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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영이 어색하게 웃자, 도훈이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황수영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실장님. 피부에 주름 생겨요.”
“아니,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저한테는 연예인 맞아요.”
그들이 아옹다옹하며 대화를 이어 나갈 때 유리 벽으로 된 복도를 지나가 호텔의 뒤편이 나왔다.
이곳은 도훈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호텔의 뒤편 수영장이었다.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저히 이곳에 최수집 회장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최수집 회장은 도훈의 할머니 장경자와 동갑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트로트가 아닌 힙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조명.
강렬한 비트에 맞춰 흘러나오는 젊은이들의 열기.
여기에 최수집 회장이?
이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여기는 누가 봐도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는 파티 장소였다.
힐끔 무대를 보니 그곳에선 누군가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다른 무대와 다른 것은 멘트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는 점이다.
힐끔 옆을 보니 도훈이 아는 몇몇 얼굴이 들어왔다.
도훈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은?
연예인 아니면 재벌가의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이번은 재벌 3세라 불리는 친구들이었다.
놈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각자 술잔을 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친구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뭐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놈들이 저렇게 눈치만 본다고?
도훈은 힐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순간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곳에서는 재벌 3세 또래의 외국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훈은 이런 광경을 전생에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들 뿐이었다.
도훈이 멀뚱거리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황수영이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러고는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실장님 왜 그래요?”
“수영 씨 지금 이 상황이 대체 뭡니까? 아무리 봐도 최수집 회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 저기 계시네요. 실장님은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저는 최 회장님 비서한테 회장님 어디 계신지 물어보고 올게요.”
황수영은 파라솔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행사 진행 요원처럼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정장 차림에 목에는 신분증을 걸고 있었다.
그 신분증에는 누가 봐도 스태프라는 단어가 적혀 있을 법했다.
“저분이 비서예요?”
“네,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어서요.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 기다리셔야 해요. 그리고…….”
살짝 머뭇거리는 황수영의 모습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음주는 절대 금지예요. 제일 안 좋은 게 음주 공연이니까요.”
“음.”
도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황수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약속이에요.”
“알았으니 다녀오세요.”
도훈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그녀가 떠나자 도훈은 조용히 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는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수집 회장과 만나는 조건은 도훈이 공연을 하는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 약속을 지킬 마음은 반반이었다.
돈을 빌릴 수 있다면 공연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전생이 기억을 떠올려 보면 노래방이나 직원 단합대회에서도 적잖게 마이크를 잡았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깟 노래 한 곡이 대수겠는가?
문제는 이 상황이 너무 낯설다는 점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는다는 느낌적인 느낌?
도훈은 일단 정보 수집을 서두르기로 했다.
도훈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기억은 가물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지 않았던가.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듯 그렇게 도훈은 돌아왔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는 것은 본능이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저벅저벅.
도훈의 구두 굽 소리가 수영장 옆 대리석을 타고 울렸다.
마치 탭탠스를 추듯 도훈은 천천히 걸어갔다.
도훈이 다가가자 그중 몇이 도훈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혹시 이도훈 아니야?”
“그래 나다. 그런데…… 누구?”
“와, 나를 까먹어? 이도훈 너 완전히 빠졌네.”
이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은 꽤나 익숙하다.
하지만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금은 묘한 느낌.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 머릿속에 글자가 일렁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도훈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녀석이 이름은 기억이 안 났지만, 묘하게 불쾌한 감정이 가슴을 파고들어서였다.
말을 마친 녀석은 뒤를 힐끔 돌아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녀석의 표정이 보일 것 같은 것은 착각일까?
녀석이 뒤를 돌아보며 친구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이도훈이 나를 모른다네.”
순간 그곳에서 웃음이 터진다.
동시에 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쫑알대는지, 대화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뭐, 느낌상으로는 지금 이 방 안에 모여 있는 놈들은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유력가의 자식들이었다.
그때 얼굴을 들이밀었던 친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짜식, 쫄기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
도훈은 그제야 녀석의 이름이 기억났다.
그의 이름은 이경민.
할아버지가 재계 순위 30위 안에 드는 태청그룹의 회장이었다.
배경도 배경이지만, 클럽에서는 황태자 소리를 듣는다.
연예인 뺨치고 갈 만큼의 외모와 사기꾼 같은 말솜씨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녀석에게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도훈은 녀석의 버릇이 하나 기억났다.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꼭 내기를 건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뽐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는 행동과도 같았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들 사이에서 벌써 내기가 오간 것 같았다.
내기가 과연 무엇일까?
아마 녀석이 대답해 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경민이 한 걸음 다가왔다.
“너도 내기 한번 할래?”
