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2)
21세기의 놀 거리, 즐길 거리라 하면 뭐가 있을까.
아마 양 손을 다 써도 세기가 힘들 거다.
그 만큼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고, 또 엔터테인먼트가 가장 발달된 시대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제를 바꿔서 18세기 말, 프랑스에 즐길 거리라 하면 뭐가 있을까.
체스, 잡지, 승마, 사격, 음악 감상, 카드놀이, 단두대로 대가리 커팅?
와 이건 두 손 안으로도 셀 수 있겠는걸?
게다가 승마, 사격은 아주 고오오귀하신 분들 전용 스포츠다.
말? 아유 먹고 살기도 힘든 일반인들한테 말이 어디 있어?
사격? 열 받는다고 이웃인 필리프 아저씨네로 처 들어가서 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화약이 그리 싸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18세기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놀이는 기껏해야 체스.
그리고 조악한 인쇄기술로 만든 잡지뿐이다.
그것도 체스는 룰조차 아직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도시마다 룰이 상이한데다가 둘 줄 모르는 사람이 태반.
아 그러면 잡지를 볼까?
와! 프랑스에서 팔리고 있는 잡지만 130여개잖아? 이것 참! 재미있게 읽을 거 천지겠는걸?
가장 많이 팔리던 잡지, [인민의 벗]은 정치잡지.
두 번째로 많이 팔리던 잡지, [늙은이 뒤셴]도 정치잡지.
세 번째로 많이 팔리던 잡지, [자유 프랑스]도 정치잡지.
아니! 130여개 잡지 중에 정치잡지 아닌 게 없잖아?
그래, 뭐. 정치 재미있는 거 안다.
나도 막 TV로 정치인들 서로 달걀 던지고 국회에서 지들끼리 헛소리하는 거 보면서 맥주랑 오징어 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 말이야.
근데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얘기만 보고 살아?
내가 [포브스]와 [막심]을 만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간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예로부터 인생은 하여금 희노애락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아 몰라, 고구려 수박도던 삼강행실도던 어딘가에 쓰여 있겠지 뭐. 내가 알 바인가.
그러면 남은 게 이제 음악 감상, 카드놀이. 그리고 단두대로 머리 컷팅인데...
일단 프랑스의 민속놀이, 단두대는 제쳐두자. 어우 내 머리가 깨질 것만 같네.
카드놀이는 뭐, 대부분이 도박의 수단으로 쓰이던데. 그게 놀이는 아니지.
마지막으로 남은 건, 오래전부터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불리던 음악뿐이다.
음악? 음악 좋지. 아직까지 락이나 재즈 같은 신나는 음악이 없는 게 좀 아쉽지만. 클래식도 역시 전통의 음악답게 좋더라고.
그나마 파리에 극장이 많고, 또 극장이 많은 탓에 어느 정도 가격 경쟁이 붙어 일반인들도 돈을 모아 갈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음악은 고상하지만 그래도 돈 좀 있는 일반인들도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될 수 있었다.
시장이 생겼고, 소비자가 있으니 당연히 사업가가 뛰어 들어야 하는 건 순리 아니겠나.
게다가 음악까지 손에 쥔다면, [포브스]와 [막심]으로 이미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이삭의 민족은, 사람들의 귀까지 장악하여 18세기에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소프트파워를 가지게 된다는 거다.
즉, 이제 ‘이삭의 민족’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사업에 진출하던지 간에 프랑스 전역에 달하는 미디어 영향력으로 손쉽게 홍보를 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앞으로 프랑스 안에서는 ‘이삭의 민족’이 가진 미디어 영향력을 뛰어 넘을 기업체가 탄생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게 되는 거나 다름없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뭔가 상품을 하나 내놓으면, 바로 [포브스]와 [막심] 1면에 광고도 때리고, 극장에서 공연하기 전에 잠깐 홍보도 좀 하고. 수십 만 소비자에게 홍보를 거저먹는 거지.
