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도 사업입니다-277화 (277/341)

미래를 위한 초석 (6)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어.”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셨으면서 무슨 소리십니까?”

두 손님이 다녀간 이후, 응접실에서 다 먹은 다과상을 치우는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과 정의, 행복이 가득해야 할 이삭의 민족이 자꾸만 협잡과 타협, 어둠으로 가득해지고 있단 말입니다.”

“아, 예.”

잘못되긴 무슨, 아주 멀쩡하구만.

사장님은 항상 하는 말의 8할 정도는 저런 농담이나 개소리를 주워섬기셨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저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느라 진땀을 뺐지만,

이제 거기에 한참 적응해버린 비서는 달관한 표정으로 그저 묵묵히 찻잔을 트레이 위로 올릴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예, 사장님.”

“해군부에서 루카스 중령이 언제 온다고 했었죠?”

“1시간 뒤입니다.”

“젠장 뭐 쉴 수가 없구만. ···해군 쪽 프로젝트 서류 좀 가져와 줄래요?”

그는 질린다는 듯이 말하더니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사장님. 하루에 4시간만 주무신 게 벌써 2주째입니다. ···지금 1시간이라도 쉬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내가 1시간 덜 자면 사람 하나가 덜 죽어요~ ···어억!!!”

“사, 사장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세상에...”

사장님은 황망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할 때, 리듬을 붙였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아저씨라니. 내가 아저씨들처럼 말하면서 리듬을 타다니! 2회차면 평생 주름 없는 20대로 살게 해달라고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비서는 서둘러 트레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

대한민국 초등학교 역사 컬리큘럼을 이수한 사람은 자명고라는 북을 한 번쯤 들어는 봤을 거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동으로 공습경보 사이렌을 왱왱-하고 울렸다는 이 전설의 레전드 아이템.

내가 생각했을 때는 아마도 21세기 IT 및 군사공학의 결정체인 미군 정보자산 중 하나가 시공간을 트립해서 낙랑군에 떨어진 게 아닐까 싶지만, 뭐 여하튼 그런 전설적인 북이 있었다고 한다.

왜 이 얘기를 꺼내냐고? 내 꼴이 지금 딱 자명고 같거든.

오스만에 가서도, 스페인에 가서도, 나폴레옹을 만나서도 죄 전쟁이 난다! 전쟁이 날 거야! - 하고 다니니 이 정도면 인간 자명고 아닌가. 이거.

그리고 오늘, 시에예스와 로베스피에르 두 사람은 갑자기 정계에 헥토파스칼 킥을 꽂은 날 심문하기 위해 손에 손잡고 내 소중한 보금자리에 쳐들어왔으나,

인간 자명고인 내가 빼애액!-하면서 방음 처리한 응접실에서 전쟁의 ‘ㅈ’을 꺼내자마자 내 손을 붙잡고는 둘이서 흉계를 짜기 시작했다.

- 이보게, 막시.

- 왜 그러십니까, 에마누엘.

- 기욤 군의 말대로라면 필시 곧 큰 전쟁이 날 텐데,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면 우리 입법부도 ···두 팔을 걷어붙여야 하지 않겠나?

-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아니지. 반드시 그래야겠습니다. 의사결정에 1초가 늦어서 전장에서는 소중한 시민 1명이 죽을 수도 있으니.

- 그래, 그래. 그러면 우리가 선전포고를 받자마자 전시 거국내각(擧國內閣)을 꾸려야 하지 않겠나?

음음. 맞지. 전쟁 중에 정쟁보다는 일단 이기고 봐야지.

-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뭔가, 막시.

- 입법부가 아무리 단결한다 한들, 전쟁터에

유권자들이 나가 싸우고 있는 도중 선거를 열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 물론이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선거를 유보할 수밖에 없겠어.

- 그렇다면 법을 신설하여, 전시에는 행정부 수반을 유임토록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음음. 맞지. 민주주의도 선거도 중요하지만 일단 이기고 봐야지.

- 기욤 군, 축하하네!

- 엣?

- 자네 말마따나 전쟁이 곧 일어난다면 프랑스 최초로 전시 통령(Consul, 統領)을 맡아 수행하겠구만!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이 남겠어!

- 뎃?

- 우리 산악파도 혁명의 적을 일소하기 전까지 전적으로 전시 통령의 전쟁수행에 협력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캬, 둘이서 10년 넘게 붙어 먹더만 아주 그냥 선수들이 따로 없네.

이게 정치인가? 전쟁의 ‘ㅈ’만 말했는데 이 두 ㅈ간이 날 아예 꿰다가 저 베르사유에 처박아 놓기까지 고작 단 몇 초가 걸리다니.

