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4)
[기욤 드 툴롱, 이 땅에 묻힌 미국인과 프랑스인의 묘비야말로 두 나라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다! 함께 피 흘린 미·프 동맹은 영원할 것. 일부 편협한 작자들의 중상모략은 그저 개소리일 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긴, 요 프랑스인 말 한 번 시원하게 하는구만.”
“암. 그래야지. 사실 난 아직도 잠이 들면 요크타운 전투 때 일이 생각난단 말이야. 빌어먹을 라이어(lier, 거짓말쟁이 영국인)새끼들 같으니.”
“어째 국회의사당에 의원이랍시고 앉아 있는 인간들보다 속을 더 잘 긁어주는 것 같군.”
“연방당 놈들? 그 놈들은 라이어 새끼들한테 쫄아있는 쫄보놈들 아닌가.”
아직까지도 독립 전쟁의 상흔이 기억 곳곳에 남은 이들은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상남자 다운 언행을 보여주는 젊은 프랑스인에게 열광했다.
[기욤 드 툴롱 전 대통령, 미국의 공화주의는 뭇 온 유럽 국가들이 보고 배워야 할 좋은 정치체제. 미국몽, 프랑스가 함께 하겠다!]
“하! 이거 봤나?! 콧대 높은 유럽인, 그것도 프랑스인이 뭐라고 했는지 봤느냐고!”
“그래, 벌써 자네 제외하고 일곱 명이나 그런 소리를 한 덕에 이미 질리도록 봤네.”
“하하! 이제 우리 미합중국도 저 유럽 국가들의 문화에 뒤지지 않는다 이 말이야!”
“···못 말리겠군.”
먹물 좀 먹은 식자층, 개중에서도 유럽을 선망하던 지식인들은 내 사심 그득그득한 립 서비스가 담긴 신문을 손에 말아 쥐고 방방 뛰었다.
비린내가 몸에 밴 항구 노동자부터 잉크냄새가 몸에 밴 사무실 변호사까지,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을 비롯한 온 사방천지에선 프랑스인에 대한 얘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프랑스 같은 강대국에서 우리 미국 같은 약소국으로 대통령이 찾아오다니, 참 별일이야.”
“그러니까.”
“···프랑스? 대관절 그게 뭔 소리요?”
“아니, 형씨는 귀를 닫고 사쇼? 기욤 몰라? 기욤?”
“···모르는데.”
“에잉 쯧. 얘기할 맛이 뚝 떨어지는구만. 모르면 저리 가쇼.”
“허? 거, 더러워서 증말. 내가 알아오면 되는 거 아뇨!”
“호외요! 호외! 윌리엄···, 아니. 기욤 전 대통령이 오늘 워싱턴 대통령과 만찬을 즐겼답니다!”
“뭐? 나, 나 한 부 주시오!”
“야! 새치기 하지 마! 새치기 하지 말라고!”
거기에 일터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기 싫은 사람들까지 더해지자, 이제는 광풍이 되었다.
기욤이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다는 것만으로 가판대에 갓 배치한 따끈따끈한 신문들이 매진되고, 신문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24시간 철야에 2교대를 돌리며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 위에 잉크를 칠하기 바빴다.
“키야! 찍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린다네! 우리 피츠버그 가제트의 1등 공신은 바로 귀인이신 기욤이시니! 오 모두 먼 길을 오신 프랑스인을 찬미하라~.”
“이젠··· 더 이상··· 못 돌려···.”
- 털썩.
“야! 야 임마! 너 왜 그래?!”
“사장님, ···저 팔이 더 이상 안 움직여요.”
“안돼! 일어나! 네가 누우면 내가 다 해야 하잖아! 자,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시발... 악덕사장 같으니.”
미국 신문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인쇄기는 철저하게 인력으로 찍는 인쇄기였다. 그러니까··· 도장을 찍듯 사람이 힘으로 한 장 한 장 눌러서 찍는 방식말이다.
당연하게도 신바람이 나서 인쇄기를 찍는 것도 하루 이틀일이지, 거의 주 단위로 시간이 지나자 온 몸이 탈진되어 쓰러지는 직원들이 수두룩했다.