시장선도자라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 시장선도자 아니겠나.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삭의 민족’이 저작권을 쥔, 좋은 음악들이 필요하다.
애초에 곡이 좋아야 사람들이 듣지, 그것도 아니면 누가 듣겠어?
그리고 미래에 고객이 될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는 것도 필요하고 말이야.
시장조사 없는 사업은 망하기 마련이니까.
***
1790년 7월 초순.
프랑스 왕국, 파리.
레스토랑, 라 그랑드 타베르네 드 롱드.
“갑자기 악단을 만들겠다니, 기욤 너 또 무슨 흉흉한 흉계를 꾸미는 거냐?”
마티유 형은, 자기의 맞은편에 앉은 날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흉계는 무슨, 그리고 악단 아니거든?”
나 같이 모범시민다운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흉계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반란모의라도 하는 줄 알겠는걸.
“그럼 뭔데.”
“악단이 아니라, 연예기획사다. 이 말이야.”
“···‘연예기획사’? 그건 대체 또 어디서 만들어온 이상한 단어야? 악기 들고 다니면 악단이지 무슨.”
“어허, 참으로 우매한 중생이로고...”
“기욤이 너 지금 내 욕하겠답시고 이 비싼 레스토랑까지 데려온 거야?”
“원래는 그럴 생각 없었는데, 그것도 겸사겸사해야겠네.”
“하... 학교 다닐 때 몇 번 더 쥐어박아줄 걸 그랬어.”
“그러게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으셨어야지.”
마티유 형이 궁시렁 대면서 날 째려보는 동안, 웨이터가 우리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송아지 요리를 내려놓았다.
버터를 깔고 구워낸 송아지의 냄새가, 그 위에 올려놓은 허브를 타고선 내 코로 올라왔다.
크. 이 기막힌 냄새.
보빌리에 이 사람이 케첩은 못 만들어도, 고기는 제대로 만들어준단 말이지.
“···네가 괜히 나한테 이렇게 비싼 밥을 사주는 건 아닐 거고. 그러면 네가 말한 ‘연예기획사’인지 하는 그 구상이 잘 먹혀들어갈지 아닐지 내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겠지?”
“오?”
내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고기를 썰어 넣자, 마치 범죄자를 취조하는 베테랑 형사처럼 눈을 흘겨 뜬 마티유 형이 말했다.
아이 날카로우셔라.
“여윽시 우리 기수 차석, 프랑수아 마티유 다우십니다!”
“이야 그 기수의 수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기분이 아아아주 아니꼬운데.”
이런! 홍 코너에 자리한 마티유 선수가 눈을 또 흘겨 뜨는 걸 보니, 오늘 기분이 많이 안 좋은가보네요. 혹시 애인 테르바뉴 씨와 싸우기라도 한 걸 까요?
“그러게 라플라스 교수님 수업을 잘 좀 듣지 그랬어.”
“너 그거 나랑 같이 낙제하지 않았냐?”
“형이 낙제 안했으면 나 제쳤을 거 아냐.”
“···이런 젠장. 반박할 수가 없네. 완벽한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기욤.”
아 그러나 카운터로 승리를 거둡니다! 청 코너의 기욤!
“농담이고. 우리 중 라플라스 교수님 수업에서 낙제 안 한건 나폴레옹 그 인간 말고 없지. 라플라스 교수님이 나폴레옹 형을 대학원으로 보내버리고 싶어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
“하하, 맞아 그랬었지. 햐, 그러고 보니 졸업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되게 옛날 일 같은 걸.”
“그만큼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당연하지. 자, 건배 한 번?”
나는 저번처럼 웨이터가 가져다 준 그... 카베르네 소비뇽 맞나? 아무튼 레드 와인을, 오랜만에 추억에 젖은 마티유 형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곧 이어. 마티유 형이 든 와인 잔이, 내가 든 와인 잔과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마티유 형은 송아지 요리와 와인을 번갈아가며 입에 넣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한 얘기로.”
“엉.”
