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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증기의 시대 (5) (237/341)

증기의 시대 (5)

“으음.”

감긴 눈 너머로 비치는 햇살에 절로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나와 대충 빵 한 덩이를 떼어내 입에 넣고, 어제 입었던 작업복을 다시 주섬주섬 꺼내 입는다.

작업복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때문에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주일이니 늘어지게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미간을 펴줬다.

“그래, 냄새 좀 나면 어때. 하루만 더 입고 빨 건데.”

조금 더럽다고 작업복 하나를 더 버릴 순 없지 않은가. 귀찮게시리 빨랫감도 늘어나고.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서늘한 겨울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옷소매를 끌어다가 시린 콧잔등을 덮은 뒤, 혹여 빙판에 미끄러질까 종종걸음으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직장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큼지막한 직물 공장. 사거리를 몇 번 지나고, 골목을 몇 블록 지나자 익숙한 얼굴이 드문드문 보인다.

“여어 간밤에 안 죽고 살아있었구만. 용케 안 얼어 죽었네?”

“얼어 죽다뇨. 아직 팔팔한 저보단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아저씨가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새애끼 짬 좀 찼다고 작업 반장한테 이젠 그런 말도 하네?”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호탕하게 웃는 그를 따라 마지막 골목을 지나자,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건물 앞에 정차한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저씨. 저게 뭐죠?”

“마차 아닌가? 근데 엄청나게 크네.”

“말이 없는데요?”

“···그러게? 생긴 건 마찬데 말야. 마부가 어디 메어놓은 건가.”

웬만한 마차보다 서너 배는 길고, 굴뚝 같은 곳에서 연기도 올라온다.

즐길 거리라곤 없는 19세기 초, 기껏해야 유랑 서커스단 즈음에서 볼거리가 끝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특이한 마차(?)는 시선을 잡아 끌기 충분했다.

“저 양반이 마부 같은데.”

“뭐, 앞에 앉아 있긴 하네요. 말은 없지만.”

“아니, 저게 뭐래요? 신기하게 생겼네.”

“우리도 지금 막 보기 시작한 거라 잘 모르겠소.”

어느새 두 사람이 서 있던 도로 가장자리가 인파로 바글바글해지고, 사람들이 한 마디씩 주워섬기기 시작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도로를 가득 채웠다.

“어, 어, 나 저거 비스무리한 거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뭐 아는 거 있으쇼?”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요 앞에서 왔다 갔다한 기차인지 뭔지하는 그 기물(奇物)하고 비슷하게 생긴 거 같아요.”

“에이 그건 짐 싣는 기계 아뇨? 저긴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러게 뒤에 사람이 타고 있네.”

“지금도 타는데?”

어떤 사람의 말마따나, 몇몇 사람이 객차에 오르자, 마부는 명단 같은 걸 쭉 체크하더니 객차 문을 닫고 마부석에 올라갔다.

- 푸쉬이익.

마부가 레버를 잡아당기자, 복잡하게 생긴 마차 곳곳에서 훈김이 뿜어져 나왔다.

“마, 말 없는 마차다!”

“말 없이 마차가 움직인다!”

“마법이다! 마법사다!”

“마법은 무슨. 멍청아, 저건 증기력이란 거야!”

이미 몇 차례 증기기관의 마법 같은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마법이니 마술이니 하는 헛소리가 나오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어느새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는 커다란 마차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당혹, 놀라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익숙함이 섞여 있는 시선이었다.

“뭐야, 마차 옆에 뭐라고 써져 있는데? [이삭의 민족 사원 통근 3호차]?”

“저기 탄 사람들은 그러면 이삭의 민족소속 사람 뿐이란 거야?”

“그런가 봐.”

“캬, 성공했네.”

“허, 참. 이삭의 민족이라니.”

“아저씨 왜요?”

“원래 네가 하던 업무를 맡았던 전임자 녀석이 저기 들어갔었거든.”

