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이웃집 (5) (212/341)

이웃집 (5)

크헤헤헤. 이겼다.

우리 애덤스 씨는 적잖이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입에서 까득-하고 뭔가 딱딱한 게 갈리는 소리를 내시며 눈가를 파르르-하고 떨었다.

“···귀하의 의견, 아주 자아알 알겠소.”

“통했다니 다행이군요.”

삼강오륜과 목민심서, 그리고 명심보감을 통달한 예의바른 청년으로서, 나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어르신에게 환하게 웃으며 왼손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기선제압 한답시고 아들 뻘 상대로 추하게 나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으-르신 아닌가. 나보다 북망산 빨리 올라갈 사람한테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엣-헴.

애덤스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먼저 본회의실로 뚜벅뚜벅 구두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연방당 의원들은 하나같이 날 무슨 귀신 쳐다보듯 쳐다보며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어디 입을 놀려 놀리긴.

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이 기욤은 상남자다. 누가 날 좆같이 보면, 그 좆같아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상남자란 말이다. 얻다 대고 이 기욤에게 불질이야. 어디 맞설 테면 맞서 보자. 아예 뼈도 추리지 못하게 진짜 아가리 불질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 주겠다.

“각하, 저렇게 신경을 긁으셔도 되겠습니까?”

“정 마음에 걸리시면 지원사격이나 팍팍 땡겨주십쇼.”

“하, 하하하!”

제퍼슨은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듯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웃었다.

“이것 참. 과거의 제가 후회스럽군요. 주프랑스 미국 대사시절에 각하를 꼭 스카우트했어야 하는 건데!

어떻게, 지금이라도 그때 말을 번복하고 미국으로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흐음. 제퍼슨 장관님이 절 황제로 추대해주신다면 고려해보겠습니다.”

“그거 참 안타깝군요. 우리 미합중국은 공화정이라서요.”

“왜요. 미합제국 승상, 토마스 제퍼슨 꽤 멋있지 않습니까?”

“흠, 제가 보기엔 장관이라는 어감이 더 나아보이는 군요.”

에잉 아쉽네. 신세계의 신이라면 기꺼이 맡아줄 용의가 있었는데 말이야.

“이제 들어가시죠. 안 그래도 화를 돋워놨는데, 여기서 더 노닥거리면 결투 신청을 받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참나무로 만든 본회의장 문을 열고,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

본회의장의 구조는 자그마한 홀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둥글게 의자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콜로세움 관객석의 높이를 검투사의 눈높이와 똑같이 맞춘다고 치면 되려나.

그렇다. 콜로세움이다. 이곳은 콜로세움이었다. 로마시대처럼 검과 투구를 쓴 검투사가 나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게 아니라, 정장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펜과 혀를 무기 삼아 싸우는 콜로세움.

그리고 오늘. 나는 관중이 아니라 검투사로 라운드에 올라가게 되었다.

홍 코너엔 검투사 나, 청 코너에 이를 북북 가는 미국인 의원들. 거 심장 쫄깃쫄깃해지네.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이 홀에 서면 심장병 걸릴 위험은 없겠어.

아쉽다. 이 시대에 TV나 라디오가 있었다면 이들의 아가리질을 녹음해다가 온 세상에 팔아먹고 짭짤한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 이 세상에 정치인 씹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거든.

“자, 이제 시작해봅시다.”

- 드르륵.

날 흘겨보는 부통령 애덤스가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한 의원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검지손가락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쳤다.

“이번 외교 마찰의 원인은 간단합니다! 프랑스 외교관의 도 넘은 부패, 그리고 비상식적인 행동! 더도 덜도 말고 그 뿐이지요!”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아닙니까? 한 나라의 외교관이란 작자가 공공연하게 뇌물을 운운하고 타국을 모욕했으니 응당 비난할 만하지 않습니까?!”

딱 가감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 말 속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사실만을 나열한다. 물론 그런 결과를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정공법이다. 말 잘못 꺼내서 매장 당하기 싫으시다 이거지.

