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40화 (340/341)

해가 지는 제국 (4)

1815년 5월.

이집트 기자 지역에 위치한 피라미드 위에서 프랑스군이 삼색기를 꽂았다.

오스만 제국에게 더 많은 특권을 달라며 영국을 뒷배로 삼고 반란을 일으킨 맘루크들은 초전에 개박살이 난 후, 프랑스군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식수가 떨어질 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감행.

이들은 프랑스군 29명을 사살하고 그 대가로 겨우 1만 7천여 명을 잃으며 대승을 거두었고, 이제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해 당당히 돌멩이를 맞으며 시가행진을 할 예정이었다.

“민생을 박살 낸 반란군은 뒤져라!”

“우우 쓰레기 자식들!”

“술탄 폐하 만세! 자유 개혁 만세!”

“우리의 동맹 프랑스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알라의 가호가 있으라!”

“저 치들이 뭐라고 하는 거지?”

“어, 그, 알라가 총사령관님을 축복해주길 바란답니다.”

“그래? ···내 말도 통역해주게.”

“뭐라고 할까요?”

“나는 유일신과 그의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 라고 하면 오스만 시민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예, 예? 총사령관님 혹시 이슬람교 믿으십니까?”

“어허. 이봐. 주님도 유일신이시고 예수님도 사도 아닌가?”

“그으렇죠?”

“거봐. 난 거짓말은 안 했어.”

나폴레옹은 곧이어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에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역시 짜릿해. 늘 새로워.

***

파리, 통령 사무실.

[무패 장군 나폴레옹이 또 해내다! 연합군 이집트 점령!]

[···지는 건 무슨 기분일까?]

[“엄마 나는 커서 나폴레옹이 될래요.”]

군사학교의 찐따, 괴팍한 난쟁이, 병신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조악한 소설을 강제로 읽히던 그 중2병 환자가 맞냐?

갓 상장했을 때 샀던 듣보잡 주식이 하늘을 넘어 천외천에 다다르는 걸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구만.

저 인간의 괴팍한 성격, 지독한 인간 불신을 교정시켜보겠다고 온갖 똥꼬쇼를 다 했던 걸 기억하면 감개가 무량하다.

- 이 세상은 썩어도 완전히 썩어버렸데이. 안 그러냐?

- ···예에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서?

- 이 썩어빠진 세상을 불태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다. 그리고! 내가 그 신세계의 신이···!

- 음 그렇군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비대한 자아... 과도한 에고이즘... 이거 노트에 기록해놨다가 한 10년 뒤에 보여줘도 됨?

- 마! 조롱하지 마라!

- 즈릉흐즈 므르~

온갖 고생 다 하며 키운 자식이 대성하는 걸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으음. 아무래도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사실 난 석가모니 뺨치게 아름다운 마음씨와 참을성, 그리고 야수의 심장을 가진 엘리멘탈 히어로-

“저어 각하?”

“이크,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이 새서. 어디까지 했었죠?”

“저희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랑스 공화국과 추호도 충돌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허허. 그래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사람 좋게 웃어주었다.

한번 웃을 때마다 4초였나 목숨줄이 늘어난다매? 우리 애가 이제 ‘압바 압빠’ 거리면서 발발 돌아다니는데 적어도 증손주 볼 때까진 죽을 수 없다.

그런데 내 웃음이 앞에 계신 주불 네덜란드 대사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나보다.

“그, 저, 그...”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셨네. 모공이 수분 분출을 원활히 하는 걸 보니 대머리나 다한증은 안 걸리시겠어.

“왜 그렇게 떠십니까. 아, 혹시 좀 춥나요? 추우시다면 비서에게 얘기해서 땔감을 더 때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커피라도 따듯하게 다시 드리지요.”

“정말 괜찮습니다.”

응 내가 안 괜찮아.

손님에게 따땃한 커피를 리필해주지 않으면 정열과 낭만, 정이 넘치는 프랑스인들이 내 평판을 깎을 거라고.

“자자, 사양하지 마세요.”

“예에...”

결국 네덜란드 대사는 순순히 내가 준 커피를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제 좀 순순히 들을 준비가 되셨구만.

“대사님.”

“예, 각하.”

“네덜란드 공화국은 대전쟁의 부외자가 되고 싶은 겁니까?”

“예? 아, 예! 예! 그렇습니다!”

나보다 띠동갑하고도 몇 살 더 먹은 대사는 고개를 아주 빠르게 끄덕였다.

쓰읍. 어쩐다? 이렇게 연장자한테 쓴 소리 하긴 싫은데 말이지. 뭐 어쩔 수 있나.

“제가 알겠다고 해도 그렇게 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

이미 네덜란드는 편의를 괴애애앵장히 봐준 상황이다.

네덜란드는 공화국을 칭하지만 사실 총독, 스타트하우더르(Stadhouder)라고 불리는 국가수반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에게 세습되는, 왕국이나 다름없는 나라.