“각하? ···각하?”

“아, 미안합니다. 중령. 잠시 잡생각이 나서.”

“하하, 아닙니다.”

코르시카에서 내 명령을 따라 전열함을 몰고 꼴아박던 해군 장교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실 ···이렇게 절 불러 해군을 신경 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

“그으... 각하께선 어떻게 보면 육군 출신 아니십니까.”

육군 출신? 내가 땅개인 거랑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런데요?”

“···그러니 해군을 싫어하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난 딱히 해군을 차별하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89년 이후 해군 재건이 매년 미루어진 것은-”

아... 해군 재건...?

하긴 프랑스라는 국가 특성상 육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했기에 빠르게 재건했으나, 해군은 차일피일 미루긴 했지.

이 시대나 현대나 군대는 생산성은 뭣도 없으면서 돈은 국자로 퍼먹는 하마나 다름없는 집단이다.

특히나 군함이라는 지폐소각기가 있는 해군은 더하고.

당장 영국만 하더라도 해군에 들어가는 돈 때문에 재무부 공무원과 해군성 장교가 권총 들고 결투까지 하지 않나.

그런만큼, 영국의 북해와 대서양 함대를 합친 것과 양적으로 비슷한 프랑스 해군에 들어가는 돈은 있는 군함 보수만으로도 재무부 직원들 눈가에 다크서클을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 물개 친구들이 보기에는 땅개 출신이 땅개를 편애하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겠네.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돈이 없어서 못 한 겁니다.”

“그렇, 군요.”

음, 저 눈 속에 담긴 생각이 보일락 말락한다.

‘그러면서 육군에는 새 소총을 사줘? 에베벱 구라치지마!’

틀린 말은 아니네. 반박할 수 없다.

나는 그에게 안심하란 뜻으로 두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오늘 중령을 여기 부른 건 잡담을 나누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제 정말 해군을 재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에는 돈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상당히 급박해졌습니다.”

“급박이요?”

다시 한번 인간 자명고가 왜애애앵-하고 울었고, 방금 전까지 눈을 꿈뻑꿈뻑 거리던 순박한 물개의 얼굴이 굳었다.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우린 영국 왕립해군과 일전을 벌이겠군요.”

“이기라고는 말 안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상봉쇄를 당할 경우 풀 수 있겠습니까?”

“해상봉쇄라 하심은.”

“생도맹그, 루이지애나로 가는 대서양 뱃길. 그 길이 막히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음.”

루카스 중령은 잠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해군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도버 해협을 건너는 육군의 엄호와 수송이었습니다.”

영국이 뱃길을 막고 상선들을 잘라먹는 데 성공하면 프랑스가 말라 죽는다.

프랑스가 40km 넓이의 도버 해협을 건너 육군을 도버와 런던에 드랍하면 프랑스가 이긴다.

“따라서 현 해군 사관들과 수병, 부사관들이 공유하는 작전계획과 전술은 각하께서 생각하는 바와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애초에 교육받은 목적이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해군은 항상 육군의 부속품이었으니까요.”

현 총사령관 라파예트만 하더라도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해군을 자신의 팻말 삼아 요크타운 전투에 써먹었었으니 루카스 중령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교범을 바꾸고 재교육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각하께선 개전일을 언제쯤으로 잡고 있으십니까?”

“내년 아니면 내후년.”

“1년에서 2년이라. 겨우 1년 안에 영국군과 포격전을 벌일 만큼 교육하긴 어렵습니다.”

어디까지나 교육을 한다 해도 실전을 경험한 놈들을 따라가지는 못할테니까요.

에이 씨바 뭐 다 안된대.

나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대충 의자에 던져버렸다.

“젠장, 그러면 뭐 아예 방법이 없습니까? 우린 뭐 손가락 빨면서 뒈져야 하나?”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는 손바닥 두 개를 펴 내게 보여주더니, 그대로 움직여 두 손바닥 사이에 틈이 없도록 붙였다.

“백병전을 한다면 승부는 모릅니다.”

“백병전.”

“어차피 포격전은 우리가 무조건 집니다. 그럴 바엔 적함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게 승률이 높지요.”

“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우리 해군은 그렇게 안 했습니까?”

“간단합니다. 백병전을 하려면 배를 붙여야 합니다.”

“그렇죠.”

“근데 배를 못 붙여요.”

이건 또 뭔 띵크빅 같은 소리지.

그러나 루카스 중령의 말은 간단했다.

우린 운전실력이 더럽게 없다.

