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86화 (286/341)

잠자는 사자의 사지를 쳐라 (5)

“뮌헨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뷔르템베르크 군이 근황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는 완전히 제후 연맹군 측에 넘어갔습니다.”

“폴란드에서 이를 틈타 독립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입니다!”

“니미럴, 이러다 미쳐버리겠군.”

대영제국 외무부는 각지 대사, 공사, 영사로부터 쏟아지는 보고에 완전히 탈진하고 있었다.

유럽 돌아가는 꼬라지가 기괴막측했던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항상 대영제국은 어느 편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존재했다.

하지만.

“각하, 근황군을 돕는 건 안 됩니다.”

“왜지?”

“안 그래도 서유럽에 프랑스라는 강적이 있는 마당에, 중유럽에 프랑스보다 영토도 넓은 중앙집권국가가 나온다면 우리 대영제국의 유럽 질서 유지에 너무 큰 변수가 생깁니다.”

“너무 안 좋게만 보는 거 같은데, 프랑스와 제국이 붙어서 서로 살을 깎아 먹지 않겠나?”

“하지만 제국은 이미 한 번 루이 16세 시절 앙투아네트를 보내 결혼동맹을 체결했었습니다. 중부 유럽과 서유럽을 꿰찬 두 중앙집권국가가 동맹을 맺고 브리튼 제도를 노린다면-”

“음.”

“신성로마제국이 쉰내 나는 봉건국가라는 강력한 페널티를 푸는 순간, 세계의 미래가 감히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장관은 피곤에 쩔어 다크 서클이 짙게 올라온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오케이 오케이. 자네들의 의견은 잘 알겠네. 그러면 제후 연맹군을 지원하는 게 더-.”

“그건 더 안 됩니다!”

“이런 시발!! 이번엔 또 왜?”

“우리가 지금 해줄 수 있는 지원의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놈들 주머니에 쩐을 채워주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독일 놈들 내전에 애먼 레드코트의 목숨을 태울 순 없으니.”

장관이 맞장구를 쳐주자, 말을 꺼낸 외교관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기면 상관없습니다. 독일 제후들에게 지운 빚보다 더 많이 뜯어내면 되니까요. ···게다가 저 치들은 봉건적 사상에 젖은 놈들이니, 아마 잘만 구슬려본다면 국왕 폐하께서 하노버 선제후에 이어 선제후 자리를 하나 더 차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 영국 국왕은 하노버 선제후를 겸한다. 즉,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선출권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

만약 선제후 자리를 하나 더 가져올 수만 있다면 투표권이 무려 두 표.

선거권 총합 여덟 표 중 두 표라면 신성로마제국에 목줄을 채워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다.

게다가 원래 한 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고만고만한 놈들로 찢겨 느슨하게 뭉쳐있는 게 상대하기 더 나은 법.

“그러면 더더욱 제후 연맹군을 지원해줘야 하지 않나?”

“이기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지면 우린 돈푼도 챙기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아야 됩니다. 심지어 승리한 근황군과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는 꼴이구요.”

“음. 그래도 리스크를 감수해 볼만큼 리턴이 너무 좋지 않나?”

“각하. 저기 저 시골에서 지주놀이하고 채찍으로 농민들이나 패던 왈패 놈들입니다. 레드코트가 출동하지 않는 이상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대공이 이끄는 근황군을 못 이깁니다!”

“그렇습니다, 각하. 질 좋은 비료를 포대째로 털어 넣는다 한들, 썩은 땅에서 새싹이 나겠습니까?”

“젠장. 누구 나 대신 외무장관 할 생각 없나? 내 기꺼이 양보해줄 용의가 있는데 말이야. 자네들 이력서에 ‘대영제국 외무장관’을 새겨넣을 수 있는 기회라고.”

다들 멋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나쁜 놈들.

어느 쪽도 지원하기가 너무 껄끄럽다. 지금 당면한 이 상황이 대영제국 외교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 아닐까?

대영제국의 외교관이라면 응당 채무자가 가장 힘들어할 시기에 슬그머니 다가가 뒷주머니에 맛난 파운드를 채워주고 일이 끝난 뒤 그 수십 배를 벗겨 먹어야 하는 법이거늘.

외무장관은 시가를 잘라 불을 붙이고 몇 모금 피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그러면 일단은... 적당히 ‘우리 대영제국은 평화라는 가치를 좇는다. 어서 빨리 유럽에 안정이 찾아오길.’ - 정도로 유감만 표시하도록 하지.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고 이기는 쪽에 판돈을 올려주자고.”