“진짜요?”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치냐? ···그땐 면접을 보러 간다는 그놈한테 꿈 깨라고, 부자들이 정말 널 고용해줄 것 같냐고 나쁜 소리만 했었지.”

“왜, 왜요?”

“너야 이제 스물이니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겠지만 89년 이전의 파리는 그런 말이 통하던 곳이었다.

남작님이니 공작님이니하는 높으신 분들이, 돈 깨나 있다는 공장장이 기어다니라면 기어다니고, 머리를 박으라고 하면 박아야 하는 곳.

그래서 이삭의 민족이니 뭐니 하는 회사에서 뿌린 구인 전단지를 든 그놈한테 꿈 깨라고 했지. 성격 더러운 부르주아지의 악취미에 엮일까 봐.”

그런데 틀린 건 나더라고.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네 전임자가 지금 그 이삭의 민족에서 뭘하고 있는 지 아냐?”

“모르겠는데요.”

“부사장. 아주 출세했지. 플로리앙 그 녀석이 제 어머니 준다고 간편식사 품에 싸 넣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너도 집에 가면 피곤하다고 디비 자지만 말고, 알파벳 책이라도 사서 글이라도 떼라.

안 그래도 넌 일머리도 있고, 손재주도 꽤 좋아서 방직기도 곧잘 고치니 혹시 모르잖냐.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오는 시대니까.”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말했다.

멀어지는 마차 뒤로 희끄무레한 담배 연기가 섞여 아지랑이처럼 마차의 뒷모습이 일렁거렸다.

***

- 기욤 드 툴롱이 이번에도 이상한 짓을 한다더라!

- 이삭의 민족에 입사하면 회사가 아예 자택 앞으로 데리러 온다더라.

- 증기로 움직이는 마차가 있는데 그걸 파리 전 지역에 보내서 출근시킨다더라.

- 기욤이 만든 마차는 한겨울에도 객실이 후끈후끈하다더라.

- 증기기관에 마차 조합 진짜 개지립니다.

아주 감사하게도, 도심에 나타난 자동차는 얼마 안 가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크헤헤헤.

“현재 자동차에 관심 있는 여론 또한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대부분의 조사 결과, 자동차가 무섭다던가, 아니면 믿지 못하겠다는 응답보다 ‘타보고 싶다’, ‘신기하다’ 등의 응답이 월등히 높이 집계되고 있습니다.”

“언론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 판매량 5위 안에 들어가는 모든 신문 및 잡지사와 인터뷰를 잡아놨습니다.”

“최대한 빨리 당깁시다. 오늘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시끌시끌할 때 해야지, 조용해지고 해봤자 미적지근하기만 할 테니까요.”

“예, 사장님. 바로 접촉하겠습니다.”

***

“재무총감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보게 된 <인민의 벗> 편집장, 장 폴 마라는 내게 손을 기껍게 내밀며 말했다.

나 또한 그의 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재무총감은 무슨. 그거 때려친 지 벌써 몇 년 됐는데, 그냥 기욤이라고 부르십쇼.”

“하하, 알겠습니다. 기욤 사장님. 그 털털한 성격은 전 세계를 보고 오신 뒤로도 여전하시군요.”

마라는 사람 좋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덕에 지금 파리 곳곳이 시끌벅적하더군요. 알고 계신지요?”

“모를 리가 없죠.”

“알고 계시다니 일이 빨리빨리 처리되는 기분이라 좋군요. 그러면 세간에서 말 없는 마차로 불리우는 그 신문물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말 없는 마차라, 나쁘지 않은 별명입니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굳이 마(馬)를 붙여야 할까 싶네요.”

“오, 혹시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으십니까?”

“말이 끌지 않으니 아예 마를 빼고 자동차(automobile)라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호오.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단어 선정이시군요. 굉장히 예술적이고 프랑스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메모해두겠습니다.”

마라는 싱글벙글거리며 수첩에 글을 쭉 적어 내려가고는 다시 물었다.

“사장님께선 지금 자동차를 이용해 사원들을 출퇴근시키고 계신데, 왜 그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서죠.”

“오오. 복지요?”

