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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자가 웃자 도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할머니, 너무 놀리지 마세요. 민국이가 긴장하면 저 오늘 집에 못 가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오늘 온 이유가 있는 게지?”
장경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이 놀란 표정을 답했다.
“할머니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살살거리는 게 너무 티 난다.”
“에이, 왜 그러세요, 할머니.”
“딱 보니 케이블 채널 인수 비용 때문에 온 거지?”
장경자가 눈을 찡긋하자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앗, 혹시 사주도 공부하셨던 거예요? 할머니.”
“사주는 무슨 사주, 경제인의 밤에서 그리 난리를 쳐 놓았으니 서울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게다.”
“아, 제가 조금 과하긴 했죠.”
“그래, 과하긴 했다. 무대에서 춤도 그렇고. 그래도 제법이더구나.”
“헉, 저인 줄 아셨어요?”
“손자 얼굴도 몰라보는 할미가 있더냐? 사실 그 재롱 보고 채널 하나 정도는 사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장경자는 마지막 말에 방점을 찍었다.
순간 도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
도훈이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장경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일을 벌였으니 이번은 네가 책임을 져 봐라.”
“흠.”
도훈이 턱을 어루만지며 헛기침했다.
이것은 누가봐도 시험이었다.
고민도 잠시 도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 지분을 파는 건 안 되겠죠?”
“그럼 나머지도 다 내가 뺏어 오겠지.”
장경자가 자신의 앞에 있는 장부를 손으로 가리켰다.
진심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안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지분을 파는 건 포기하고…… 빌려야겠네요.”
“그래, 빌리는 것도 능력이다.”
“아무래도 은행보다는 할머니가…….”
도훈은 눈가에 웃음기를 띠며 장경자를 바라봤다.
장경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은 일 초도 안 되어 바뀌었다.
장경자의 얼굴은 마치 살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이 할미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 보아라. 그럼, 네 능력을 인정해 주지.”
“감사해요, 할머니.”
“허, 뭔 감사를 한다고 그러느냐?”
“절 인정해 주신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시험 문제도 내주시는 거고요.”
“그럼, 레벨을 조금 더 높여 볼까?”
“레벨이라니요?”
“최 영감에게 빌리면 미라클 본사의 지분 일을 주지.”
장경자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그 모습에 도훈은 입맛을 다셨다.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 주는 미션도 다 끝내지 못했는데, 장경자가 다시 문제 하나를 던져 줬다.
이것을 과연 받아야 할까?
도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구나?”
“생각해 보세요. 실패해도 페널티가 없는데, 제가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허허, 이놈 봐라, 그래서 벌칙을 받겠다는 거냐?”
“아, 아니에요. 일단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화장실이 급해서요.”
“화장실 핑계는…… 변명할 필요 없으니 다 풀고 오거라.”
장경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장경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민국의 어깨를 톡톡 쳤다.
“민국아, 너는 마저 식사하고 와, 나 먼저 갈게.”
“어, 이 실장님, 그게 무슨…….”
“할머니 심심하시지 않게 네가 말동무 좀 해 드리고. 엄 비서 누나 일 좀 돕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저 혼자…….”
“그래서 싫어?”
“아니, 실장님, 아니 형님. 집까지 어떻게 가시려고요?”
“택시 있잖아, 그러니까 편히 쉬다가 와.”
도훈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경자에게 90도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도훈은 엄지연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얼어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들썩이자, 엄지연이 날카롭게 쏘아봤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훔쳐보며 자리를 떠났다.
장경자의 집에서 나온 도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장경자가 말한 최 영감이란 대한민국의 두 번째 큰손 최수집 회장을 뜻한다.
업계에서는 최크루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동화 속의 스크루지와는 달랐다.
동화 속 스크루지가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각박했던 반면, 그는 타인에게는 각박하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플랙스의 대명사가 바로 최크루지 최수집이었다.
게다가 방랑벽까지 있어서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전국에 별장 하나씩은 마련해 뒀으니 어디가 본거지 인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보일 때는 오직 밀린 이자를 받아 낼 때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장경자가 건 미라클 지분의 1%는 그림의 떡일 수도 있었다.
일단 최수집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정보부터 빼는 것이 먼저였다.
도훈은 재빨리 여기저기 메시지를 날렸다.
툭. 툭.
몇 번 메시지를 날린 후 도훈은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여기저기서 답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잘 모른다는 답장이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답장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황수영의 답장이었다.
도훈은 재빨리 황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이 실장님 이 시간이 무슨 일이에요? 혹시 장경자 회장님한테 혼났어요?
“제가 무슨 어린애입니까, 혼나게요?”
―에이, 어린애만 혼나나요? 어른도 잘못했으면 혼나는 법이죠. 오늘 회장님한테 가서 돈 얘기 했을 거 아니에요?
“완전 귀신이네요.”
―그러니 혼나죠. 저도 할아버지한테 돈 얘기하면 백이면 백 회초리 날아와요.