저쪽은 운전을 졸라게 잘한다.

그러면 우리가 저쪽에 백병전을 걸려고 배를 붙이면 그동안 적은 그 배는 되는 거리를 도망간다.

그동안 우린 포사격에 존나게 맞는다.

가까이 배를 붙이기 전에 우리 배가 먼저 침몰한다. 끝.

“그러니까 기동력만 갖춰진다면 된다는 거군요.”

“범선의 특성상 그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기동력, 범선의 특성, 이라. 으음. 내가 중령을 오늘 왜 불렀는지 모르는군요.”

“예?”

“따라오세요.”

나는 풀어놓은 넥타이를 다시 매고, 외투를 걸친 후 중령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동차는 타본 적 있습니까?”

“종종 이용합니다.”

“그러면 얘기가 빠르겠네. 기사님, 기술개발부로 갑시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달리길 한참.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중령을 데리고 커다란 건물 문을 두드렸다.

“아, 사장님 오셨습니까!”

“제품은 준비됐습니까?”

“아직 신뢰성이 퍽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쓸 만은 합니다!”

“좋군요. 안내해주십쇼.”

나는 뒤따라온 루카스 중령에게 턱짓으로 따라오라고 한 뒤, 연구원 하나를 따라 계속 들어갔다.

연구원은 검은 천으로 쌓인 거대한 무언가에 다다르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천을 치웠다.

“허, 이게 뭡니까?”

“이삭의 민족이 20년 동안 축적한 증기기관 기술의 산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웅장하군요.”

사람 키보다 큰 기계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던 루카스 중령은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건 무슨 용도입니까? 거대한 신형 기관차인가요?”

“아뇨.”

나는 파이프에 담배를 쑤셔 넣으며 말했다. 석탄이 즐비해서 궐련을 피웠다간 와르르 맨션으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르거든.

다 넣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나는 루카스 중령이 보라는 뜻으로 벽면에 걸린 설계도를 가리켰다.

배의 선창 아래 자리한 거대한 공간에 턱 하니 박혀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

그리고 배의 좌우현에 달린 거대한 물레방아.

“군함, 입니까?”

“그럼요. 현대화 개수라고 해야 하나.”

나는 멍하니 거대한 엔진과 설계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루카스 중령에게 입을 열었다.

“바람의 영향보다 증기력을 통해 스스로 항해할 수 있다면, 기동력에서 우리가 따라잡지 못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이 녀석이 충분한 조커가 되면 좋겠는데.

1810년

1810년 2월 19일.

아직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파리 시민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 군데군데 붙은 팜플렛을 바라보던 이들은 팔짱을 끼고 친구면 친구끼리, 가족이면 가족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누가 이길 거 같나?”

“누구긴. 안 봐도 뻔하지.”

“하기야.”

처음에는 다들 ‘저 양반이 왜?’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뭐 사람 마음이야 바람 한 번 불면 달라지기도 하는 거 아니겠나.

아니면 옛날처럼 누가 총감을 꼴받게 만들기라도 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누군지는 몰라도 참 딱하구만.

따라서 그런 조그마한 의문 정도는 그가 돌아왔다는 것에 환호하는 이들의 열기 앞에서 햇살에 눈 녹듯 사라졌다.

“기욤 드 툴롱을 베르사유로!”

“그냥 올해 선거는 총감 자리 기욤한테 주고 시작하자!”

“기욤! 기욤! 기욤!”

“뭐어... 세이 교수도, 콩도르세 국장도 다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인 건 맞는데-”

“그래도 기욤 드 툴롱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뽑는 건 좀... 그렇지요?”

“능력 좋고, 인성 좋고, 모난 데 하나 없지. 패에 이미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붙었는데 굳이 새로 패를 뽑을 필요는 없잖아.”

노동자, 농민, 중소 사업가와 공장주들.

혈기 넘치는 젊은이부터 장년층까지.

노동자는 이제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아 갈 수 있었다.

농민은 드디어 남의 땅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파먹을 수 있는 땅을 얻어 보습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중소 사업가들과 공장주들은 더 이상 더러운 뒷배를 얻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찔러줄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의 사업체를 온갖 협박과 회유로 얻어내려던 무서운 강도 귀족들은 더 무서운 권력 앞에 무릎 꿇었다.

투표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 프랑스에서 투표 결과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총감의 인기가 참 대단합니다그려.”

“모두 그가 스스로 일구어낸 결과지요.”

“스스로 일구어냈다라, 그래. 그 말이 맞지.”

기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저 멀리 투표소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부럽다니요?”

