뒤 그냥 외면해 버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의 정체가 동질감이라는 걸 알았기에.

학생증이 없으니 학교를 알아내는 게 조금 더 복잡해졌다. 교복 사진으로 이미지 검색하면 학교 이름은 나오겠지. 몇 반인지는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씩 차근차근하자.

교복을 찾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몇 벌 되지 않는 옷이 단출하게 걸려 있었다. 교복은 투명한 세탁소 비닐에 싸인 채였다. 주름 없이 번듯한 게 여러 날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고 교복을 잡는 순간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급작스럽게 닥쳐오는 현기증에 무릎이 푹 꺾였다. 옷장을 붙잡은 채 현기증과 싸우는 사이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스템: 《돌발 이벤트!》 마지막 미련을 발견했습니다. 강제로 기억이 재생됩니다. 기억 재생이 끝난 후에는 100% 확률로 상태 이상에 걸립니다.>

뭔 소리야. 상태 이상은 또 뭐고…….

***

진소 고등학교.

정문에 걸린 초록색 현판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어 학교의 역사가 느껴졌다. 온통 낯선 거리와 건물이었으나, 기억 속의 나는 익숙한 듯 바닥만 보고도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에 본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벼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양손으로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시선은 자신의 발끝. 터벅터벅 걷는 걸음은 힘이 없었다.

의기소침하게 위축된 모습이 학교 다닐 때 내 모습 같아서 씁쓸했다.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괴롭힘당했었지.

원래 몸의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도 모르지만 지금 어떤 심정으로 등교 중일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적의에 둘러싸인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영혼.

나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바짝 붙어 복도를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복도는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이 보이면 곧장 멈춰 서서 벽을 바라봤다.

한껏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떠는 작은 몸이, 과거 이 몸의 주인이었던 소년이 느꼈던 공포를 보여줬다.

나는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서 있다가 다시 걸어갔다. 복도 입구에서부터 교무실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가 멀었다. 교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마주친 사람들에게 어깨를 치이고, 뒤통수를 맞았으며, 욕설을 들었다.

담임 선생님께 자퇴서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인상을 찌푸린 뒤 한숨 쉬었다.

「진하온, 정말 자퇴할 거냐?」

「…….」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선생님의 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날 물끄러미 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 네 인생은 네 거니까 알아서 해라.」

그게 전부였다. 이만 가보라면서 손을 휘적거리는 모양새가 무척 귀찮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교무실에서 나옴과 동시에 세상이 일그러졌다.

낡은 반지하 원룸.

나는 깨끗하게 교복을 다리고, 비닐을 씌웠다. 옷장 문을 연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인 순간 툭,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떨리는 팔이 교복을 품에 안았다. 뺨에 닿은 비닐은 차가웠다. 서러움과 서글픔이 넘쳐나서 너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

이런 걸 보여주다니.

마지막 미련이랬나. 깨끗하게 다려진 교복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내가 비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를 포기한 게 너의 미련으로 남았던 걸까?

아니,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면 남은 미련은 학교가 아니라 친구였겠지. 괴로워하는 너를 받아줄 한 사람. 그 한 명이면 괜찮았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급작스럽게 치미는 감정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18살의 누군가는 또 다른 나였다. 중학교 내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조금 괜찮겠지. 이 학교에서 벗어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텼을 거다. 나처럼.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시작된 괴롭힘. 내년에는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마저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던 현실. 그 좌절감은 낭떠러지 끝에 있던 우리의 발밑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이 괴로움엔 끝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나도 고등학교 때가 가장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땅의 땅을 파고 들어갔었다. 나와 같은 아이. 18살이면 애지. 아주 작고 약한 꼬맹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저 마지막 영혼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으며 살아왔을 안타까운 녀석은 결국 깊게 팬 상흔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맨질맨질한 왼쪽 팔목이 눈가를 시큰하게 했다.

그런 녀석을 대신해 두 번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내게는 기회가 왔지만, 너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름조차 모르는 녀석이 더욱 안쓰러웠고, 누구도 슬퍼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더 잘 알아서 가슴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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