“사장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윌슨 대리도 오늘 아침에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이봐, 다른 경쟁사 놈들이 떼돈을 벌어 가는 건 상관없어! 온 세상이 그 프랑스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길 고대하는데, 지금 우리가 멈추면 점유율을 뺏긴단 말일세! 그러면 우린 앞으로 끝장이야 끝장! 난 파산이고 자네는 실업자가 된단 말이야!”
그리고 그 틈을 타, 중절모를 쓰고 싱글벙글 웃으며 신문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큼큼, 많이들 바쁘신가요?”
“뭐야, 댁은 누구시오?”
“반갑습니다. 이삭의 민족에서 나온 판매원입니다.”
“···그 프랑스 기업? 거기가 왜?”
“사장님, 혹시 윤전기라고 들어보셨나요?”
“윤전기가 뭐요?”
“아! 윤전기 모르시는구나! 이거만 있으면 인쇄기가 필요 없답니다?”
“흐음, 어디 한 번 들어나보지.”
처음에는 뾰루퉁하게 팔짱을 끼고 판매원들이 설명해주는 카탈로그를 듣기만 하던 신문사 사장들이었지만.
“···뭐라고? 다시 한 번만 말해주겠소?”
“한 대가 시간 당 1500부를 찍어낼 수 있답니다. 대당 4천 리브르, 달러로는 800달러입니다.”
“천, 천오백부? 그게 사실이요?”
“물론입니다. 이미 저희 회사 산하 잡지사인 <포브스>에서 애용하고 있죠.”
“당장 계약서 주시오! 5대 주문하리다!”
“잠깐. 한 가지 약속해주실 게 있습니다.”
“뭔데 그러시오?”
“앞으로 유지보수 및 관리는 모두 저희 회사를 통해서 하셔야 한다는 조항에 동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으니까 빨리 계약서나 주시오!”
곧 눈을 희번뜩거리며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휘갈기니 이게 바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몇 대 팔았다고요?”
“예! 사장님! 지금까지 100대 가량 주문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크헤헤헤. 나쁘지 않네. 계속 수고해주십쇼.”
“옙!”
***
21세기의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상식으로 여기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말 그대로 민民. 즉, 국민과 시민들이 나라를 이끄는 것이다. 옛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처럼 시민들 모두가 손을 들고 일어나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러나 시민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되자 더 이상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선생님 이번엔 제가 발표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일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때문에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기로 하고 그들을 의회라는 곳에 보내 자신들의 뜻을 대신 관철시키기로 했다.
시민들이 뽑은 대표자, 그러니까 의원들은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을 위해 국정을 운영해나갔고 비록 가끔씩은 부패하고 더러운 짓을 할망정 최소한 여느 독재자들이나 왕 마냥 사람 목숨을 파리로 알지는 않았다.
이상이 21세기의 현대인의 관점으로 바라본 민주주의다.
그렇다면 이 18세기 전근대인의 관점으로 바라본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무어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2013년에 처음 세상에 태어난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비이이트코오오인? 그거 그냥 실체도 없는 말장난이잖아? 그게 실용성이나 있겠어? 보나마나 피라미드 사기처럼 쪽 빨아 먹고 끝날 걸.
- 미이이이인주주의? 그건 까마득한 옛날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이잖아? 그게 요즘 같은 현대에 실용성이나 있겠어? 책만 읽고 일 하나 안 해본 변호사 놈들이 현실을 어떻게 안담. 결국엔 국정이고 뭐고 죄다 말아먹고 끝날 걸.