여기서 나도 정공법으로 나서면 꼴이 이상해진다. 어찌되었든 원인이 뭐가 되었든 간에 탈레랑이 그런 짓을 한 건 맞으니까.

그러면 이제 K-정공법이 나와야지.

- 또각, 또각.

나는 어깨를 활짝 피고 뒷짐을 진 채, 홀에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내는 구두 굽 소리가 선명하게 이 콜로세움을 채우길 잠시.

“뭐, 탈레랑 차관이 과도한 요구를 한 것은 사실이지요.”

“지금 귀국의 잘못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참을성이 없으시군요. 사람이 말을 하면 끊지 말고 들으시죠.

···고맙습니다. 여하튼 조금 전에 제가 말했듯, 탈레랑 차관의 요구는 분명 비상식적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뒷짐을 풀고 손가락으로 방금 말했던 의원을 가리키며 뒷 붙였다.

“과연 여러분이라면 그러지 않을 수 있으십니까?”

“이보세요!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의원님에게는 혹시 형제나 자매가 있으십니까?”

“···두 살 어린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만. 그건 당최 왜 물으십니까?”

“나이브하게 설명해드리지요. 자, 이웃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의원님의 동생 분께서는 이웃집을 구하고자 사재를 털어 손수 총을 산 뒤, 강도와 한바탕 난리를 치룬 끝에 강도를 퇴치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생 분께서는 운이 나빠 강도가 쏜 납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이웃사람은 참으로 고맙다며,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거라면서 동생의 장례식에서 의원님과 함께 눈물을 흘렸지 뭡니까.

참 슬펐지만, 이미 끝난 일. 살 사람은 살아야하기에 의원님은 눈물을 머금고 동생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쯤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동생의 장례식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이웃사람이 갑자기 예의 그 강도와 팔짱을 끼고서 길을 걷고 있지 뭡니까?

의원님은 너무나도 속이 상하고 어이가 없는 나머지, 이웃사람에게 찾아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이웃사람이 말하길.”

나는 잠시 말을 끊고서 의원들을 쓱 눈으로 훑었다.

“왜 주제넘게 남의 집일에 상관 쓰느냐, 라더군요.”

조용하다. 어느 누구 하나 허투루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한다.

자. 어떠나, 이 새끼들아. 250년 빠른 ‘니 가족이라면?’의 등장이다. 21세기 판 아가리질 맛이 화끈하지?

한참동안 조용해졌던 홀은, 예의 그 의원이 총대를 메고 나서며 적막이 깨지고 말았다.

“······너무 비약이 심하신 것 아닌지요.”

“비약? 아! 제가 멍청한지라 어디가 어떻게 비약되었는지 잘 모르겠군요. 의원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일단, 가족이라는 것부터...”

“글쎄요! 전 그게 왜 비약인지 잘 모르겠군요. 이 아메리카 땅에 묻힌 프랑스인들은 누구의 남편이나 아들, 형제가 아니었나요?”

“······맞지, 요.”

“그러면 가족이 맞네요? 그렇죠?”

“······.”

반박하면 가족의 죽음을 외면하는 인성쓰레기, 동조하면 너님은 나한테 설득당한 거시구욘.

어디 한 번 때려보든가. 대신 내일 신문에 대문짝하게 날 각오 하시라고.

***

“우리 프랑스는 기꺼이 이 대지에 있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지키고자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내정간섭이라는 불명예를 씌우다니! 우리가 언제 여러분 보고 정책을 바꾸라고 했습니까? 단순한 외교적 항의를 내정간섭이라고 한다면, 영국에게 사절을 파견한 연방당 여러분은 외교적으로 내정을 영국에 맡기러 가시는 겁니까?”

크으. 타격감이 일품이네. 두들길 때마다 얼굴이 썩어가는 게 보이니까 아주 찰지게 더 패고 싶다.

마 개쉐리들아. 내가 마 느그 대통령이랑 참전용사 묘지도 가서 참배도 하고, 승마도 하고, 시민들하고 밥도 먹고 다 했다 이 말이야.

