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339화 (339/341)

해가 지는 제국 (3)

1815년 1월.

런던.

- 삐이익! 삐이익!

오늘도 어김없이 호루라기 소리가 피카딜리 인근에 울려 퍼지고, 대충 식사를 때우던 경관들은 말에 올라 호루라기 소리를 향해 서둘러 박차를 가했다.

또 어디선가 폭도들이 시위를 벌인 게 분명하다.

마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이미지에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가 나왔다.

“···끔찍하군.”

이제 갓 본국으로 돌아온 아서 웰즐리 소장(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심심풀이 땅콩을 입에 넣었다.

“대체 내가 인도에 가 있는 동안 본국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반불동맹군에게 계속 물자를 퍼주는 대도 연합군에게 지금껏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으니 국민들이 굉장히 화가 나 있을 법도 하지요.”

“겨우 그거만으로 이 정도까진 안 올 텐데.”

웰즐리의 말에 새로 전쟁부에서 배정한 당번 비서가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에 전사 통지서가 수두룩하게 날아왔습니다.”

“왜? 별로 좋을 때도 아니잖은가?”

하다못해 전투를 이기고 나서 대서특필해 승리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아니고, 같은 동맹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깨져나가는 지금 전사 통지서를 굳이 사람들에게 보낼 이유가 있나?

대의를 위해서라면 잠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올바른 곳으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동입니다. 기욤 드 툴롱 그 교활한 놈이-”

“놈?”

“아, 그, 그게 아니고.”

“앞으로는 입을 가벼이 놀리지 말지.”

“예, 소장님.”

아서 웰즐리는 땅콩을 하나 더 까 입에 홀라당 넣으며 생각했다.

‘일이 지독히도 꼬였구만.’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웰즐리 가문이 다시 회생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기욤 아닌가.

웰즐리 가문은 아직 남은 정계 영향력으로 기욤의 사업을 지원해줬고, 기욤은 웰즐리 가문에게 그 사업의 배당권과 지분을 나눠줬으니 상호 이익, 윈-윈 관계.

돈이 없어서 여자에게 차이고 엉엉 울다가 바이올린을 홧김에 태워버렸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이 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부관에게 넌지시 물었다.

“웨스터민스터와 전쟁부가 상당히 곤혹스럽겠군?”

“예? 아, 그렇지요. 장성 몇몇이 계급장을 떼였고 동맹군에게 공세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러면 날 왜 데려온 거지?”

“···예??”

“그 어느 때보다 반불적인 사람이 필요할 텐데. 난 프랑스 육사 유학파 아닌가. 국민들이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상황이 매우, 매우 정치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많고 많은 육군 장교 중 저 변방에서 토인이나 잡던 아서 웰즐리를 굳이 1계급 진급시켜 데리고 올 이유가 뭘까.

“전쟁부는, 프랑스군을 난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열등했던 개인화력도 신무기로 거의 따라잡았고, 포술은 원래 저들의 장기였으며, 이젠 말도 안 되는 기동까지 선보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프랑스 쪽 교리에 빠삭한 웰즐리 장군님을 부른 겁니다.”

“적의 머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군.”

“국민들이야 장군의 이력을 알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차피 가릴 거고, 장군께서 승전보만 가지고 돌아오신다면 그깟 프랑스 유학 따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흠.”

그럴 수도 있고, 해군을 휘어잡은 휘그당이 토리당의 색채가 강한 육군도 자기 마음대로 개편하고 싶어하는 거일 수도 있고.

해몽은 결국 풀이하는 사람 몫.

“그래서 날 데려온 분들께선 내가 뭘 해주길 원하나?”

“스페인 전역을-”

“아아, 스페인은 버려야 해. 하등 가치가 없어.”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보나파르트 그자도 생각이 있다면 포르투갈까지 노리진 않을 거야.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강이 얼마고 요새지대가 얼마나 많은데 거길 공격하겠나? 그냥 포르투갈 앞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우리의 공격을 요격할 준비나 하겠지.”

“그렇, 습니까? 그러면 하노버는-”

“버려야지. 거길 대관절 어떻게 지키나?”

가차 없이 두 전역에 사형선고를 때린 웰즐리는 손에 묻은 땅콩 껍질을 털어내고 흰 장갑을 착용했다.