도훈은 눈매를 좁혔다.
지금은 친구들끼리 내기가 붙은 상황 같았다.
“뭐, 내기는 간단하지. 그러니까…….”
녀석은 랩을 하듯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훈은 그의 설명을 경청했다.
녀석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녀석의 말솜씨는 역시 전생의 기억 그대로였다.
저 말솜씨에 참 많이도 당했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도훈의 감정을 바꿔 놓지는 않았다.
도훈은 그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했고 그 정보로 최수집 회장을 공략해야 했다.
그들에게 들은 이곳의 정체는 의외로 간단했다.
이곳은 지난번에 참석했던 경제인의 모임과 같은 성격의 자리였다.
다만 모인 이들의 나이와 국적이 조금 다르다는 것뿐.
멀리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 무리도 명문가의 자손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경제인의 밤이 경제계의 대표들의 자리라면?
이곳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경제계 꿈나무들의 자리 정도가 아닐까?
여기까지 들은 도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최수집 회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만 후하다는 평가를 뒤집어야 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꽤나 비용을 들였을 것이다.
최수집 회장에게 맞춘 것이 아니라 젊은 경제계 인사들의 취향에 맞춰 파티의 분위기를 꾸민 것이다.
이게 자신에게만 후한 인물이 할 일일까?
분명히 아닐 것이었다.
최크루지라 불리는 최수집은 의외로 사람에 투자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심각한 도훈의 표정에 이경민이 피식 웃는다.
“역시 몰랐구나, 누구한테 끌려온 거야?”
“뭐, 그렇지…….”
“실없기는 여전하네.”
“하하.”
도훈은 웃음으로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자신의 패를 보여 주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도훈은 일부러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이경민의 눈이 살짝 빛났다.
도훈은 그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정보를 더 불든지, 미끼를 물든지…… 둘 중 하나를 기대하며 도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도훈, 너도 내기 하나 안 할래?”
“무슨 내기인지 알아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
“그러니까…….”
이경민이 내기의 내용을 설명했다.
내기는 간단했다.
최수집 회장에게 돈을 빌리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설명을 듣던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바라봤다.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 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을 보고 일석이조라고 할 것이었다.
이경민의 설명에 도훈이 물었다.
“그럼, 내기에 뭘 걸어야 하는데.”
“승자가 지정한 사람은 폭탄주를 원샷하면 돼, 간단하지?”
이경민이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꽤 많은 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내기를 위해서 진열해 놓은 것 같았다.
내기에서 진다면?
앞에 담긴 거대한 화채 그릇에 저기 놓인 술을 다 부어서 통째로 마셔야 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마치 중2병에 걸린 것 같지만…….
“좋아, 대신 판돈을 좀 바꾸지.”
“판돈을 바꾸자고?”
“애들처럼 술 내기를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커 버렸잖아, 친구.”
도훈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쟤 전에 알던 이도훈 맞아?”
“그러게…….”
“경민이가 가만히 있으려나?”
“그러게…….”
그들은 마치 스포츠 경기의 결승전을 보듯 눈을 빛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내기를 제안하는 상황은 그들에게 당연했다.
중2병스러운 말도 안 되는 벌칙.
만약 내기의 승자가 이경민이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그게 싫으면 카드를 일주일 동안 상대에게 맡겨야 했다.
그 후 벌어지는 일에 대한 수습은 온전히 패자의 몫이고 말이다.
이경민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내가 말했잖아, 판돈이라고.”
“그래, 한 5억 정도로 할까?”
이경민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그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전생의 일들이 생각나서 웃은 것이다. 재벌 3세라고 하면 조금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모여 있으면 누구보다도 더 어린애들 같은 것이 그들이었다.
부모 잘 만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갑질에 익숙해진 그들.
도훈은 그들을 훈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훈이 해야 할 것은 비즈니스였다.
도훈의 웃음이 이경민이 미간을 좁힌다.
“왜 웃어?”
“내가 말했잖아. 우리가 너무 커 버렸다고. 우리가 큰 만큼 판돈도 올리는 게 어때?”
“얼마나?”
“네가 말한 액수의 열 배.”
“…….”
이경민이 아무 말 못 하고 눈썹을 꿈틀대다가 눈을 빛냈다.
“콜!”
“그럼, 증인으로 누굴…….”
도훈이 두리번거릴 때였다.
최크루지의 비서를 만나러 갔던 황수정이 돌아왔다.
황수정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도훈의 옆에 붙었다.
“이 실장님, 뭐 하세요?”
순간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황백석 회장의 손녀 황수영은 재벌 3세들 사이에서는 꽤나 마당발이었다.
여기에서 그녀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