“황 회장님이 회초리를요?”
―그건 좀 과장한 거고 어쨌든 그래요. 최수집 회장님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거 보면 돈 빌리는 건 쫑 나신 것 같고…….
황수영은 신이 나서 쉴 틈 없이 떠들었다.
한참을 듣던 도훈이 재빨리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 시간 없어요. 최수집 회장님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몰라요?”
―알긴 아는데, 매니저로서 조건이 하나 있어요.
“무슨 조건이요?”
―공연이요…….
황수정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쉽게 말한 것 같지만 고민하는 표정이 도훈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공연이라니?
도훈은 재빨리 물었다.
“공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최수집 회장님 앞에서 공연 한번 해 주시면 돼요. 공연을 하려면 당연히 최수집 회장님이 어디 있는지 아셔야겠지요.
“일단 알았으니 알려 주세요.”
―제가 내일 만나서 자료 보내 드릴게요.
“그냥 메신저로 주세요.”
―중요한 내용인데 직접 만나서 브리핑해야죠. 요즘 메신저가 자주 끊기더라고요. 중요한 내용은 아날로그로 전달하는 게…….
다시 시작된 황수영의 수다.
도훈은 재빨리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알았으니 내일 뵙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툭.
도훈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때 뒤쪽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터벅터벅.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한민국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왔다.
도훈은 눈매를 좁히고 한민국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이 제법 복잡해 보인다.
생각이 많은지, 도훈이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걸어오기만 한다.
그 모습에 도훈이 씩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한민국, 표정이 왜 그래?”
“아, 실장님, 아직 안 가셨네요.”
“내 차가 있는데, 가긴 어딜 가?”
“아까는 택시 타고 가신다면서요. 꼭 내가 지금쯤 나올 걸 알고 계신 것 같네요.”
“그럼, 엄 비서 누나랑 할머니가 널 붙잡아 두겠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할머니가 스파이 역할이라도 하래?”
“헉, 아니에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지…… 그런데 얼마 받기로 했어?”
“아니라니까요.”
“합법적으로 스파이 짓 해도 좋으니 헐값에 일은 하지마, 알았지?”
“헉, 정말로요?”
“그래, 내 사람이 헐값에 일하면 조금 짜증 나거든.”
“앗! 실장 형님, 아니 대표님!”
“그냥 하나만 하고…… 보고할 것도 내가 요약해 줄 테니 할머니한테 용돈 잘 뽑아.”
도훈은 씩 웃었다.
도훈이 한민국을 잠시 그 자리에 남겨 둔 것은 사실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것이 장경자가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도훈은 그런 장경자가 싫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니까.
* * *
이틀 후.
도훈은 황수영과 함께 서울 근교에 있는 고구려 호텔의 로비를 지나고 있었다.
고구려 호텔은 십 년 전 들어선 오성급 호텔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호텔의 주인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복도를 살폈다.
순간 도훈의 눈이 커졌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 벽이었다.
또한 유리 벽 너머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수족관이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헤엄치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도훈의 표정을 본 황수영이 빙긋 웃는다.
“여긴 최 회장님만 지나다니는 복도라고 하네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기 서 있네요.”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복도를 살폈다.
그 모습에 황수영이 말을 이었다.
“공연을 위해서 회장님이 특별히 허락했다고 하셨어요. 저도 여긴 처음 지나가 봐요.”
“혹시 여기가 최수집 회장님의 호텔이었나요?”
“아마도요…….”
살짝 말끝을 흐리는 황수영의 모습에 도훈은 피식 웃었다.
“잘 모르시는구나.”
“안 가르쳐 주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나저나 준비는 잘해 오셨죠?”
“아윌비백 한 곡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도훈이 황수영을 바라봤다.
그가 전해 준 내용은 간단했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스타플레이어 1회차에서 나왔던 아윌비백을 라이브로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도훈은 최수집 회장이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황수영이 답을 해 주긴 했다.
경제인의 밤에서 다른 사람들이 도훈의 퍼포먼스를 즐겼는데, 최수집만 그 공연을 놓쳐 아쉬워한다고 했다.
도훈의 표정을 본 황수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제가 설명드렸잖아요. 솔직히 강영웅 오빠의 공연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잖아요. 그에 비해 실장님의 공연은…….”
“제 공연은요?”
“돈 내고도 못 보죠.”
황수영이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도훈은 기가 찼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강영웅이나 이지유 그리고 우시원, 서찬휘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매니저의 공연을 보고 싶다니!
솔직히 이건 도훈이 회귀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불가사의한 사건이었다.
의문을 떠올리던 도훈은 황수영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얼마 받았어요?”
“그건…….”
“절대 헐값은 안 돼요.”
“네, 알았어요. 제가 보기에 헐값은 아니에요.”
“대체 제 개런티가 얼만데요?”
“그건 끝나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원래 아티스트가 비용까지 꼼꼼히 따지지는 않잖아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