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초석 (5)
1809년 말.
파리, 마르스 광장.
“와아아아!!!”
산악파 특유의 수수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잘생긴 중년 남자가 단상에 오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손을 들어 청중들을 진정시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후로 1800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하루하루 진보하고 또 진보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을 생각해보십시오. 말 대신 기계장치를 타고 다닌다고 누군가 말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과대망상증 환자, 아니면 정신병자라고 비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증기자동차를 타고 매일 아침마다 일터로 출근하고 있으며, 항구에서는 증기기관차에 짐을 실어 도시로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사이 우리 인류가 또 어떤 진보를 이뤄냈는지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은 뒤,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만년필이 잉크를 빨아들이듯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방향타를 잡아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 최첨단 문물에 쉽게 적응하고 각종 시사, 경제 문제에 해박한 자.
지금 프랑스는 그런 자가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나다!
“국민 여러분! 앞으로 4년 동안 이 나라 경제를 이 장 바티스트 세이(Jean-Baptiste Say)에게 맡겨주신다면 이 세이가 여러분께 번영을 안겨드리겠습니다!”
“와아아!!”
“세이! 세이! 세이!”
“세이라는 저 양반 어때?”
“파리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라던데. 학자들하고 은행가들 사이에선 유명한 사람인 거 같더라고.”
“아, 들어봤어.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영입해 온 사람이라며?”
“확실히 경제는 산악파가 믿을 만하긴 해. 당장 로베스피에르만 한 경제통이 어디 있겠나.”
같은 시각, 구 바스티유 감옥. 현 혁명 광장.
“국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우리 프랑스에서 재무총감이란 직책은 타국의 재무장관과 달리 단순히 경제 문제만을 살피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른 부서들을 이끌고, 의회와 시민의 뜻을 존중하며 4년간 국정을 수행해야 하는, 실질적으로 총리나 다름없는 자리지요.”
“옳소! 옳소!”
“평원파! 평원파!”
박수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가 점차 잦아들자, 평원파 쪽 대변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라서 우리 평원파는 그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친화력 높으며, 유능하기까지 한 분을 이번 재무총감 선거에 추대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큰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니콜라 콩도르세 의원님이십니다!”
“예에, 안녕하십니까아-”
“와아아!!”
“콩도르세! 콩도르세!”
이제 예순 줄에 접어든 콩도르세는 청중이 안 보이게 입을 빼쭉 내밀었다.
‘이봐! 난 한다고 한 적 없소!’
‘에이 국장님 아니면 그 누가 재무총감을 합니까?’
‘아니, 난 하기 싫다니까?’
‘산악파 쪽이 우리가 눈독 들이던 후보를 가로챈 지금, 국장님 말고 후보에 추대될 사람은 없다니까요?’
전직 조세국장 출신에 입헌의회 의원에, 국민의회 의원, 무엇보다도 재무총감 일을 해봤다는 거.
가히 성골 중의 성골이라 할 수 있는 사기적인 커리어를 보라.
그 누가 콩도르세를 정수리가 휑하다고 깔망정 전문성이 없다고 깔 수 있겠는가?!
‘전문성은 개뿔이. 내가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어언 10여 년이 다 돼가는데!
게다가 당에는 이 퇴물 늙은이 말고도 젊은 은행가라던가 금융가들이 있잖소.’
‘듣도 보도 못한 신입들을 누가 뽑아줍니까. 국장님 말고 저쪽에 대항할 네임드는 전무 하다니까요!’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이제 육십 줄 넘어 은퇴만을 앞둔 늙은이에게 노인공경은커녕 이렇게 부려 먹는단 말인가.
“““콩도르세! 콩도르세! 콩도르세!”””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저 시민들을 외면하기도 어려운 콩도르세는, 결국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두 정당이 선거전략을 짜고, 후보를 추대하고, 팜플렛을 만들어 뿌리기 시작할 무렵.
“흐아아암. 뭐 재밌는 일 없나?”
“재밌는 일이요?”
“이렇게 앉아만 있으니 좀이 쑤셔서.”
“···우리가 바쁘면 큰일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파리 시청 공무원들은 누가누가 커피를 잘 타나 시합하는 것 외에는 한가롭게 펜을 손에서 빙빙 돌리고 있었다.
“아, 안 되겠다. 나 화장실 좀.”
“저번처럼 1시간 후에 오면 화낼 겁니다.”
“아이구, 요즘 신입들 무서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선배는 잡지를 서너 권 챙겨 화장실로 도망갔고, 졸지에 데스크엔 갓 공무원이 된 파릇파릇한 청년만이 앉아 있게 되었다.
- 덜컹.
그때, 누군가 시청 문을 열고 들어와 창구 앞에 앉았다.
“실례합니다.”
“아, 예.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청년 공무원은 냉큼 눈으로 방문객을 위아래로 훑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상하의에, 광나는 구두, 정갈하게 손질된 머리에다가 손에 시계를 차고 있는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회계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그게 아니면 사람 만나는 일이 잦아 깔끔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사업가?’
“혹시 세금 문제로 오셨다면 이쪽이 아니라 우측에 있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남자는 손을 휘휘 젓더니, 손가락으로 저 멀리 벽에 걸린 벽보를 가리켰다.
[1810년 재무총감 선거 공보.]
“아직 출마 가능 기간인 걸로 아는데. 저도 출마하려고요.”
“아... 출마요?”
그는 서류철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인적사항을 써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흠, 뭐 예전이랑 딱히 바뀐 건 없네요.”
예전이랑 딱히 바뀐 게 없어? 뭐하는 양반이지. 이 사람.