그러나 원래 네덜란드는 7개 주가 모여 만든 연합왕국이었고, 때문에 중앙 정부는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각 주에게 넓은 자치권이 부과되었다.

실제로 몇 개 주에서는 시의회나 주의회를 설립해 선출직 공무원을 임명하는 듯 자유주의 기풍도 상당했고, 그에 비례해서 왕당파도 존재했다.

그러니까.

아싸리 우리 자유연합군의 기치에 모이기엔 보수적이고.

아싸리 저쪽 반불동맹군의 기치에 모이기엔 진보적인.

아, 하나 더. 네덜란드의 일부분은 아직도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합스부르크의 영지다. 말이 영지지 까놓고 얘기하면 식민지다 이거지.

만일 일본이 부산ㆍ울산ㆍ대구를 점령했는데 일본의 뚝배기를 기깔나게 까는 게 아니라 일본하고 같이 한 편이 되어 맞서 싸운다고 생각해봐라.

국민들이 싸우고 싶겠나, 아니면 그런 결정을 한 정치인의 모가지를 썰고 싶겠나?

그야말로 여기 붙기도, 저기 붙기도 애매모호한 회색지대.

만일 네덜란드 중앙 정부가 둘 중 어느 한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한다면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

내부만 그런가? 외부도 회색지대를 벗어나는 걸 가만 못 둔다.

네덜란드가 프랑스를 지지하면 곧바로 왕립 해군이 포격으로 암스테르담을 태워버릴 거고, 영국을 지지하면 곧바로 프랑스 육군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직접 암스테르담을 태워버릴 거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암묵적인 회색지대가 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회색지대를 자청할 수 있었다.

편의를 많이 봐준 거지. 이건.

그런데 ‘우린 니들끼리 치고박는 거 관심 없음. 진짜임.’ 하고 문을 걸어 닫았던 애들이 갑자기 왜 나한테 찾아왔을까.

원래 19세기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일 중 3할은 프랑스 때문이고 7할은 영국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난 아니니까 영국 때문이겠지. 쓰으읍 하아... 딱 봐도 혐성의 냄새가 펄펄 풍기지 않는가?

“암스테르담 총독궁에 영국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음. 역시나구만. 만악의 근원 혐성국답다. 혐성국 또 너야?

“영국인들이 뭐라고 하덥니까?”

“반불동맹에 가입해 반불전쟁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아!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흰 전쟁에 절대, 저어얼대 참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흠. 대강 견적이 나온다. 스페인에서 개쪽을 팔며 박살 났는데, 다시 스페인에서 전쟁을 치르기에는 워낙 제반 사항이 안 좋으니 다른 곳에서 전선을 하나 새로 열겠다는 거구만.

“그래서.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각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흰 대영제국 수상과 프랑스 공화국 통령이 공인하는 중립 지대로 남고 싶습니다.”

아.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무언의 중립이었던 걸, 유언의 중립으로 바꾸고 싶으시다?

나야 뭐, 딱히 상관없지.

나는 몇몇 골 빈 인간들처럼 ‘불어를 쓰는 사람이 사는 땅은 다 프랑스꺼임! 네덜란드 남부 프랑스어권인 왈롱 주를 내놔!’ 같은 생각이나 판도 딸 따윈 관심 없다.

괜시리 저 소금 맛 나는 간척지에 발을 들였다가 뻘밭에 병사들 생목숨을 파묻고 싶진 않거든.

문제는 영국도 나처럼 생각하냐 이건데. 그건 좀 분석의 여지가 있구만.

내가 너무 흔들어놔서 지금 승전보가 급할 텐데, 당연히 나보가 피라미드 관광을 하느라 참호를 파고 임시 휴업을 선언한 프랑스군 대가릴 깨는 것 보단 약소국 네덜란드의 대가릴 깨고 위신 딸을 치는 게 더 쉽다.

이거 참. 모르겠네.

“일단 우리 공화국 정부는 대사님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전세나 정세의 변화가 있다면 검토가 취소될 수도 있는 점. 알아주시길.”

“그럼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대영제국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인 지금.

전쟁부 장관을 사표로 반 협박해 총사령관 자릴 얻어낸 아서 웰즐리 중장은 팔짱을 끼고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걸 관망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를 일단 흔들었다.

그들이 동맹군에 합류할 거라곤 생각한 적 없다. 그들이 합류할 거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신병자거나 도박중독자지.

그저 프랑스군이 화들짝 놀라서 네덜란드-프랑스 국경에 병력을 조금이라도 박아 넣으면 대박인, 겨우 그 정도 일이다.

기욤 그자도 워낙 아가리질에 능하니, 1개 연대 이상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일단 최전선이 아니라 후방에 적군 병력을 짱박았다는 것에서 의의를 가지자.

웰즐리는 네덜란드에서 눈을 떼 유럽 중앙을 바라보았다.

스페인 전선에서 동맹군은 패했다.

이집트 전선에서도 동맹군은 패했다.