“저지대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새 전선을 열던가, 아니면 북부 독일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 힘을 싣던가.”

“그, 그건 너무-”

“싫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사령관 자릴 주라고 하게. 난 승리를 좇는 군인이지 정치인들의 시다바리가 아니야.”

그는 어쩔 줄 몰라하는 비서를 내버려 두고 홀로 마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전쟁부 청사로 걸어갔다.

***

“보고드립니다. 연대장, 아서 웰즐리 소장 외 66경보병연대 전원 도착했습니다.”

“어서 오게 장군. 차 한잔 하겠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간단하게만 즐기겠습니다.”

“아. 당연하고 말고. 할 일이 산더미인 사람 부여잡고 늙은이가 타령 늘어놓을 생각은 없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전쟁부 장관이 당번병을 불러 다과상을 세팅한 후 입을 열었다.

“웰즐리 장군.”

“예, 장관님.”

“제국이 위험하네.”

“그래 보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저 동맹이란 놈들에게 물자를 얼마나 퍼줬는지 아나?”

“아니오.”

“덴마크는 100만 파운드를 받아 가고, 프로이센은 군화 12만 켤레와 소총 8만 정을, 러시아 제국군은 군복 15만 벌을 받아 갔네.

그런데 그 누구도 지난 1년 동안 승전보를 가져온 적이 없어.”

전쟁부 장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린 승리가 절실하네. 아서.”

“그렇습니까.”

“신민들이 동요하고 있어. 저 파리에 있는 개구리 놈이 술수를 쓸 때마다 웨스터민스터에 있는 내각의 수명이 5년씩은 깎여나가는 기분일세.”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요.”

“말했지 않은가. 승리라고.”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승리하라고 말씀해주신 건 없지요.”

“전역 사령관 어떤가.”

“아니요. 전권을 가진 총사령관 자리를 주십시오.”

“무뭐뭐뭣?”

웰즐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경악하는 전쟁부 장관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보나파르트라는 자가 그렇게 악명 높다고 들었습니다. 무어 장군 또한 제게 신신당부하시더군요.”

“···그래서?”

“겨우 전역 사령관 자리로 그런 괴물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자넨 소장이야. 전역 사령관도 과분한 자리라고.”

“그렇다면 저 말고 총사령관을 맡을 자가 있습니까.”

“있지 왜 없나?”

거짓말.

그런 자가 있었으면 애초에 웰즐리를 부를 이유따위는 없다.

원로 장성들이 다 나폴레옹에게 개박살이 나니, 신인이라도 발굴해서 쓰겠다는 얄팍한 수가 아닌가.

이미 과열된 영국인들은 또다시 고리타분한 늙은 장성들이 지휘봉을 잡고 레드코트를 사지로 내모는 순간 내각의 목을 따려 들리라.

하지만 신인 장성이라면? 내각은 ‘아 경험도 없는 애가 말아먹었네. 우리 잘못은 아닌 듯?’ 하고 책임을 전가한 채 탈룰라를 시전 할 수 있다.

“···젠장.”

“그래서 주실 겁니까 안 주실 겁니까.”

“고민은, 해보지.”

“그러면 됐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차를 대접하지요.”

웰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리고 떠났다.

온 유럽을 활개치는 독수리를 잡으려면 한 시가 바빴다.

***

1815년 1월.

스페인 공화국, 마드리드.

“별로 재미가 없군.”

연합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은 팔짱을 끼고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문뜩 입을 열었다.

“포르투갈은 포기하지.”

“아예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탈환하는 게 안전을 위해선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는 몰라도 스페인 공화국은 현상 유지도 버거울 걸. 안 그렇습니까, 산마르틴 장군?”

“총사령관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공화국군은 이미 현 수복지를 안정화하는 것만 해도 포화 상태입니다.”

“우리 공화국도 89년에는 상황이 비슷했지. 공무원이고 나발이고 다 도망갔었거든. 내 본국에 잠시나마 행정 부담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고문단 파견을 건의해보리다.”

“감사합니다 총사령관.”

그럼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

스페인 공화국군은 재건되는 대로 곧바로 대포르투갈 전선에 투입될 거고 포르투갈은 영국 놈들이 작정하고 판 참호로 덮여 있으니 서로 참호에 앉아 시간만 보낼 테지.