비록 빚을 수십 배로 남겨 먹을 순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손해는 안 볼 테니.

***

[우리 대영제국은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길 염원하며, 중유럽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하루빨리 끝나길 기원한다.]

비극이라.

누굴 딱 잘라 ‘저 새끼 순 나쁜새끼에요!’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비극이라는 단어를 썼다.

박 터지게 싸우는 양측 모두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선이 어디인지 알고, 그 앞에서 위 라잌 러브 앤 피스 얄리얄리얄랴셩 얄라리를 시전 하는 꼴 좀 보라지.

역시 온 세상에 갈등과 어둠을 뿌리고 다닌 새끼들답게 동작이 아주 신속 정확해?

- 우리는 니들 둘이 존나게 싸우다가 이기는 쪽에 붙겠다. 지금은 뒤에 앉아 관람이나 할 테니까 꼽사리 낄 염려는 안 해도 된다. 이제 알았지? 서로 죽여라.

제들 딴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겠다는 심산인데, 아주 도둑놈 심보야.

“그치 장? 아주 나쁜 녀석들이지?”

“아부부?”

“그러니까 이 아빠가 저 나쁜 녀석들을 좀 혼내줘도 되겠지?”

“아부부!”

말캉말캉한 볼따구를 손으로 콕콕 찌르자, 장이 조막만한 손으로 내 검지를 감쌌다. 귀엽다.

“그동안 긁어모으고, 지금 팍팍 요동치는 환율 따라 추가로 손에 쥔 제국 돈이 거의 천만입니다.”

“이야. 그래요? 내가 제국 쪽 화폐가치는 잘 몰라서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죠?”

“사장님. 이 정도면 쇤브룬 궁전도 현찰박치기로 단번에 살 수 있을 겁니다.”

“···진짜루?”

“어, 음, 그으...”

자신 있게 말하던 로스차일드 가의 3남, 이삭의 민족 독일 지사장인 살로몬 로스차일드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했다.

“진지하게 말한다면 본궁은 아니고 별궁 정도?”

본궁이든 별궁이든 여하튼 제국 돈이 존나게 많다는 건 맞구만.

나중에 전쟁 끝나면 제국에 우리 가족 놀러 갈 별장이나 하나 살까? 그 뭐냐, 엄청 유명한 성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노이슈반슈타인인가 뭔가 하는 그거.

공중파 여행 예능 독일 편에서 맨날 나오는 그 멋있는 성이 내 거라면 자라나는 우리 자식, 자손들의 정서함양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나? 나중에 21세기쯤 되면 호텔로 약간 개조해서 돈도 좀 벌고 말이지. ···근데 그거 제국 땅에 있나? 아니면 프로이센인가?

날 상념에서 깨운 건 로스차일드 가의 가주, 마이어였다.

“사장님, 총알은 충분합니다. 어디부터 흔드는 게 좋겠습니까.”

흠. 그르게요.

나는 어느새 곤히 잠든 장을 아기 침대에 눕히고 의자에 앉았다.

“마이어 씨. 지금 금융가에게 제일 관심이 쏠린 분야는 제국이겠죠?”

“그렇습니다. 근황군이든 연맹군이든 채권을 있는 대로 찍어내고 있으니까요.”

“물론 근황군이 찍은 채권이 조금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손에 돈을 쥔 자들도 근황군이 약우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전쟁은 원래 돈이다. 돈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돈을 내뱉는다.

이 로스차일드 가문만 하더라도 원 역사에서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좆망한다! 레알루다가!’ - 에 전 재산 네제곱버스를 타고 승천하지 않았나?

거기에 똥값이 됐지만 건실한 회사 주식 몇 개를 손에 쥐면, 나중에 나라 꼴이 정상화되는 순간 화성은 아니더라도 달나라까진 간다.

한탕주의자들이 집문서를 전당포에 맡겨놓고 급전을 땡겨 이번 제국 내전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그 한탕주의자들을 최대한 프랑스 쪽 자산에 투자하도록 모는 겁니다.”

한탕주의자들. 달리 말하면 중산층.

원래 비트코인이고 주식이고 부동산이고 재테크에 가장 미쳐있는 건 배울 만큼 배워 세상 사는 눈이 높아진 중산층들이다.

위로 더 올라가고 싶은데 근로소득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면 당연히 금융소득에 눈이 가지.