북독일 전선에선 포츠담에 참호를 파고 알을 박은 프랑스군이 도시락을 까먹으며 동맹군이 달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남독일 전선에선 마르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티롤을 공략 중.

이탈리아 전선은 이미 프랑스 전역 사령관인 앙드레 마세나가 로마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을 공격 중.

말 그대로 온 세상의 반이 삼색기다.

하지만 아직 온 세상의 반은 삼색기가 아니다.

프랑스는 세상의 반을 정복했지만, 아직 반은 정복하지 못했다.

행복회로에 냉정을 잃은 거 같나? 아니. 진실로 그렇다.

프랑스군 점령 하의 포츠담이 요새화된 만큼, 프로이센군이 사력을 다해 지키려는 베를린 또한 요새화됐다.

티롤를 함락시킨 프랑스군은 이제 악명 높은 알프스 산자락에서 신성로마제국군을 상대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인정한다. 이탈리아는 발리고 있다. 험준한 아펜니노 산맥을 끼고 소모전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교환비에서 질 수 있지?

여기서 웰즐리가 노릴 수 있는 수는 명확했다.

북부 독일 전선과 남부 독일 전선. 둘 중 하나를 노려 적을 밀어낸다.

“그게... 되겠습니까?”

“왜 안 되나? 프랑스군은 전체적으로 강군이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면 파죽지세로 능동적으로 진격하지만, 그가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면 그만큼 진격 속도가 더뎌지고 수동적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서 돌아와 다시 독일 쪽 전선 지휘를 맡기 전.

약 한 달여의 시간.

이 골든 타임 동안 뻣뻣하게 굳은 프랑스군을 밀어낸다.

그는 손을 지도에 가져다 댔다.

“적은 남부 독일에서 안정적인 전선을 형성하며 밀기보단 끊임없이 파상공격을 가하고 있지. 우리가 있는 힘껏 세게 때려서 한 번 밀어내면 빙판에서 미끄러지듯 밀려날 거야.”

“제국에게 작전 협조 요청을 보내겠습니다.”

“요청? 아니. ‘통보’하도록. 우리 대영제국이 주는 물자 없으면 당장에 나라가 망할 텐데 어딜 배짱을 부리려 들어.”

냄새나는 원로 장성들은 그놈의 고상한 피에 쫄아선 저 버러지 같은 신성로마제국군 사령관, 카를 대공에게 벌벌 기고 있지만 웰즐리는 결코 그럴 생각 따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바램대로 되었다.

“여긴 이제부터 우리 영국군이 통제한다!”

“영국군이 주공을 맡고 제국군은 조공을 맡는다.”

“프랑스군의 ‘사단’ 편제를 본따 제 1, 2, 3, 4, 5사단을 신설하고 덴마크 해협을 통해 병력을 옮긴다.”

“결코 공세 전까지 프랑스군이 영국군이 온 걸 알게 해선 안 돼. 전서구 이용은 줄이고, 전령 이용을 주로 삼지.”

냉정하고, 냉철하고, 계산적으로.

아서 웰즐리의 칼날이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에 집결했고.

“마, 마르몽 장군님! 영국군입니다!”

“그래서? 영국 놈들이 왔다고 뭔가 변하나? 어차피 쳐부숴야 할 놈들인 건 마찬가지야.

···전 군단 속보로 이동한다. 기동력으로 놈들의 측면을 돌아 타격하지.”

“프랑스군이 우리의 측면을 노린다.”

“받아칠까요?”

“아니. 저쪽과 횡을 이루며 같은 속도로 행군한다. 후방에 전령을 보내. 제 5사단을 증원군으로 데리고 오라고.”

“예? 하지만 교범은-”

“야전에서 쉰내 나는 교범은 집어치워. 내 명령에 따른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영국 놈들이 거점 방어를 포기하고 우리와 보폭을 맞춰 걷고 있습니다.”

“···이 새끼 뭐지? 여길 지킬 의지가 없나? 정찰대는? 정찰대는 뭐 발견한 거 없나?”

“북쪽에서 군부대가 일으킨 걸로 추정되는 흙먼지가 관측됐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 축차 퇴각인가.”

“예?”

“북쪽이면 오스트리아잖아. 적이 거점 방어를 포기하고 알프스를 낄 생각인 것 같다. 흙먼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빼돌린 병력이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면서 일으킨 먼지고.”

“오오! 과연 그렇군요.”

“좋아 이 앞 언덕에 감제 초소와 야전 막사를 설치한다. 토미에르 장군의 7사단에게 속보 속도를 올려서 좌익으로 크게 돌라고 해.”

“놈들이 좌익으로 돕니다!”

“속도가 아주 빠르군. 5사단에게 놈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고지대 능선 뒤에 숨어있다가 총공격하라고 하게. 적들의 속도가 워낙 높아서 제대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도 못할 거야.

우리는 5사단이 적 좌익을 깨면 그때 밀고 내려간다.”

“알겠습니다!”

원 역사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대영제국의 수호신.

아서 웰즐리의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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