“누군 겉보기에만 멋있는 새장 속에 갇혀 있는데, 누군 이 세상을 진일보시키고 변화시키니 하는 말입니다.”

“폐, 폐하!”

“소리가 너무 큽니다. 장관. 공연히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행동은 자제하시구려.”

국왕, 루이 18세는 입술에 검지를 올려 자신과 함께 암행을 나온 내무부장관 조르주 당통에게 주의를 줬다.

당통이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는 잠시, 루이 18세는 저 멀리 투표소 앞에서 펄럭이는 삼색기를 바라보았다.

‘내가 꿈꾸던 삶은 저 삼색기를 들고 동지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자신은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예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멍 때리기라는 형벌을 받으며, 언젠 찾아올지 모를 ‘공화국 선언’이라는 석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대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아버지. 오를레앙이 내란모의라는 대죄를 저질렀지. 그렇지만 연좌제는 이미 폐지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이 왕이라는 이름의 도장 찍는 기계 역할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장관. 사람 하나 살린다고 치고, 그냥 공화국 선언해주면 안 되오?”

“안 됩니다.”

“당신 공화주의자잖소. 30년 전에 나랑 같이 공화주의 운동도 했었으면서!”

“죽은 미라보는 때가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가 오길 기다리십시오.”

“젠장.”

루이 18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 자신이 자의든 타의든 국왕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프랑스는 전 세계의 공적( 公 敵 )이 되리란 걸.

하지만 희생도 정도 것이고, 죽은 미라보와의 약속도 20년 지켰으면 많이 한 거 아닌가.

이제는 루이 18세 자신도 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끝내고 싶었다.

저 멀리 투표소가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던 루이 18세는 말머리를 돌려 베르사유로 향했다.

올해는 제발 이 자리에서 내려갈 수 있기를.

***

청나라.

복건성(현 푸젠성, 대만의 맞은편).

이곳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의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마치 지구 반대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가며 공부한 어떤 군인이 생각나지 않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청년은 나폴레옹보다 조금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나폴레옹은 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재수는 안 했지만, 이 청년은 과거에 두 번이나 재수를 박고 삼수생이 되었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이제는 나이가 머리가 조금씩 굳어가는 것 같이 느껴지는 25세라는 것.

“···설마 이러다가 시골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애들 가르치는 훈장 노릇이나 하는 건 아니겠지?”

삼수생, 임칙서(林則徐)는 두 손을 올려 얼굴을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그런 임칙서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이놈, 칙서야. 순무( 巡 撫, 현 도지사 )께서 부르시거늘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고 있느냐?”

“아닙,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시험 공부하랴, 인생 걱정하랴, 거기에 순무 나리 밑에서 뺑이치랴.

몸이 세 개여도 부족할 노릇이지만 임칙서에게는 불행히도 몸이 하나였다.

부리나케 필기구를 챙겨 순무 나리께서 기거하시는 곳으로 달려 나가자, 벌써 회의는 시작된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요근래 광둥성(현 광저우)에서-”

“어, 서기가 왔느냐. 서둘러 시작하라.”

“예! 나리!”

서둘러 먹에 붓을 찍고 순무 나리와 다른 고관들이 하는 말을 적어 내려갔다.

“자, 서기가 왔으니 본격적으로 논합시다. 광둥 순무가 뭐라 했다고?”

“영국인들의 아편 밀매가 근 5년 간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합니다.”

“그래서?”

“행정력이 과부화 되어 옆 성인 우리 복건성에 지원을 청하신답니다.”

“쯧쯧. 저잣거리에 풀떼기 하나 도는 걸 못 잡아서야 광둥 순무에게 순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구나.”

“실로 그렇습니다, 나리.”

“혹시 이중 광둥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는가?”

“예, 소인이 듣기론-”

그러니까 영국이라는 곳에서 온 외국인들이 광둥성에서 아편을 팔아 재끼고 있다는 건가?

임칙서는 붓을 놀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영국인들이 잘 숨는다면, 그들이 숨기 전 도망갈 곳이 없는 바다에서 배를 나포하여 조사, 압수하면 될 것 아닌가.”

“그것이... 영국인들의 배가 우리의 것보다 상당히 빠르다고 합니다.”

“쯧쯧. 그것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광둥 순무가 진실로 그 죄인들을 쫓으려 한다면 대국의 수군이 오랑캐 양이(洋夷) 상선 하나 못 잡겠는가?”

“순무 나리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런가? 아닌 거 같은데.

“영국, 그리고 아편이라.”

“칙서야.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아니, 아닙니다 나리!”