하지만 저들도 결국에는 소시민의 연장선에 있는 자이다.

과연 저 사람들이 폭락장에서도 워렌 버핏마냥 ‘존버! 결코 존버!’ 를 외치며 알 박을 깜냥과 멘탈이 있을까? 나는 아니올시단데.

“분명히 제국 쪽 자산이 폭락할 기미가 보인다면 빠르게 다른 곳으로 돈을 뺄 겁니다. 그리고 그때, 중산층들이 프랑스 자산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여겨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 말은 간단하다.

제국 경제가 좆망한다. -> 안정적이면서 고수익 투자처를 찾는다. -> 프랑스에 투자한다. 특히 이삭의 민족에. -> 유사시 적국 민간경제를 타노스 해버린다. -> 돈이 급한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더 많이 팔아 재낀다. -> 화가 폭발한 중국이 아시아에서 영국의 발을 붙잡고 늘어진다. -> 영국 인도-아시아 함대가 리타이어 된다.

뭐? 내가 애먼 사람들을 등쳐먹는다고?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어디까지나 저 사람들 뒤통수 치는 게 아니고 구원하려는 거다.

생각해보자. 프라이버시와 인권 따윈 이미 개나 줘버린 이 세상에, 과연 전쟁이 터지면 저 사람들의 재산이 온전할까?

물론 폭락과 폭등이 거듭되는 혼돈의 카오스 같은 이 장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나오긴 하겠지. 근데 대부분은 이득은커녕 평생 모은 목돈이나 날릴 거다. 세기의 천재 뉴턴도 날렸잖아?

그러니 그럴 바에는 이 기적의 경제인, 기욤에게 전쟁 동안 맡겨놨다가 전쟁이 끝나고 이자 좀 쳐서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는 매우 양심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자산을 동결까지만 하지 국고로 후루루짭짭 흡수할 생각은 없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우리 회사 주식은 영국인들에게 거의 연금이나 적금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야죠. 내가 뭐 때문에 20년 동안 조뺑이를 깠는데.”

나는 기쁜 마음에 담배를 물었다가, 곱게 자는 우리 애 생각에 슬그머니 답뱃갑에 도로 쑤셔 넣었다.

“공격은 총 4차에 걸쳐 진행합시다. 채권을 직접 건들긴 어려우니 주식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흔들죠.”

“한 번에 안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죽은 고양이도 옥상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박고 몇 번 튀어 오릅니다.”

살살 꼬드겨서 데드 캣 바운스(Dead cat bounce)까지 털어버려야지 한 번에 왜 칩을 다 써?

“우린 저 사람들로 하여금 저점에도 ‘아. 지금 단타 쳐도 되나? 혹시 아니라면? 저번처럼 잠깐 반등한 거고 다시 폭락하는 거라면?’ - 같은 생각만 하게끔 만들면 됩니다.”

그러니 모두들 위험한 투자일랑 그만두시고 안전한 금고지기 기욤의 금고에 돈을 넣어주시길.

***

“이제 좀 살겠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영국 재무부 공무원들은 요근래 가장 밝은 얼굴로 덕담이 주고받고 있었다.

“전쟁이 없으니 국고가 드디어 마이너스 통장에서 플러스 통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중국 놈들이 은을 아주 그냥 삽으로 퍼다가 막, 막 이렇게 넣어주니 살림살이가 팍팍 피는구만! ···이봐. 혹시 아편 수출을 더 늘릴 수 없나?”

“안 됩니다. 중국 황제가 칙서까지 내린 판에 여기서 더 판을 벌이면 위험합니다.”

“씁.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미국 독립전쟁과 식민지 정복으로 물 새듯 돈만 나가던 국고가, 드디어 아편 판매와 긴축재정으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외무부 놈들이 독일 내전에 꼽사리 끼자고만 안 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그놈들이야 맨날 외국에 빌려줘야 하니 돈 내놔라, 물자 내놔라 이 지랄이잖습니까. 회계 장부 한번 본 적 없는 주제에.”

“그러게 말이야. ···여하튼 오늘은 뭐, 별일 없는 거지?”

“예. 주식 시장이 살짝 하락했지만 그닥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고 제국 쪽이거든요.”

“아아. 그쪽이야 뭐. 요새 투자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수치가 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지. 자, 그럼 별일 없으니 퇴근하자고. 퇴근.”

영국 재무부는 오늘 칼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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