“다부와 마세나에겐 별말 없나?”

“지시하신 대로 다부 장군은 하노버와 베를린을 지그시 압박하며 위력 정찰 외엔 공격적인 움직임은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마세나 장군은 북부 이탈리아 요새를 함락시키고 남부로 진격 중입니다. 로마가 코앞이라고 합니다.”

“순조롭군. 그러면 이제 지중해를 건너보자고.”

그의 손은 이집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길 따면 이제 지중해에 영국이 발붙일 곳이라곤 몰타가 끝이야.”

“메흐메드 알리(Mehmed Ali Pasa) 총독이 우리에게 협조했으면 좋겠군요.”

“오스만 제국에선 글쎄, 역적이라고 하던데.”

“그럼 족칠까요?”

“필요하다면. 굳이 현지인과 분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잖나.”

“알겠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피라미드를 볼 준비를 해야겠군요.”

피라미드라...

“이거 알렉산더가 된 기분인걸.”

잠시만. 생각해보니까 나보 자신이 알렉산더에 비해 뭐가 못났나?

아마 천국에 있을 알렉산더도 이 나보의 어마어마한 발자취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기다려라 피라미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삼색기를 꽂아줄 테니.

***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원수의 눈누난나 피라미드 관광은 어느 누구의 손에서 스겅스겅 잘려 나가고 말았다.

“다시 한번 말해볼래?”

“이집트를 공격하면 지중해에서 해적놈들을 일소시킬 수 있다고.”

“아니아니. 그 전에. 그, 뭐가 필요하다고?”

“뭐긴 당연히 군수품-”

“그 군수품에 왜 동계 월동 장비가 껴있는 거지?”

“왜긴? 기욤아. 지금은 겨울이잖아.”

눈을 꿈뻑거리며 말하는 나폴레옹을 본 오랜 친우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 형. 혹시 날 웃기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심인데. 겨울이잖아. 동계 장비 없이 어딜 가겠어.”

“이집트 간다매.”

“그래.”

“근데 동계 장비가 왜 필요하냐고.”

“그야... 겨울이니까.”

“아잇 씻팔! 이 양반아 지금 장난해!?”

뭐지? 얘가 왜 또 이러지?

“이집트면 아프리카잖아! 아프리카! 거기에 털옷을 왜 껴입고 가!”

“···입으면 안 되나?”

“40도 찍는 곳에 무슨 털옷?!”

“하, 하지만 분명히 역사책에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었는데?”

“내가 미쳐요 시발. 어우 이러다간 조커될 거 같애. 아주.”

결국 나폴레옹의 원정 계획서는 갈가리 찢겨나가고 퀭해진 기욤이 다음날 동계 장비 대신 하계 군복이 들어간 새 원정 계획서를 시발시발거리면서 내미는 것으로 이집트 원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단 세 달.

“맘루크가 쳐들어옵니다!”

“대기병 방진으로. 150미터에서 효력사 실시.”

“이게 그 피라미드인가?”

“정말 웅장하군요.”

“어때 좀 파라오 같아 보이나? 좋아. 내친김에 어디 피라미드 안에서 오늘 하룻밤을 보내야겠군. ······키아아악!!!”

“왜 그러십니까!”

“뭔가, 뭔가를 봤어. 뭔갈 봤다고...”

“사령관님.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적도 우리가 약해진 걸 파악했는지 우리 인근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음.”

“병사들 수통에 남은 마지막 남은 식수를 모아 왔습니다. 사령관님 이거라도 드시지요.”

“하하. 그래?

제군들! 이건 우리가 가진 마지막 물이다! 본관은 귀관들이 내게 소중한 물을 모아준 데에 대해 크나큰 감사를 표한다. 고맙다!

그러나!”

- 촤아악!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귀관들이 준 물을 마실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전우다. 누군가가 더 존귀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난 홀로 편하게 지낼 수 없다. 오히려 여러분과 함께 고통받겠다!”

“““와아아아!!!”””

“모두 날 따르라! 적들을 부수고 오늘 나일강에서 목을 축인다!”

단 3개월 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 전역에 삼색기를 꽂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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