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국제 철도건설주식회사 (3) (231/341)

국제 철도건설주식회사 (3)

몇 주 전.

“오빠 미쳤어?”

폴린은 정신 나간 둘째 오빠, 나폴레옹을 향해 그렇게 쏘아붙였다.

“지금 나보고, 그··· 기욤 오빠를 꼬시라는 거야?”

“꼬시다니! 니는 가시내가 말을 뭐 그렇게 하나? 걔도 마침 임자가 없고, 너도 슬슬 혼기가 찼으니까···.”

음. 역시 용한 정신병원을 알아봐야겠다. 마치 대단한 아이디어를 낸 것 마냥 팔을 허리에 가져다 대고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미친 게 아니면 대체 뭐가 미친 거란 말인가.

“하아. 오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기욤 오빠 네랑 우리가 게임이 돼? 하늘을 날아다니는 툴롱 가문과 이제야 거지꼴을 면한 보나파르트 가문이라니? 누가 들으면 미쳤냐고 해!”

“참나. 넌 걔를 잘 몰라서 그런다. 학창 시절에 만든 모임 이름부터가 평등클럽이었는데 가문이니 뭐니 그런 거 신경이라도 쓸 애로 보이냐?”

그리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앉은 흔들의자를 태연하게 앞뒤로 흔들면서 덧붙였다.

“너 앞으로 살면서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후회라니?”

“뭐긴 뭐야. 나중에 ‘아! 그때 차이더라도 한 번 고백이라도 해볼 걸!’하면서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

솔직한 얘기로, 조금 후회 될 것 같긴 하다. 아니, 좀 많이 후회 될지도?

“참고로 니가 거절하면 마리, 카롤린 두 사람한테 어쩔 수 없이 기회를 넘겨야 한다. 그 둘이 얼마나 극성인지는 잘 알지?”

“···알지.”

“난 내 여동생도 그렇고, 친구 놈도 그렇고 후회랑 피폐랑 집착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꼴은 보기 싫다. 깔끔하게 차이거나 헤어지는 게 더 낫지. 암, 그렇고말고.”

“아니, 대체 왜 자꾸 내가 차이는 게 전제인데?! 나도 파티장에 나가기만 하면 이름 물어보는 신사들이 마차로 한 가득이거든?”

“넌 한 대지만 기욤 걔는 마차로 10대일걸.”

이게 오빠인지 웬수인지.

폴린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뭐? 이어주겠다는 거야, 아니면 언감생심이니 집구석에 박혀있으라는 거야?”

“당연히 후자, 아니 전자지. 잠깐 그, 그거 접시 내려놔라 이 가시내야.”

달칵.

폴린이 손에 들었던 접시를 내려놓자, 나폴레옹은 큼큼 헛기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나폴레옹이 누군가. 바로 수많은 문학을 섭렵하고 약혼녀로는 세계 최고의 작가를 둔 사람 아니냐.”

“그래서 뭐.”

“기욤 걔는 프랑스 사람인데, 프랑스 사람답지 않게 인성이 웬만한 중세 수도사 뺨쳐서, 네가 가련한 척, 청순한 척 다가가면 쉽사리 거절 못할 거다.

오! 로미오! 지금 이 줄리엣을 버리려고 하시나요? 이 줄리엣은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오빠는 연기 절대 하면 안 되겠다.”

폴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으나, 나폴레옹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 했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걔는 무슨 성경에 나오는 것 사람처럼 행동하니 무조건 널 밀어낼 거란 말이지.”

아는 지인이 중매 서서 만났다가 깨지면 서로 서먹서먹해지는 일이 어디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인가.

“그러니까 기욤 그 녀석이 맘 딱 잡고 널 밀어내기 전에 그 놈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스윽.

나폴레옹은 그렇게 말하며 호주머니 속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폴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오빠?”

“어두컴컴하고, 분위기 좋은, 남자랑 여자 사이에 불이 붙기 딱 좋은 곳.”

폴린은 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나폴레옹의 선물을 챙겼다. 생각해보니 남한테 순순히 줄 바에는 한 번 찔러나 봐야 하지 않겠나?

***

그래 연애 좋지. 나도 좋아해.

눈물 나는 남고 코스 타다가 수능 치고 처음 대학교 갔을 때 연애 한 번 해보겠답시고 MT니 소개팅이니 줄기차게 나갔단 말이야.

게다가 이제 내 나이가 29살이다. 저 멀리 동방의 으르신들께서 오랜 시간 동안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마다 머릿속에 새겨놓은 저으언통에 의하면 남자는 21살에 군대 찍고 26살에 대학교 나와서 27살까지는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업한 뒤, 30살에는 장가를 가야한다고 하지 않던가.