공무원이 마뜩잖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동안, 남자는 서류를 싹 채우고는 서류를 스윽 내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벌써 가십니까?”
“일이 좀 많아서요. 어차피 제가 할 일은 더 없지 않나요?”
“예에,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긴 하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그래도 보통은 저렇게 쿨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데.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휘적휘적거리며 문을 열고 사라졌다.
“무슨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네.”
“어우 시원하다야. ···뭐야, 누구 왔었냐?”
“사람 하나 왔다 갔는데, 선거인명부에 이름 적고 갔습니다.”
“참나. 지가 뭔데?”
선배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남자가 두고 간 서류를 쭉 읽어 내려갔다.
“······.”
“뭐하는 양반이래요?”
“···시장님 오늘 어디 가셨지?”
“오늘 경찰청장하고 테니스 치러 간다고 하셨는- 선배? 선배 어디 가요!”
***
[단독 입수! 선거인명단에 새로운 재무총감 후보 등록!]
“뭐야, 후보가 또 나와?”
“이미 산악파랑 평원파는 죄다 사람 내보내지 않았어?”
“‘헌법의 친구 당’이 있긴 한데... 거긴 애초에 군소정당 아닌가?”
“그러면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별 또라이를 다 보겠구만.”
“지지율 10퍼센트는 넘을 수 있을까? 안 그러면 돈만 버릴 텐데.”
“그건 그 인간이 걱정할 문제지.”
이미 거대 양당이 후보를 내서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판에 새로운 후보?
어차피 당도 없는 놈이잖아? 떨어질 게 뻔해.
사람들은 조그마한 호기심을 표했을 뿐, 굳이 새로 등록했다는 그 후보에 대해 딱히 거창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특종! 기욤 드 툴롱 전 재무총감, 선거인명부 등록.]
“음. 찌라시군.”
“그럼. 맞고말고.”
“참나. 기욤 그 양반이 재무총감을 하고 싶었으면 애진작에 했지.”
재무총감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사람이 재무총감 선거에 나간다고? 세 살배기 애도 안 믿겠다.
이걸 특종이랍시고 써 내려간 기자도 그렇고, 그걸 또 컨펌한 편집장도 그렇고 아주 신문 하나 팔아먹겠다고 용을 쓴다.
그렇게 모두가 신문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기던 며칠 후.
“아빠! 오늘치 신문 왔어요!”
“식탁에 올려놓거라.”
“이번 달 심부름 값은요?”
“아빠 지갑에서 지폐 한 장 가져가렴.”
따듯한 모닝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식탁에 앉아 1면을 쭉 읽어 내려갔다.
[1810년 재무총감 선거인명부
- 장 바티스트 세이 / 산악파
현 파리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
현 아카데미 프랑세즈 경제학 부문 이사.
현 무역거래위원회 상임이사.
- 니콜라 드 콩도르세 / 평원파
전 조세국장.
전 입헌의회 의원.
전 국민의회 의원.
제 2대 혁명정부 재무총감.
- 기욤 드 툴롱 / 무소속
현 이삭의 민족 사장.
전 3신분 대표 의원.
제 1대 혁명정부 재무총감.]
“푸우우우웁!!!”
파리, 오를레앙, 마르세유, 툴루즈 등등. 전 프랑스에 있는 식탁에서 커피, 우유, 물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분무기에 넣은 거 마냥 허공에 흩뿌려졌다.
***
“지금 장난해!? 그 은거기인이 대체 왜 갑자기 선거에 나와!!!?”
“아, 아무래도 산악파와 뭔가 뒤쪽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단일화를 한다던가-”
“지금 장난해!? 그 은거기인이 대체 왜 갑자기 선거에 나와!!!?”
“아, 아무래도 평원파와 뭔가 뒤쪽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지지선언을 해준다던가-”
하루아침에 거대한 태풍이 경고도 없이 상륙해 모든 걸 초토화시키자, 각 당 수뇌부들은 모두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산악파 당수를 만나 보지.”
“제가 직접 평원파 당수를 만나 보겠습니다.”
결국 이럴 때 나서게 되는 건 항상 그렇듯 우두머리들.
파리 교외의 헛헛한 저택에서 양 당수가 만나 의견을 나눴다.
“···이보게. 막시.”
“뭡니까, 에마누엘.”
“자네, 저 친구한테 뭐 들은 거 있나?”
시에예스의 말을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있겠습니까?”
“하긴. 뭐 씹은 거 같은 얼굴을 보니까 아닌 거 같더군.”
시에예스는 신문을 대충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니면 자네 혹시 그 친구한테 결투장이라도 보냈나?”
“미치셨습니까?”
“아니면 다행이고. 얼른 일어나게. 당사자한테 직접 가서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인지 알아봐야겠어.”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양측 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
원래 전쟁에서도 뚜렷한 계책이 없으면 정공법이 답 아닌가.
두 사람은 저택을 나와 숱하게 오고 갔던 그놈의 집으로 향했다.
- 똑, 똑, 똑.
“누구세요.”
“날세. 기욤 군.”
“오랜만입니다. 총감.”
“아니. 바쁘신 분들이 여긴 무슨 일로-”
“얘기 좀 하지.”
기욤은 흔쾌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응접실로 데리고 갔고, 이내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이것부터 묻지. 대관절 왜 이렇게 폭풍을 부른 건가?”
“폭풍을 부르다뇨. 전 불고기도 아니고 전학생도 아닌- 큼큼. 농담 좀 했다고 그렇게 쳐다보시지는 마시고.”
“그럼 여기 있는 막시와 내가 납득이 좀 가게 설명해보게.”
“뭐어, 그러죠.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까-”
기욤은 이제 자신이 자명고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