하지만 개당 30원 하던 비트코인이 8천만원을 찍었듯, 먼 시간 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민주주의는 절대왕정이고 뭐고 다 대가리를 찍어버린 후 21세기의 승리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나는 대한민국의 지옥핵불맛 찌라시를 쏟아내는 언론의 후라이팬 위에서 23년 간 뒹굴게 되었고, 삼겹살과 소주를 까며 정치인을 씹어대는 한국인 no.1042934로 착착 테크트리를 타다가 죽었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훌륭하게 한국인 테크트리를 올린 나는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안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시민의 의지이며, 어느 누가 구국의 결단을 통해 나라를 하루아침에 바꾸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 의지가 바뀌는 순간 내쳐진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자기 뜻대로 시민들의 의지를 움직이려고 정치인들이 그 부단한 노력을 하겠는가? 뭐만 하면 연예인 찌라시가 터지고 서로 서로 ‘니가 개새끼지!’하고 물고 뜯고 싸우는 게 21세기 민주사회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18세기 인간들은 모른다. 격식 있는 테이블에서 기껏해야 시구 인용하면서 사람 신경 긁는 귀족적인 놈들이, 인신공격과 처자식공격으로 이루어진 온갖 자극적인 조미료 맛을 어찌 알겠나.
그러니 버지니아 국립묘지에 위치한 독립전쟁 전사자 위령비 추모를 시작으로 시작된 내 일정이 매일 아침마다 필라델피아 골목골목마다 있는 잡화점 신문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거의 몇 주 간 선거철 정치인들 마냥 여기저기 ‘사는 건 어떠세요?’, ‘아이고. 힘드셨겠어요.’, ‘이 집 스튜가 참 일품이란 말이야. 국물도 뻑뻑하고 고기도 많이 들었어.’라고 얼굴 비추고 다녔으니 다들 내 이름과 성향 정도야 기억하지 않을까.
미국인 여러분 이 기욤은 여러분과 친구가 되고 싶은 서민적인 사람이랍니다.
“각하,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주네 대사님은 기자들과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후우... 알겠습니다.”
거 참. 대사나 되시는 분이 그렇게 한숨을 쉬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숨 쉬면 복 달아나요. 우리 할머니가 그랬단 말이야.
나는 주네 대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사님.”
“···하하, 제가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할망정 저보다 스무 살은 어린 각하께 위로나 받다니. 이거 면목이 없군요.”
주네 대사는 쓰게 웃더니 내게 말했다.
“건투를 빕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준 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참 작은 건물이다. 자재도 대리석 같이 비싼 게 아니라 그냥 일반인들이 쓰는 붉은색 벽돌을 쓰고, 층수도 2층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
그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나는 어깨를 쭉 피고 걸어갔다.
“반갑습니다. 의원 여러분.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미 국회의사당 건물은 참으로 작았다.
***
일주일 전, 연방당 청사.
“후우. 워싱턴은 뭐라고 하던가.”
“젠틀하고, 사람들을 아낄 줄 아는 따듯한 사람이랍디다.”
“뭐? 워싱턴, 이 미친 늙은이 같으니! 치매 끼가 도졌나!”
존 애덤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수는 하나요. 그 프랑스인을 말로 죽여 놓는 수밖에.”
“애덤스! 그래도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그깟 예우 따위로 이 미약한 합중국을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소.”
이제 막 태어난 국가다.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저 거대한 유럽의 군홧발에 짓이겨지리라.
그것만은 막아야한다. 옛 주인 영국의 신발을 잠시 핥더라도 이 나라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
“잘 오셨습니다, 각하! 우리 민주공화당은 대통령 각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제퍼슨에게 답례삼아 손을 흔들며 말했다.
분명 나도 꽤 많이 자랐는데 아직도 키 차이가 엄청나다. 몇 센티지? 한 190 되려나?
이쪽이 민주공화당이라면, 키가 작은 이 분이 바로 연방당 당수겠구만.
“우리 미합중국 연방당은, 귀하의 방문에 환영을 표하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애덤스 부통령.”
“상호 간에 인사를 나눌 만큼 여유가 없으니, 바로 진행하는 게 어떻소?”
“원하시는 대로.”
“좋소. 아무래도 귀하는 우리 미합중국이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이오.”
“아하. 그러십니까?”
나는 애덤스의 손을 맞잡은 오른손 대신, 왼손을 눈높이까지 올린 뒤 천천히 중지를 올려주었다.
참으로 시적인 중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