거 지금 생각하니까 조건 존나게 힘드네. 디아블로에서 룬이랑 템 먹으려고 뺑뺑이 도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괜히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대한민국 5천만 인구 중에 저거 성공하는 사람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볼 만 하겠네.

아무튼, 각설하고. 연애 좋다 이거야. 근데 왜, 왜 하필이면 얘냐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갓 스물을 지나 20대 초 특유의 싱그러움을 내뿜는 아리따운 여성이 손을 쭈뼛쭈뼛거리고 있었다.

예쁘다. 특히 저 오똑한 코와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 한 눈이··· 아니, 잠깐만. 정신줄 놓지 말자.

쟤가 나랑 몇 살 차이더라?

아, 생각하니까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존나게 아프다.

혹시 내가 어제 먹은 게 보르도 산 포도주가 아니라 캪틴큐였나? 아스피린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진짜.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71년생이고 쟤가 80년생이니까 9살 차이다. 9살.

···와. 시발. 9살 차이? 12살 띠동갑만큼 도둑놈새끼는 아니어도 이정도면 경범죄로 잡혀 들어갈 거 같은데?

내가 이래 뵈도 학교 다니면서 반성문 두 장 밖에 안 써본 모범생인데 이 나이 먹고 판사님 앞에서 파리마냥 손을 싹싹 빌면서 반성문을 쓰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 친구 여동생? 사귀다가 깨지면, 저 양반 얼굴은 어떻게 보라고.

안 그래도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하면 뺨 세대라고 했는데 가족 중매라니. 자칫 잘못하면 뺨이 아니라 결투장이 세 장 날아오지 않겠나.

···.

···아닌가? 국왕이 와이프 말고 따로 첩을 안 둔다고 혀를 끌끌 차며 시위하는 쿨한 프랑스에서는 괜찮나? 그런 건가? 그릉가?

내 대뇌 피질 속에 들어있는 23세 코레안과 29세 불란서인이 링 위에 올라 서로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슉 슈슉.

“···혹시 오빠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음?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젠장, 말이 자꾸 목에 걸린다. 그도 그럴 게 내 기억 속 폴린 쟤는 조그마한 꼬맹이였잖나. 그 거리감 때문에 폴린이라는 이름이 자꾸 목에 걸려 나오질 않는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지 말씀해주세요, 오빠.”

오빠라니. 오빠. 으헤헤.

아니 시발! 정신 차려!

그거 아십니까?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예쁜 애인과 오순도순 살아가며 귀여운 새끼도 낳고 좋은 집에서 좋은 거 먹고 사는 꿈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새끼 강아지처럼 날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아아. 그러면 나 가슴이 쿵쾅쿵쾅 녹아버렷.

나도 아직 혈기왕성한 20대다.

자다가 일어나면 이불이 오줌 말고 다른 걸로 축축할 때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있는 곳이 한 밤중의 논산훈련소가 아니라는 거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건 덤이고.

그렇게 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삼라만상 인간 세상에 대한 고뇌에 빠져 있자, 나폴레옹 형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거, 사내 새끼가 뭐 그리 생각이 많나? 니 좋다는데 그냥 만나면 되는 거지.”

이, 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게다가 병신 같은 18세기 아니랄까봐 땀내 나는 마초 마인드 보소.

저 쫌생이 난쟁이의 얼굴에 시적인 중지를 먹여주고자 팔을 휘적거리려는 순간, 내 팔에 뭔가, 뭔가 뭉클한 게 툭하고 부딪혔다.

어디보자. 애국가가, 어떻게 시작하더라?

아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까지 부르자, 누군가 응접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잠시 나눌 말이. 어이쿠! 죄송합니다. 이 마이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군요.”

“아니요, 아니요. 회삿일인데 어쩔 수 없죠! 어서, 어서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쇼!”

그리고 폴린 너는, 제발 내 팔 좀 놔주면 안 될까. 나 심장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

***

“스페인에서 우리 철도건설회사에 수주를 맡기고 싶답니다.”

“스페인이요? 음··· 누가요? 스페인 동인도 회사? 아, 거긴 망했나?”

“재상인 마누엘 고도이라 하덥니다.”

“그 인간이요? 그 인간 전쟁 일으킨 새끼 아닙니까? 갑자기 왜 우리한테 건설 수주를 맡기겠답니까?”

“상세한 건 모르겠으나, 스페인 내부에서 현 국왕인 카를로스 4세와 재상 고도이 두 사람에 대해 불평불만이 커지고 있다 합니다.”

“흐으음.”

기욤은 짧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턱을 쓸어내리더니 대강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견적 대충 보이네요. 이거 지 치적 한 번 쌓아보겠다고 하는 거구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가 유럽 각지에 신문물이라고 광고를 어마어마하게 때렸으니, 그 반사효과를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찌 할까요? 수주를 승낙할까요?”