“원, 싱거운 녀석.”

영국, 그리고 아편이라.

임칙서는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걸 느꼈다.

***

대영제국, 런던.

“야 이 새끼들아! 지금 이게 말이 돼!?”

“나참.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성공한 사업가, 젠트리의 상징인 실크햇과 외 눈 안경을 쓴 공장장은 어이가 없는 듯 소리쳤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히 돌아가는 방직기였어!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고장 나 있는 게 말이나 돼!”

그는 누군가 실수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작동 중에 오작동을 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마모 때문인지 흉하게 닳아버린 방직기 부품을 노동자들 앞에 던졌다.

“이야 완전 박살이 났네?”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긴 뭐가 있어!”

공장장은 눈을 부라렸다.

“네놈들이지?! 네놈들이 밤 중에 담 넘어서 다 때려 부순 거 아니냐! 누가 얼마 주고 시키던? 맞은편 공장장? 그 뚱땡이 놈이냐?”

“우리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자리를 때려부숩니까?”

“그려요. 우린 다 일 끝나면 피곤에 쩔어 버리는데 발 닦고 집에서 잠이나 잤지.”

“이, 이이익!!”

분에 못 이겨 방방 뛰는 공장장 앞에서 노동자들이 쑥덕였다.

“야, 너냐?”

“나겠냐?”

“하긴 너 같은 겁쟁이가 그랬을 리 없지.”

“저 공장장 새끼가 발정기 온 개새끼 마냥 뛰는 거 보니까 아주 고소하긴 하네.”

“그래서 누가 한 거야?”

“혹시 몰라. 네드 러드(Ned Ludd)가 했을지.”

“네드 러드?”

“그게 누군데.”

“옆옆 공장에서 방직기 두 개 해먹은 꼬맹이 있어. 7살이던가.”

“허, 꼬맹이가 인생 참 스펙타클하게 사네.”

어차피 기계도 고장났겠다, 공장장은 제정신도 아니겠다, 어차피 오늘 일은 공친 게 분명하니 하나둘 담배를 꼬나물고 얘기하길 한참.

“니들은 다 해고야! 해고!”

“뭐?”

“아아니 공장장 양반. 우리가 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릴 해고하는 거요!”

“닥쳐! 어차피 네놈들 나가도 들어올 놈은 많아! 다 꺼져!”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다 잘라내고 쫓아내 버리면 범인도 그 속에 섞여 있겠지.

누군가는 무식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어차피 <단결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노조의 설립,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 파업이 모두 불법이 되어 잘라도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항의할 수 있는 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다 잘라버리면 문제도 사라지지 않겠나.

게다가 인클로저 운동 때문에 시골에서 쫓겨난 잉여인력 덕에 런던에는 일용직 노동자야 넘쳐났다.

대체 인력이야 공고 붙이면 하루만에 다 모집할 수 있으리라.

“···좋아. 어디 두고 봅시다.”

“카악 퉤!”

그리고 그날 밤. 런던의 한 공장은 부서진 방직기 세 대를 더 받게 되었다.

“씨발! 다 때려부숴!”

“고사리 같은 손 하나로 기계를 부수시는 네드 러드 장군님을 본받자!”

“개새끼들 우리도 프랑스처럼 다 죽여버려야 정신차리지!”

대영제국 구석. 그간 곪았던 곳이 조금씩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

신성로마제국, 빈.

흰색 군복을 차려입은 장군이 예의 바른 태도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라데츠키입니다. 전하.”

“들어오게.”

-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자, 30대 후반의 남성이 지도를 펴놓고 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프라이부르크 남작이 우리 측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좋았어!!”

그는 손을 불끈 쥐더니 라데츠키를 향해 말했다.

“수고했네 장군.”

“아닙니다. 전하.”

“아니야. 자네 같은 충신이 우리 제국에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대공 전하의 혜안 덕입니다.”

“좋아, 서로 자존감은 다 채워줬으니 일 얘기를 하자고.”

남자는 팻말을 가져와 지도 위에 척척 올렸다.

“우군 측 병력은?”

“황실근위대 8천. 제 휘하 병력 2천. 나머지 영주들과 황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이 약 2만 5천입니다.”

“다 합쳐서 3만 5천이라. ···우린 명백히 숫자에서 저 제국의 기생충들보다 열세네. 하지만 저자들은 지휘권이 통일되기 전엔 오합지졸일 뿐.”

이제 다 쓸어버릴 시간이다.

“작전 개시일은 5월 말. 여름 직전 선선할 때 최대한 적을 몰아붙인다.”

1810년은, 제국의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해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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