“부를 때, 함께 싸울 때는 믿음직스러운 우리 동맹이더니. 죽으니까 귀찮은 느그 동맹입니까? 아주 씨발 저잣거리 집시 점쟁이들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옳소! 옳소!”

민주공화당의 제임스 먼로라고 했던가? 아주 잘 호응해주시는 거 보니 기부니가 좋네용. 오홍홍.

결국 내 칼춤에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연방당 측에서는 가장 으뜸패를 내보였다.

“좋소. 기욤 전 대통령.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해봐도 되겠소?”

“애덤스 부통령, 당신은 지금 상원의장으로 여기 앉아있는 겁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세요!”

“상원의장이기도 하지만 연방당 당수이기도 하지. 나는 지금 연방당 당수로서 묻고 있소.”

민주공화당의 군소리를 사뿐하게 즈려밟은 애덤스는 내게 말했다.

“어떻게, 해도 되겠소?”

“예, 해보십시오.”

“고맙소.”

애덤스는 날 향해 몸을 기울여 입을 열었다.

“귀하는 우리 미국에게 무얼 원하고 있소? 우리 미국이 어떤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냐는 거요. 사절로 간 존 제이를 당장 소환해드리면 되겠소? 아니면 동맹에 대한 지지선언을 해주면 되겠소? 아니면 지금 영국에 선전포고라도 하면 되겠소? 어디 한 번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흐음 말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면서 말 곳곳에는 함정을 오지게 파놓으신 거 같은데.

내가 저기에 섣불리 뭐라 말하면 그건 꼼짝없이 내정간섭이다. 변명도 안 통하지. 대놓고 너네 미국이 이랬으면 좋겠어-하고 말하는 거니.

시적인 중지 한 번 더 먹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정말 권총 들고 결투가 일어난다.

그러지 않으려면 이 가시밭길을 피해 말로 두들겨 줘야 하는데. 우리 애덤스 씨가 싫어할만한 말을 해주려면 뭐라 말해야 할까.

프랑스 입장에서는 꼽지만 미국 입장에서 애덤스는 애국자다. 신생국이 섣불리 유럽의 화마에 밀려들어가 식물인간 꼴이 되는 건 절대 볼 수 없다는 듯, 이 대서양 건너편 아메리카에서 어느 정도 체급이 될 때까지 눈과 귀를 몽땅 틀어막고 절대 존버, 또 존버하겠다는 그 마음가짐이 아주 눈에 선하다.

그도 그럴게, 인구 1천만이 넘어가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실력을 투사하는 순간 미국은 바스라져버릴 테니까.

나는 다시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흐음. 부통령님. 죄송하지만 뭘 그렇게 두려워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모르는 척이오. 다 알만 한 사람이.”

헉, 아니 어뜨케 알았지.

“북으로는 영국령 캐나다가, 동쪽 대서양에는 영국 왕립 해군이 가득하지. 서쪽으로는 스페인령 멕시코 부왕령이 있소. 동맹이라는 프랑스는 영국 본토보다도 이 미국에서 더 멀고. 답이 되지 않소?”

“영국령 캐나다는 죄 동토 뿐이라 사는 사람도 별로 없고, 영국 왕립 해군은 전 세계 바다에 다 나뉘어져있으니 미국을 친답시고 총동원령을 내린다면 전 세계 바다에서 지배권이 붕괴하겠군요. 대서양을 건너려면 적어도 두 달 내지 세 달이 필요하니 그 시간 동안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가만히 있지 않겠는 걸요?”

“그 스페인이 우리 서쪽에 있다는 건 모르시오?”

“루이지애나와 아칸소라는 프랑스 땅이 천연 장벽이 되어주는데 모르시나요? 참고로 그곳에는 우리 프랑스를 육군 강국 프로이센과 스페인으로부터 두 번이나 지켜낸 명장 뒤무리에 장군이 부임해 있습니다.”

“···좋소.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소.”

애덤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프랑스는 필라델피아를 위해 파리를 버릴 수 있소?”

“기꺼이.”

거 참. 미국몽 함께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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