“승낙해야죠. 돈을 안 준다는 것도 아니고, 제 값 주고서 우리 고객님께서 이미지 좀 가져다 쓰신다는데 막을 이유가 있나요? 오히려 다른 나라에 돈 안 쓰고도 광고를 때려주는 꼴이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게다가 그 놈들 어차피 기술력도 없어서 우리 제품 베끼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더 잘 됐네요. 이미 쓰던 거 넘겨줍시다. 그거 부서지면 한 번 더 AS로 빨아먹게.”

“흐흐, 물론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사장님.”

독일 억양이 묻어나오는 프랑스인은 이어서 말했다.

“네이선 지사장이 말하길 베어링 은행에서 국제철도건설회사 주식을 사들이고 있답니다.”

“이런 개호로 썅놈의 새ㄲ···, 큼큼. 이야 역시 해적의 나라답네요 그죠?”

“지금이라도 주식 방어를 할까요?”

“됐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과반 넘잖아요? 살대로 사라고 하십쇼. 지들이 그런다고 이사회를 먹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러면 다음은···.”

일반인인 폴린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사무적인 이야기가 순식간에 응접실을 채우길 한참.

보통 사람은 이런 경우 지루함을 느낄 법도 했지만 폴린의 생각은 달랐다.

저런 프로페셔널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저 멋있었다.

콩깍지가 쓰이면 사람이 두 배는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어릴 적.

그러니까 첫째 오빠고 둘째 오빠고 다 고향을 떠나 아작시오의 집이 휑해졌을 때.

어느 날 둘째 오빠가 졸업했다는 소식과 함께 친구를 데려온 적 있었다.

당시 예닐곱 살에 불과했던 폴린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주며, 밤 새워 꿈만 같은 동화 속 이야기를 해주던 오빠 친구 말이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호감으로 시작했지만 어디 청춘남녀의 마음이 그리 잔잔했던가.

아작시오에서 출발한 호감은 툴롱, 파리를 거치며 15 년 동안 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작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콩깍지가 쓰인 채 15년이 지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모르게 기욤을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던 폴린의 눈빛을 눈치 챘을까, 독일계 프랑스인은 두 남녀의 얼굴을 서로 번갈아 쳐다보다가 큼큼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대강 일이 마무리 됐군요. 그러면 이 마이어는 잡무 때문에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예? 아니! 평소에는 일 많다고 구시렁 대더만! 갑자기 무슨 일이 다 끝나요!”

“크흠흠, 보나파르트 장군님. 이 늙은이를 잠시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이어라는 중년 남성과 나폴레옹은 서로 힘을 합쳐 두 남녀를 건물 밖으로 쫓아내다 시피 내몰았다.

성인 남성 둘이 밀고, 성인 여성 하나가 잡아당기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결국 기욤은 대낮에 회사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페시옹 비서와 함께 이 마이어가 오늘 다 알아서 처리할테니, 사장님은 밖에서 편히, 아주 편히 쉬다 오십시오.”

쾅!

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히고, 걸쇠까지 걸리는 소리가 나자, 폴린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상대방의 팔을 자기 쪽으로 조금 더 끌어안았다.

“억, 윽, 어엑.”

그러자 상대방은 마치 고장난 기계마냥 단말마를 늘어놓았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는 위인이라기엔 너무 순진한 반응 아닌가.

폴린은 조그맣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 이렇게 거리에 서 있을 건 아니죠?”

“어, 어?”

“물론 저야 이렇게 있어도 좋지만.”

기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면의 무슈 유교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폴린은 주머니에서 티켓을 두 장 꺼내 내밀었다.

“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

극장 특유의 선선한 공기를 몇 숨 들이마시자 점차 정신이 또렷해진다.

역시 사람은 숨을 쉬어야해. 아까는 숨이 잘 안 쉬어지더라고. 흡하, 흡하.

내 옆에 있는 얘는 자꾸만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려고 하는 지금. 내 머리 속에서는 아직도 친구 동생을 만나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해 마라톤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있나. 우정도 잃고 사랑도 잃을 바에는 사랑만 잃는 게 더 낫···.

“부담되시나요?”

“···부담?”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게 묻는 폴린의 말에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친구의 여동생이라 어려운 거지요?”

“···아니다고는 말 못하겠구나.”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러자 가녀린 손 너머로 폴린의 맥박이 전해져왔다.

“오빠.”

“그래.”

“저도, 오빠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다가가는 거예요.”

그냥 절 누구의 동생이 아니라, 폴린으로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아.

몰라.

모르겠다. 난 할 만큼 했어. 이제 될 대로 되라지 씨.

나는 그저, 잡은 폴린의 손을 그냥 그대로 잡고 있을 뿐이었다.

쿵쿵 뛰는 내 맥박도 폴린의 손 너머로 전해져 오는 그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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