마라는 이전보다 더 관심을 가진 듯, 자기도 모르게 몸까지 내 쪽으로 기울였다.

역시 ‘이럴 거면 왕 없애버리고 공화정하자!’라고 주장하던 혁명파 출신답다고 해야 하나.

“마라 씨도 아시겠지만 이 겨울에 출근하기가 참 좆같, 아니.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죠.”

“안 그래도 추운데 눈이라도 내리면 옷은 축축해지지, 퇴근할 때 되면 쌓인 눈 헤치고 나가느라 신발도 축축해지지. 저야 회사가 바로 집 앞이니 상관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여간 고생이 아니지요.”

나는 자동차 스펙을 정리해놓은 템플릿을 건네주며 이어 말했다.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개발해낸 자동차, 에피(épi) 1호는 그런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호오.”

“한 번에 30명을 실어 나를 수 있고, 증기기관에서 발생하는 열을 객차 내부로 순환시켜 보온을 챙겼으며, 그 외에도···.”

말이 길어졌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우리 자동차 진짜 개쩜. 님도 타쉴?

한바탕 카탈로그와 내 말을 들은 마라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의 말을 듣자 하니, 자동차는 마치 말이 가진 단점을 모두 보완해낸 발명품처럼 느껴지는군요.”

“먹을 필요도, 쉴 필요도, 말을 안 듣지도 않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하, 그렇다면 상용화는 언제 될런지요?”

호기심 가득한 마라의 질문에 나는 도오오저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예? 상용화라니요?”

“···?”

마라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그, 그러니까 일반인들에게는 언제쯤 자동차를···.”

“죄송하지만 지금 자동차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할 계획은 없습니다.”

“예?”

“안타깝게도 저와 회사 실무진들 간에 조사한 결과, 자동차를 민간에 풀기엔 수지가 잘 안 맞는다고 나오더군요.

아무래도 크기도 개인이 사기엔 크고, 가격도 꽤 비싸니까요.”

“그 말씀은 지금...”

“예. 안 팔고, 안 태운다는 뜻입니다.”

자, 마라 씨. 이제 가서 펑펑 터트려주세요.

***

[자동차란 무엇인가? 이삭의 민족 기술진, 엘뢰테르 듀퐁 박사(진)에게 묻다.]

“햐, 이거 기사 보니까 대단한 물건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야.”

“언제쯤 우리도 타볼 수 있을까?”

“뭐어, 이삭의 민족이면 금방 될 거 같은데? 거기 맨날 신기술이다, 신제품이다 하면서 몇 달마다 뭘 내놓잖아.”

“하기야.”

[자동차, 상용화 불가능? “기욤, 수익을 거두기 힘들다.”]

“뭐야, 안 내놓는다고?”

“그럼 우린 못 타는 거야?”

[현 이삭의 민족 사원에게 묻다. 자동차 통근 도입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가.

···사원들이 뽑은 제일 좋은 점은 힘들게 걸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차에 탄 뒤 10여 분 동안 쪽잠을 더 잘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나도 타고 싶어!”

“딱 한 번만 타보면 안 되나요?”

사람이란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제 것보다 남이 가진 것에 더 관심을 보이는 동물이다.

하물며 자기가 떡을 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관심이 아니라 꼴이 받는 게 사람이다.

[이삭의 민족은 본래 민간에 자동차를 공급하지 않으려 했지만.

고객 여러분과 사회를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서 저희 이삭의 민족은 고객님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을 통감했습니다.

그에 따라 다시 한 번 저, 기욤과 이사진들은 여러분들을 위해 본사의 지침과 사업계획도를 대대적으로 보완하여 마침내 여러분께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 이삭의 민족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시내를 순환하는 자동차들을 도입하여 고객 여러분들께 편안한 대중교통 서비스를 공급하고자 하니 많은 분들께서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 올림]

모든 신문에 다음과 같은 공지가 올라온 다음 날, 세계 최초로 운행하는 시내버스는 전 차량이 초만원으로 몸살을 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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