“네가 얘기해 준... 그 연예 뭐시기.”
“연예기획사.”
“그래, 아무튼 그거. 난 잘 모르겠다.”
“어느 점이?”
예비 소비자가 하는 말은 헐뜯는 말이던, 칭찬하는 말이던 항상 경청해야 올바른 경영자인 법.
나는 마티유 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냥... 개념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콧대 높은 음악가 나리들이 과연 귀족들의 후원이라는 따듯한 요람에서 나와서, 네가 말한 대로 땀 흘려 곡을 써내려갈 것 같지는 않아.”
“흠.”
“애초에 말이지. 귀족들 밑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몇 번 켜고 떵떵거리면서 사는 거랑, 애써서 작곡으로 벌어먹고 사는 거랑. 삶의 난이도 자체가 틀리지 않냐.”
마티유 형은 고기 한 점을 썰어 입에 넣으며 날 향해 말했다.
꽤나 설득력 있는 말이다.
18세기 말의 예술인들 중 대다수는 ‘후원자’를 얻은 후, 그들의 지원 아래 창작활동을 하는 걸 정석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걸 위해 실력을 갈고 닦기 마련이었다.
운이 좋으면 왕이나 황제의 비호 아래, 궁정악단에서.
운이 그래도 상당하면 명망 높은 귀족들의 관심 아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운이 적당하면 명망 높지는 않아도, 지역 유지인 귀족들 아래, 수수한 저택에서.
운이 나쁘면 노상연주회라도 하면서 제 실력을 뽐내, 어떻게 해서든 높으신 분들의 컨택을 기다리는 게. 바로 이 시대의 예술인들이다.
아 혹시 그것도 안 되면 어떻게 하냐고? 굶어 죽어야지 어떻게 해. 18세기의 예체능도 똑같다.
그리고 내가 한 가지 희망을 걸고 있는 게 바로 그거란 말이지.
경영전략과 마케팅의 기본은 이해관계자, 즉 소비자들과 직원들의 심리와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다.
언제 올 지도 모를 기약 없는 컨택을 기다리는 패기 없는 예술가는 이미 논외.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뜨고 싶으며 동시에 실력은 있는 예술가들이 바로 내가 파악할 대상이다.
아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난 능력이 있는데 세상이 모르네!
그렇게 생각하는 예술가들만 우리 기획사에 집어넣어서 굴리면 적어도 태업으로 쪽박찰 일은 없겠지.
예술가들은 곡을 뽑아내 돈을 벌고, 우리는 양질의 곡을 공급받거나 중계해서 팔 수 있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지.
“그리고, 네가 말한 그 기획사. 첫 번째 사수가 정말 초대박을 터트려야 가능성이 보일 것 같다?”
“그래?”
“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잖아. 이 주식이 오른다!-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사고, 뭐가 유행이다!-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치장하고.”
“···기획사에서 내보내는 첫 번째 음악가가 제대로 성공을 거두면, 그 뒤를 따라 유망주들이 들어올 거다?”
“아무래도 그러지 않겠어?”
하기야 21세기에 존재했던 유명 연예기획사들도 제대로 히트 친 연예인들을 앞세우지 않았나.
거기에 자기보다 앞서서 데뷔한 사람이 확실한 성공을 보여준다면, 연습생들도 덩달아 열심히 하는 건 물론이요. 추가로 지원자가 늘 수도 있겠지.
물론 첫 번째 타자가 제대로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우리 첫 번째 투수가 즈으응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거야.
“첫 번째 유망주가 성공해야 한다-라, 그건 별로 걱정 안 되는데.”
“···아니. 그게 제일 어려운 거 아니야?”
“우리가 키우는 유망주가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뭐... 이름이 비발디나 바흐라도 돼?”
비발디, 바흐라.
아니! 내가 가진 카드는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살짝 비튼 마티유 형에게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베토벤.”
“···베토벤? 처음 들어보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잘 기억해 두라고.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키우는 초특급 유망주니까.”